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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간의 전국교사집회를 잠시 돌아보며:
사회 전반에 큰 파급력을 미친 교사 운동

서이초 교사의 죽음으로 시작된 ‘전국교사집회’는 엄청난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사건이 알려지고 며칠 되지 않은 7월 22일 교사 5000여 명이 모여 첫 집회를 열었다. 교사들은 ‘진상 규명’과 ‘교권 보호’를 요구하는 주말 집회를 매주 이어갔다. 2차 집회부터 금세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9월 2일 7차 집회에는 놀랍게도 20만 명이 넘는 교사들이 모였다.

20만여 명이 참가한 9월 2일 7차 집회 ⓒ출처 교육을지키려는사람들

두 달도 안 돼서 집회 규모가 40배 이상 성장한 것이다. 9월 4일까지 집회 참여 규모를 연인원으로 따지면 50만 명이 넘는다. 국내 유·초·중등 교사 수가 50만 명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숫자다. 한국 교사 운동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주최 측 추산 참가 인원은 1차 5000명, 2차 4만 명, 3차 5만 명, 4차 4만 명, 5차 5만 명, 6차 6만 명, 7차 20만 명, 9월 4일 12만 명(서울 5만 명, 지방 7만 명)). 주말 집회를 수만 명씩 이어간 것도 대단하지만, 단체 행동권(파업권)이 없는 교사 10만여 명이 평일에 연가·병가 등을 내고 집회에 참여한 것은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교사 운동의 폭발적 에너지는 교사들의 누적된 불만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줬다. 서이초 교사의 죽음으로 지금까지 숨죽여 있던 교사들의 분노와 요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난 두 달간의 교사 운동을 톺아보고 전망과 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운동의 전개 과정

7월 19일 서이초 교사의 사망 사건이 알려지자 교사들은 즉각적이고 집단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추모와 함께 그동안 참고 참아 온 분노를 터뜨렸다.

7월 20일 한 교사가 ‘인디스쿨’(초등교사들의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에 “함께 모이자”는 글을 올린 것이 전국교사집회가 시작된 계기였다. 다음 날 ‘고인의 49재 날인 9월 4일 연가나 병가를 내자’고 제안하는 내용의 글도 올라왔다.

22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열린 1차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전국교사집회’에는 주최 측의 예상을 뛰어넘어 5000여 명이 모였다. 여기에 모인 교사들은 서이초 교사의 사례와 닮은 자신의 고통을 폭로했고, ‘교사 생존권’과 ‘교사 인권’ 보장을 외쳤다.

절박한 요구 7월 29일 열린 2차 집회 ⓒ조승진

전국교사집회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2차 집회 주최 측은 “9월 4일까지 매주 토요일 집회는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끝내서는 우리는 또 고통을 혼자 삼키게 될 것”이라고 밝혀 두 달간 집회가 이어질 것을 예고했다. 7월 29일 서울정부청사 앞에서 열린 2차 집회에는 폭염 속에서도 전국에서 교사 3만여 명이 모였다. ‘교사의 교육권 보장하라’, ‘안전한 교육환경 조성하라’ 등 집회의 구호도 1차에 비해 구체화했다.

8월 5일 열린 3차 집회부터 요구는 ‘법 개정’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무대 현수막의 내용은 ‘법으로 교사의 교육권을 보호하라!’, 손팻말의 내용은 ‘아동학대처벌법 개정하라’였다. 집회 마무리 발언에서 사회자는 “여러 교원단체가 ... 함께 공동안을 내어달라”고 외쳤고, 참가자들은 크게 환호했다.

8월 12일 4차 집회부터 더 구체적으로 법 개정과 제도 마련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6개 교원단체 대표들이 공동결의안을 마련해 무대에 올랐다. 결의문에는 아동학대 관련 법 개정, 민원창구 일원화와 악성 민원인 방지 방안 마련, 수업 방해 학생 분리 조치 등 교사의 실질적인 생활지도권 보장, 정서행동 위기 학생 지원책 마련 요구 등이 담겼다. 교사들은 “교육부는 응답하라! 국회는 행동하라!”를 외쳤다.

정부는 교사 운동의 확산세를 보고 부랴부랴 대책을 내놨다. 8월 17일 발표한 ‘학생 생활지도 고시안’이 주요 대책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대책은 교육부와 교육청의 책임은 없고, 교사 개인이 알아서 학생을 통제하라는 방안이었다.

8월 19일 5차 집회부터는 국회 앞으로 장소를 옮겼다. 국회를 압박해 법 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서이초 교사의 49재인 9월 4일까지 정부와 국회가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으라는 점을 강조했다.

정부는 확산일로에 있는 교사들의 집단행동을 막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병행 사용했다. 8월 23일 드디어 한 달 전 약속했던 ‘교권회복 및 보호강화 종합방안’을 발표했다. ‘교권 보호는 이만하면 됐으니 거리로 나온 교사들은 이제 학교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교사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정부의 방안은 현장 교사들이 보기에 별 실효성이 없는 데다, 학생인권조례 개정이나 교권 침해 생활기록부 기재 등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생활고시안’에다 ‘종합방안’까지 내놓아도 교사들의 집단행동 움직임은 갈수록 확대했다.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에 연가·병가 등으로 동참하겠다는 교사 서명은 8만 명에 달했고, 재량휴업일 지정을 계획 중인 학교도 500여 곳에 달했다. 계속되는 주말 집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평일 집회만으로는 안되고 ‘우회 파업’과 같은 집단행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했기 때문이다.

이에 교육부는 8월 24일 ‘9월 4일’ 연가·병가 사용 및 학교 재량휴업을 통한 교사들의 집단행동 움직임을 ‘불법행위’로 규정하고 엄정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교사들의 집단행동을 차단하기 위해 징계 협박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교육부의 “엄정 대응” 기조와 달리 교육감들 사이에서는 상이한 입장이 나타났다. 서울, 세종 등 진보 교육감들은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 지지 입장을, 경기, 강원 등 보수 교육감들은 반대 입장을 밝혔다. 교사들의 운동이 커지자 사용자 간에도 이견과 갈등이 생긴 것이다. 교총은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고 국민 여론을 의식해 당일 집회를 저녁 문화제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는 등 사실상 공교육 멈춤을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교육부가 강력하게 제동을 걸면서 현장 교사들과 집회 운영진들 사이에도 이견이 생겼다. 9월 4일 집회를 두고 찬반 의견이 갈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8월 26일 6차 집회가 열렸다. 교사들의 주요 구호는 ‘현장 의견 반영하라!’였다. 정부의 방안이 현장 교사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메시지였다. 당일 연단에 세종 교육감을 세운 것은 9월 4일 연가 파업을 좌절시키려는 교육부에 맞서 ‘공교육 멈춤의 날’ 지지 발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교사 운동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를 두고 기로에 놓인 시점이었다. 무엇보다 국가 탄압에 맞서 운동을 어떻게 전진시킬 것이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6차 집회가 열린 날 진행된 전교조 임시대의원대회에서도 이 문제가 쟁점이 됐다. 일부 대의원들이 전교조가 9월 4일 행동에 조직적 참가를 결정하고 대내외에 호소해 행동에 참가하려는 교사들에게 힘을 주고 우산이 돼야 한다는 취지의 수정안을 제출했지만 안타깝게도 통과돼지 못했다. 운동이 국가 탄압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전교조 지도부는 운동을 사실상 정부 공격에 방치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엄정 대응 방침에도 교사들의 집단행동 움직임이 수그러들지 않자, 정부는 8월 27일 징계 협박 수위를 높였다. 일요일인데도 보도자료 내고 시·도교육청에 ‘복무관리 철저’ 공문까지 내려보냈다. 교육부는 집회 참석, 연가·병가 사용 및 승인, 학교 임시 휴업 등 행위를 한 경우 학교장과 교사 모두 국가공무원법 등에 따라 최대 파면·해임 징계와 형사 고발이 가능하다고 경고했다.

‘9.4 49재 추모 국회 집회’ 운영팀은 27일 밤, 공지문을 통해 “집회를 전면 취소하고 운영팀은 해체한 뒤 하나의 점으로 돌아가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정부가 협박 수위를 높인 탓도 있지만, 9.4 집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집회를 강행하면 교사들을 분열시키고 운동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집회 운영진을 압박하고 비난했다.

설상가상으로 각 시도교육청은 교육부의 겁박 공문을 별 이의제기 없이 학교 현장에 내려보냈다. 진보 교육감들은 말로는 교사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면서도 교육부 눈치를 보면서 한 발 물러서 뒷짐을 졌다. 이런 상황에서 구심점이 없는 운동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학교들이 잇달아 재량휴업 계획을 취소하면서 500여 곳으로 예상했던 휴업 학교가 20여 곳으로 줄어들었다. 일선 교사들이 연가나 병가 계획을 포기하거나 휴가를 신청하는 과정에서 학교장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전교조 조합원들은 도대체 집회가 열리기는 하는 건지, 노조의 지침은 있는 건지 답답해 했고 위축된 학교 현장에서 주변 교사들을 조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교사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노동조합, 특히 전교조가 나서 주기를 기대하는 글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다행히 9.4 집회 운영진이 해체한 다음 날 새로운 집회 운영진이 꾸려졌다. 하지만 정부의 탄압과 집회 반대 교사들의 비난을 의식해 공개적 활동을 꺼렸다. 운영진에서 집회 참여 설문을 했는데, 당시 주말까지만 해도 4000여 명대에 머물렀다. 1주일 전과 비교하면 크게 위축된 분위기였다. 전교조 지도부가 이러한 혼란과 우여곡절을 보지 않고 ‘점들의 연대’와 ‘디지털 민주주의’를 추켜세우는 것은 결과론적 사고일 뿐이다.

8월 31일과 9월 1일 발생한 또 다른 비극은 교사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한편,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을 방해하는 교육부에 항의라도 하듯이 전국의 수많은 교사가 9월 2일 집회에 모여들었다.

20만 명이 넘게 모인 7차 집회의 메인 슬로건은 ‘우리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끝까지 한다’였다. 가까이는 9월 4일 행동을 겨냥하고, 멀리는 진상규명과 실질적인 교권 보호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끝까지 싸운다는 단호한 메시지였다.

정부는 끝까지 9.4 집단행동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9월 1일에는 「여·야·정·시도교육감 4차 협의체」에서 교권 보호 4대 입법을 합의했다는 보도자료를 내면서 곧 입법화가 될 예정인 것처럼 선전했다. ‘공교육 멈춤의 날’을 하루 앞둔 9월 3일 ‘교육부와 현장교사와의 토론회’를 열어 교사들을 달래는 한편, 이주호가 나와서 집단행동을 자제해 달라는 호소문을 깜짝 발표하기도 했다.

9월 3일 또 다른 교사(용인의 한 고등학교)의 비극이 알려졌다. 정부가 교사들의 절실한 바람을 외면한 탓에 계속되는 교사들의 비극에 대한 슬픔과 분노, 9월 2일의 경이로운 규모의 집회로부터 얻은 자신감, 9월 4일 동료 교사의 추모 집회도 방해하는 교육부에 대한 반감 등이 맞물리면서 9월 4일 집회는 예상을 뛰어넘어 많은 교사가 참여했다. 정부의 협박도, 이간질도 먹히지 않았다. 국회 앞에 5만 명이, 부산 등 13개 지역의 추모 집회에 7만여 명이 참가했다.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 중징계 위협에도 10만여 명이 거리로 나오다 ⓒ조승진

9월 4일 집회의 주요 슬로건은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우리가 바꾸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킨다’였다. 이전 집회에서 정부와 교육 당국에 호소하던 목소리와 달리 정부를 강하게 규탄하고 교사들 자신의 힘과 행동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이날 집회에서는 정부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드러났다. 교사들은 “학교 현장 혼란 초래 책임 회피 이주호는 반성하라”, “징계 운운 권한 남용 교육 분열 이주호는 사과하라”, “직권 남용 이주호를 처벌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집회를 마무리하면서 사회자는 “9월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교권 관련 법안들이 반드시 처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교권단체들이 나서 국회, 교육부와 교섭하십시오. 단체의 힘을 보여주십시오. 더 강력한 목소리로 행동으로 쟁취해 주십시오”라며 앞으로 교원단체들이 적극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9월 4일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운동의 효과

교사 운동은 당장 요구를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진정한 대중운동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가지 효과를 낳았다.

첫째, 교사의 문제를 사회적 화두로 부각했다. 교권 보호에 대한 광범한 지지가 형성됐다. 학교 비정규직 노조를 비롯하여 많은 노조와 사회단체들이 9월 4일 교사들의 집단 행동을 지지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교원단체들이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학부모들도 다수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교권 보호는 보수적 요구라며 교사 운동에 거리를 두던 일부 좌파들도 운동이 지속되고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자 지지 입장 발표나 참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당장의 가시적 성과보다 투쟁을 통해 얻은 노동자들의 경험이 중요하다. 운동에 참여한 많은 교사, 특히 청년 교사들은 집회에 참여하는 것도 처음일 수 있다. 그전에는 교사가 순응적이고 모래알처럼 분산돼 있다는 생각이 강했지만, 대규모 운동을 통해 교사 노동자들도 단결해 싸울 수 있고, 싸우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의식도 성장했다. 정부와 교육 당국이 교권의 보호자가 아니라 침해자라는 점을 깨닫고, 교사의 권리는 스스로 지키는 것이고, 투쟁을 통해 교육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자랐다. 조직도 확대·강화됐다. 운동이 확대하면서 노조 가입도 늘어났다.

셋째, 9월 4일의 집단행동은 징계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정부를 한 발 물러서게 만들었다. 산업적 효과는 미약할지라도, 단체 행동이 금지된 교사들의 집단적 ‘연가 투쟁’은 (교사의 사용자가 정부라는 점 때문에 더욱) 정부에 맞서는 정치적 효과가 크다.

교사들의 행동을 학부모들도 지지하다 ⓒ현민수

이 때문에 이 운동은 교사 노동자들뿐 아니라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에게도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등 고무적 효과를 낼 수 있다. 특히 교사와 비슷한 처지의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 공무원 노동자,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서비스 노동자 등 여러 부문의 노동자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 윤석열 정부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무해 전반적인 계급투쟁과 세력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9월 4일 이후 교육계에서 변화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9월 4일의 집단행동은 교사의 정치기본권 요구 목소리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교사노조연맹은 민주당과 함께 교사의 정치기본권 보장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고, 전교조는 이수진 국회의원을 통해 정치활동 금지 규정 삭제, 단체교섭 대상에 ‘교육정책’ 신설 등을 포함한 교원노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한편, 교육부는 올해 교원평가 유예를 검토 중이다. 교원평가에서 성희롱 등 교권 침해 논란이 있는 데다가 당장 교사들의 불만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은 대규모 교사 운동이 낳은 효과 중 일부다.

전망과 과제

9월 4일까지 규모를 키우며 달려온 교사 운동은 잠시 숨을 고른 후 9월 16일 주말 집회로 다시 시동을 거는 모양새다. 서이초 교사의 49재 추모 집회를 치른 다음 날 또 다른 교사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계속되는 교사들의 비극을 보면서 많은 교사가 현실을 바꿀 때까지 행동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느끼고 있다. 국회 논의만 지켜보지 않고 집회를 이어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행동을 지속해야 교사들의 수동성과 사기 저하를 예방할 수 있다.

운동이 지속되면서 교사들의 바람과 정부의 대책 간에 괴리가 크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 지고 있다. 교사들은 더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하지만, 정부는 미봉책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생활지도 고시안’과 ‘교권 보호 및 교권 강화 종합방안’을 내놨지만 학교 현장에 변한 것은 거의 없다. 바뀐 것이라고는 학교 전화 통화 연결음뿐이라는 자조섞인 얘기도 들린다. 오히려 현장의 문제만 더 키운다는 불만 섞인 얘기도 나온다. 가령, 학교에서는 당장 수업 방해 학생 분리 조치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정부가 재정과 인력 대책은 내놓지 않고 학교에서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교사들의 업무가 늘어나고 갈등이 더 심해질 우려가 있다.

교권 보호 관련 법안이 개정되면 교사들의 일부 고충이 개선되는 점이 있겠지만, 법령과 제도 정비만으로는 교사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기 어렵다. (물론 법안의 구체적인 내용도 지켜볼 일이다!) 예컨대, 아동학대 신고의 오남용을 줄이는 법 개정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교사와 학부모의 갈등을 양산하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일부 학부모는 교사를 괴롭히는 또 다른 수단을 찾으려 할 것이다.

지금 교사 운동은 ‘교육권’ 문제에 집중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교사들의 고통은 ‘교육권’으로만 표현될 수 없는 많은 요인을 포함하고 있다. 최근 수많은 교사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유는 교사들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기 때문이다. 교사의 고통이 100℃에 달해 끓어 넘친 부분이 교권 문제라면, 끓어 넘칠 때까지 참고 또 참았던 많은 문제들이 쌓여 있다.

따라서 교사들의 처지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면 교육권 보장을 넘어 교사의 조건과 환경 개선을 위한 투쟁으로 발전해야 한다. 또한 법 개정안이나 방안 마련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재정과 인력 투입을 요구하는 등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해야 한다.

생색내기에 그치고 있는 정부 대책 ⓒ출처 교육부

한편, 윤석열 정부는 교원 감축, 재정 삭감 등 되레 교사들의 조건을 공격하고 경쟁교육을 강화하는 등 학교를 더 위험한 공간으로 만들려 한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려는 학생인권조례 개정이나 교권 침해 생활기록부 기재도 문제다. 따라서 정부와의 협상보다는 정부에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 위기 심화에 직면해 긴축을 펴고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교육 경쟁과 통제를 강화하려는 정부를 상대로 양보를 얻어내려면 만만찮은 투쟁이 필요하다.

영국의 교사들은 교권 보호 조처들(2013년)이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2014년 업무 경감과 임금 인상 등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올해는 물가 인상으로 인한 실질임금 삭감에 맞서 12퍼센트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역대 최대 규모의 교사 파업이 벌어졌다. 그 결과 정부로부터 상당한 양보를 얻어냈다. 프랑스 교사들도 정부의 연금 삭감 시도에 맞서 파업을 벌였다.

2018년 미국의 웨스트버지니아주 교사들은 임금 대폭 인상과 교육 예산 삭감 반대를 내걸고 파업을 벌였다.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이 법으로 금지돼 있지만, 교사들은 주 산하의 모든 교육구에서 2만 명이 동시에 파업을 벌였다. 여기서 시작된 교사들의 파업은 이후 몇 달 동안 오클라호마주, 켄터키주, 애리조나주, 콜로라도주, 노스캐롤라이나주 등으로 확산되면서 영감을 줬다.

한국의 교사들도 영국, 프랑스, 미국의 교사들처럼 전투적으로 싸울 수 있다.

정부로부터 개혁 조처를 얻어 내서 교사들의 조건과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교사의 위기는 자본주의 학교 시스템의 본질에서 비롯한 구조적이고 심층적인 문제다. 자본주의 경쟁 교육은 교사·학생의 소외를 심화시키고 학교 구성원들의 갈등을 양산한다. 이로 인해 많은 나라들이 ‘교권 침해’ 문제를 공통으로 겪고 있다. 각국은 여러 대책을 내놨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상황은 악화하고 있다. 학교는 점점 더 교육이 불가능한 곳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권 위기 문제를 체제의 문제와 연결해서 봐야 하고 그래야만 근본적인 해결책도 찾을 수 있다.

교사의 위기와 이에 대한 불만이 높고 운동의 에너지가 커서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9월 4일을 기점으로 운동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을 듯하다. 예컨대, 법 개정 이후에는 운동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 운동 참가자 다수가 ‘법 개정’을 향해 달려온 터라 그들이 무엇을 얻었는가 하는 문제부터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운동이 터져 나온 초기에는 광범한 단결을 이루는 듯하다가도, 운동의 국면이 바뀌면 참가자들 사이에서 투쟁 방법이나 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두고 이견이 표출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전열을 가다듬은 뒤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으려 애를 쓸 것이다. 이 시점부터는 운동의 성장을 위해 더는 정치적 논쟁을 피할 수 없다. 지금껏 부각되지 않았던 여러 문제들이 이야기되고 중요한 문제로 부상할 수 있다. 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둘러싼 논쟁뿐 아니라 교권의 개념이나 교권과 학생 인권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운동 내 이견이 있다. 교사 운동은 교사의 위기뿐 아니라 총체적인 공교육의 문제를 드러냈다. 따라서 일부 운동 참가자들은 근본적인 교육의 해법을 고민할 것이다.

서이초 사건으로 촉발된 교사 운동은 큰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을 현실화하려면 운동 내 좌파는 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운동 내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급진적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교사 집회의 ‘정치 배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번 교사 집회는 몇 가지 점에서 기존의 집회 운영과 다른 특징을 보였다.

소위 “점들의 연대”를 표방하며 “정치 배제”와 교사 개인의 자발적 참가를 강조했지만, 동시에 집회 운영진(“전국교사일동”)이 제공한 손팻말 외에 다른 팻말을 들지 못하도록 하고, 참가자들이 유인물을 받는 것도 막는 등 상당한 정도로 집회를 통제했다.

혹자는 이러한 집회 운영 방식을 ‘탈노조(탈조직)’나 ‘탈정치(자율주의)’적 현상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부정확할뿐더러 교사 운동의 역학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전국교사일동이 집회를 조직(통제)하는 방식을 이해하려면 운동의 요구 문제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집회 운영진은 처음부터 집회의 구호를 ‘교권 관련 법 개정과 제도 마련’으로 집중했다. 자유발언 등에서 교사의 과중한 업무 문제 등이 제기된 것을 볼 때, 현장 교사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기보다는 운영진의 의식적 노력의 결과였다.(물론 전교조를 비롯한 교원단체들이 법 개정안 마련에 골몰하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럼 ‘전국교사일동’이 운동의 요구를 다소 엄격하게 ‘교육권 보장’으로만 요구를 제한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현실에서 교사들이 겪는 고통이 주로 고소·고발 등 법적인 문제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장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봤을 것이다.

또한 집회 주최 측은 초기부터 ‘순수성’을 매우 강조했다. ‘교사의 교육권 보장’은 월급을 올려 달라거나 인력을 늘려 달라는 등 교사 집단의 ‘이기적인’ 요구가 아니고, 자신의 안전뿐 아니라 학생의 학습권 보장과 안전한 교육환경 조성을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하지만 교사의 조건은 교육의 질을 좌우하는 문제이므로 이기적인 요구가 아니다!)

이를 위해 전국교사일동의 다수는 법령과 제도의 정비를 핵심으로 봤고, 이를 위해 정부와의 협상을 중시했다.

이처럼 법 개정에 중점을 두면서 전국교사일동의 다수는 교권 문제에 한해서는 교육청이나 학교 관리자도 같은 이해관계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운영진은 교육감, 교장·교감을 연단에 올리고 그들도 한목소리라는 점을 보여 주려 애를 썼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전국교사일동이 왜 조직과 정치를 배제하는 태도를 취했는지도 설명이 가능하다.

정부나 정치권과 협상을 하려면 특정 노조나 단체의 입장을 내세우지 말고 여러 교원단체가 공동으로 합의한 요구안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회에서 여야 간 정쟁으로 시간만 끌게 될 수 있다고 봤다. 또한 교사들의 정치 중립 의무도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교원단체는 전교조, 교사노조연맹, 교총 등으로 분할돼 있다. 이런 현실에서 특정한 조직(노동조합이나 단체)이 주도하는 운동은 교사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운동의 규모를 키우는 데 불리하다고 본 듯하다. 즉, 교원단체 자체를 운동에서 배제하려 한 것이 아니라 특정 단체 주도를 경계한 것이다.

특히, 전국교사일동은 교사 운동이 전교조로 대표되는 것을 경계했던 것 같다. 그동안 전교조가 진보 교육감들과 동행하는 행보 때문에 교사들에게 대안으로 인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과대 포장된 전교조의 이미지(정치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조합) 탓에 전교조가 운동 전면에 나서면 자신들의 요구가 왜곡되고 비난 여론과 정부 탄압이 거세질 것이라고 우려한 듯하다.

결국 개인의 자발성과 “정치 배제”를 강조한 것은 제대로 된 개혁 입법을 달성하기 위해 더 많은 교사들을 모으려는 전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전국교사일동이 교사 개인의 자발성을 강조하면서도 일견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방침을 실행한 것은 운동이 발전하면서 모순과 한계에 부딪혔다.

예를 들어, 집회 운영진은 학교 관리자들을 연단에 세워 모든 교원이 한목소리라는 점을 보여 주려 했지만, 자유발언에서는 갈수록 교육 당국과 학교 관리자들 규탄하는 발언들이 늘어났다. 일선 교사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교육 당국과 학교 관리자들이 진짜 문제라고 보는 교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권 보호를 법 개정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것 자체가 정치적 문제다. 그래서 “정치 배제”라는 표방과는 달리 집회 초기부터 교육감협의회, 6개 교원단체, 여야 국회의원 등 다양한 단체와 정치 세력들이 연단에 올라왔다. 9월 4일 집회에는 국민의 힘(3명), 민주당(9명), 정의당(4명) 소속 국회의원들이 다수 참석했다. 그래서 사실 운동에서 정치를 배제한다는 것은 완전히 비현실적이고, (주류의 정치에 대항하여) 투쟁을 전진시키고자 하는 좌파를 주로 배제하는 안 좋은 효과를 낸다.

교원단체 모두가 단결하도록 촉구한 것도 현실에서는 제대로 실현될 수가 없었다. 초기에 교원단체 6곳이 공동결의안에 합의했지만, 나중에 실제 입법화를 겨냥한 공동요구안 작성에서는 교총이 빠졌다. 교권 침해 생활기록부 기재 등 학생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놓고 단체 간에 견해차가 있기 때문이다.

‘점들의 연대’가 주말 집회를 하는 데까지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 행동을 조직하는 과정에서는 정부의 탄압에 취약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더 많은 교사들이 개인들의 자발적 집회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교사들의 요구를 성취하려면 더 강력한 행동이 필요하고 여기에 노동조합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운동이 확대되면서 교사들의 자신감이 커진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