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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9.4 공교육 멈춤의 날’ 참가를 조직한 경험

지난여름 갑자기 들려온 서이초 선생님의 비보와 연이은 집회를 보며, 처음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운동 속에서 9.4 공교육 멈춤의 날(이하 ‘멈춤의 날’)이 제안됐다. 나는 여기에 동참하려는 선생님들의 열의에 정신이 들어 적극적으로 ‘멈춤의 날’ 조직에 뛰어들었다.

동 뜨기

‘멈춤의 날’이 제안되기 전까지 나는 개혁 입법을 정말로 얻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개학하자마자 ‘현장에는 별 변화가 없을 수 있으니, 위기에 처한 교사가 있는지 확인하고 학교 수준의 대응책도 세우자’ 하며 동료 교사들에게 회의를 제안했다.

그런데 이 회의를 하게 될 즈음엔 ‘멈춤의 날’ 참가 결의 서명자가 6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첫 회의에도 학교 평교사 27명 중 20여 명이나 참여했다. 나는 ‘멈춤의 날’을 조직하려던 두 명의 다른 교사와 뭉쳐서, 그날 온 선생님들의 결의를 모았다.

처음엔 3분의 2가 넘는 교사들이 ‘멈춤의 날’을 지지해 재량휴업일 지정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교직원회의에서 재량휴업일 지정을 성공시키고자 유인물을 뿌렸다.

당시 교육부가 탄압을 예고했고, 우왕좌왕하는 교육감과 눈치 보는 교장들 속에 교사들이 징계 위협에 노출된 불안한 상황이었다. 나는 유인물에 쓴 글에서 교육부를 비판하고 우리 대의를 앞세우며, 재량휴업이 안 되더라도 ‘멈춤’을 해 보자고 설득했다.

안타깝게도 교장이 주저해 재량휴업일 지정은 실패했다. ‘멈춤’은 징계를 감수하고 학생을 교실에 두고 나와야 하는 투쟁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16명이나 되는 교사들이 ‘멈춤’을 해 보자고 결의했다. 나는 이들을 카톡방에 모았다.

흔들림과 결집

징계 위험이 있고 상황이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멈춤의 날’ 당일까지 선생님들의 결의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다. 그런데 투쟁의 구심 중 경력 많은 부장교사 한 명이 ‘멈춤의 날’ 불참자에게 욕을 먹더니, ‘의무적으로 일부는 학교에 남아서 학생을 봐야 욕을 먹지 않는다’며 대열을 흔들었다.

주도하던 사람이 그러자 화가 난 사람이 빠졌고 겁먹은 사람들이 흔들렸다. 누가 참가하고 안 할지 모르니 우리 학교 ‘멈춤의 날’ 참가가 흐지부지될지 모른다는 분위기가 돌았다.

부장교사가 탄압 위협과 ‘멈춤’ 불참자의 비난을 받고 돌아선 상황은 당시 교사 운동의 전개와 닮아 있었다. 이번 운동은 집회나 행동마다 주최자가 달랐는데, 주말 집회 조직자들과 9.4 ‘멈춤의 날’ 제안자들 일부가 정부가 탄압을 예고하자 ‘9.4 집회 때문에 합법 행동도 위험해졌다’면서 9.4 집회 조직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취소를 선언하게 했다.

사실 이런 전개는 어떤 운동이 탄압에 직면하면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다. (다만 이번 교사 운동에서는 집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시 똘똘 뭉쳐서 집회를 성사시켰다!) 학교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명백했다. 나는 이런 분석을 선생님들과 공유하고, 꾸준히 격려와 결집을 하려고 애썼다.

나는 비난에 위축되어 대열을 흔들었던 부장교사에게 ‘동료들은 앞장서 이끌던 당신이 비난 여론에 눌려서 후퇴하는 것으로 보고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하고 명확히 말했다. 다른 선생님들께는 나는 일관되게 싸우며 당일 ‘멈춤’에 참가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조직을 계속했다.

우리 반 학부모님들께는 ‘멈춤의 날’을 안내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통신문을 보냈다. 그러자 20명 중 9명이 교외체험학습을 냈고 8명의 학부모님으로부터 응원 메시지를 받았다. 통신문을 옆 반 선생님들께 공유했더니 영감을 받아 모두 통신문을 보내셨다. (그래서 응원도 많이 받았고 우리 학년의 출석률이 학교에서 가장 낮았다.)

학부모의 응원 메시지를 이름을 가려 유인물로 만들고 ‘한 명이라도 더 참가하면 의미가 있습니다. 9.4 멈춤의 날에 함께해요’라는 호소문을 써서 모든 교사에게 돌렸다. 우리 학교 참가자가 적더라도 전국적으로 한 명이라도 더 나가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맞이한 주말, 집회에는 20만 명이 모이고 교사 사망 뉴스가 추가로 보도됐다. 자신감과 분노 모두 고조되는 소식이었다.

9월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고 서이초 교사 49재 추모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날 전국에서 5만여 명의 교사들이 연·병가를 사용해 참가했다 ⓒ조승진

‘멈춤의 날’ 전날 밤 나는 이번 투쟁의 의의를 역설하고 규모가 작아도 무의미하지 않다는 내용의 글을 카톡방에 올렸다. 선생님들은 ‘엄지 척’ 호응을 보내며 마지막 결의를 다졌다.

당일 아침이 되자 15명이 연가·병가를 냈다. 그중 2명은 고민하다가 참가를 결의한다는 감동적인 메시지를 카톡방에 올렸다. 내 옆 반 선생님은 부장의 폭탄 발언으로 대열이 흔들렸다고 생각해 투쟁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는데, 나의 글을 읽고 주말 내내 고민하다 결의한다고 말씀하셨다.

일관되게 투쟁을 밀고 가는 사람은 대개 소수라서 상황 자체를 뒤바꿀 수는 없는 경우도 많다. 나도 교육부의 탄압 위협과 대열이 흔들린 사건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바람이 내게 유리하지 않아도 꾸준히 물장구를 쳤다. 그 결과 파도가 크게 일었을 때 우리 학교의 배를 한 뼘 더 나아가게 했다.

주저 없이, 일관되게

“단결은 쟁취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멈춤의 날’은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제안했으나, 그것만으로 파업 행동이 조직되기는 쉽지 않다. 어떤 교사가 학생을 남겨 두고 그리 쉽게 나설 수 있겠는가. ‘멈춤의 날’에 참여한 15명 중 전교조 조합원 2명을 빼고는 연가 투쟁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냥 개인들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몇몇과 구심을 형성해 사람들을 모았고, 대열이 흔들릴 때 투쟁을 일관되게 이끄는 지도부 구실을 자처했다.

9.4 행동이 끝나고 나서 선생님들이 나에게 해 주신 말씀은 “고생했다, 잘 ‘이끌어 줘서’ 고맙다”였다. 비록 학교에서 부장도 아니고 경력도 적지만, 선생님들은 나를 ‘멈춤의 날’ 투쟁의 구심으로 보고 계셨던 것이다.

네 반으로 이뤄진 같은 학년 교사들은 연가·병가를 안 썼어도 조퇴라도 내고 KTX를 타고 서울 집회에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내 덕분에 이번 운동에 제대로 참여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투쟁을 전진시키고 싶다면, 중요한 순간에 주저 없이 나서서 주변의 사람들을 조직하자. 투쟁에도 한 뼘 기여하고, 나도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