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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반도체 규제 완화 거부로 딜레마에 빠진 한국 지배계급

한미 정상회담에서 핵심 쟁점 하나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에 따른 규제 문제였다.

한국 산업계는 이 법들에 따른 피해를 줄이는 것을 급선무로 보고 있었다. 이번 방미에 4대 그룹(삼성·SK·현대차·LG) 총수와 경제단체 6곳 등 122개 기업·단체가 동행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 결과를 한국 기업 입장에서 보면, IRA와 반도체법 관련한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양국 공동성명에서 “IRA와 반도체법에 관한 한국 기업들의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한미 양국은 긴밀한 협의를 이어 왔고,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고 밝힌 게 전부다.

한국 정부는 IRA와 반도체법 관련 규제를 미국과 협의해 왔지만, 한미 정상회담 때까지도 미국의 양보를 얻어 내지 못했다 ⓒ출처 산업통상자원부

미국의 반도체법은 반도체 기업들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신, 반도체 기업의 영업 기밀 제출과 ‘초과이익 환수’ 등을 조건으로 걸고 있다. 그러나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영업 기밀이 경쟁 상대인 미국 기업들로 유출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또, 이 법은 중국으로의 신규 반도체 장비 수출도 규제하고 있다. 중국에서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새로운 장비를 제때 공급하지 못하면 막대한 손실을 볼 수 있다. 이 조처는 지난 한일 정상회담 직후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들에게 1년간 유예해 줬다.

최근에는 중국 정부가 미국 마이크론의 반도체에 대해 안보 조사를 실시하며 반도체 판매를 막으려는 조처를 준비 중이었다. 〈파이낸셜 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이로 인해 생길 중국의 반도체 부족분을 한국 반도체 기업이 채워 주지 말라고 요청했다. 미국 정부는 이 보도를 부인하지 않아, 실제 이런 요청을 한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이미 IRA 시행으로 한국의 자동차와 배터리 기업들이 미국의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돼 큰 타격을 받았는데, 미국의 반도체법 때문에 기업들이 또다시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중국 시장에서 손해를 볼 처지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중국 투자 규제 유예 기간이 올해 9월이면 끝나므로 이를 연장해야 하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발등의 불을 꺼야 하는 다급한 처지이다.

이 때문에 주류 정치인들 일각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민주당은 이번 정상회담이 “의전과 환대를 대가로 철저히 국익과 실리를 내준 회담”이라고 비판했다. 여권 인사인 유승민도 “우리 기업들은 앞으로 중국 공장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윤석열 정부는 한미 정상회담을 디딤돌 삼아 향후 미국과의 협상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미뤄 왔던 미국 반도체 보조금 신청을 하고, 미국 정부와 협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바이든이 미국 반도체법에 대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있다. … [한국과 미국에] 윈윈(win-win)으로 본다”고 말한 것을 보면, 향후 협상도 순탄하지 않을 듯하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 결과는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협조하는 대신 미국의 양보를 끌어내어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도 유지한다는 한국 지배계급의 전망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보여 줬다.

앞으로 미·중 갈등이 증대됨에 따라 이 갈등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둘러싸고 한국 지배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가 한국 기업들의 이익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 기업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정부의 위기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자국 중심주의

한편, 이번 정상회담은 미국 바이든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계획에 여러 난관이 있다는 점도 보여 줬다. 물론 미국의 정책이 중국의 반도체 산업 성장 전략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지만 말이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의 반도체 기술 경쟁력 향상을 막고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을 갖추는 것이 경제적·군사적 우위를 지키는 데서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공급망이 교란되면서 세계적으로 생산에 차질이 빚어진 상황이 바이든 정부의 구상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런 우려를 미국 바이든 정부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유럽연합(EU)도 반도체법을 통과시키고, 2030년까지 약 430억 유로(약 62조 원)를 지원해 유럽 내의 반도체 생산량을 세계 9퍼센트 수준에서 20퍼센트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일본도 대만 TSMC를 끌어들여 대규모 반도체 생산 공장을 짓는 중이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진행돼 온 세계화의 영향으로 반도체 산업의 국제 분업이 매우 발달했다. 미국이 반도체 설계와 설비 기술을 주도하고, 유럽·일본이 생산 설비와 원료 등을 공급하고, 생산은 대만과 한국 등이 담당하는 국제 분업 구조가 발달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유무형의 규제를 하고, 보조금으로 생산 시설을 미국으로 끌어들이려 해도, 공급망을 재편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는 대만과 한국 같은 동맹국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국제 분업 구조에서 급속히 성장한 중국은 생산 기지일 뿐 아니라 상품 판매 시장으로서도 영향력이 매우 커졌다. 한국 기업뿐 아니라 일본·유럽 기업들, 심지어 미국 기업들조차 여전히 중국을 매력적인 시장으로 여기고 있다.

미국이 기업들을 중국 시장에서 떼어 내려면 그만한 대체 시장을 제공해야 하지만 지금 미국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이 때문에 반도체 생산 능력을 키우려는 미국의 계획이 한국이나 대만 같은 동맹국들의 불만을 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뿐 아니라 미국·유럽·일본도 이제는 자국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의 공급망을 교란시킬 것이고, 이 충격은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더욱 높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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