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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나크바?

이스라엘군이 가자 지구에서 자행한 학살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다.1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지난 75년에 걸쳐 겪어 온 추방과 폭력이 한층더 격화된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는 12월 초 현재, 한 추산에 따르면 가자 지구의 사망자는 2만 31명에 이르고, 그중 8176명이 어린아이다.2 항공 사진들을 보면 여러 주거 지역이 폭격으로 초토화됐다.3 전체 주택의 약 절반이 일부 또는 전부 파괴됐다.4 가자 지구에 투하된 폭탄의 총 위력은 TNT 2만 5000톤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비교를 위해 언급하자면 제2차세계대전 때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 “리틀 보이”의 위력이 1만 5000톤으로 평가된다.5

가자 지구 거주민 약 80퍼센트가 피란민이 됐다. 그중 다수는 이스라엘군(IDF)이 가자 북부의 팔레스타인인 약 100만 명에게 와디가자 하천 이남으로 대피하라고 통보한 뒤 가자 북부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소개령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안전하다”던 가자 지구 남부에서 전투 45일차까지 총 3676명이 사망했다. 수용 한계에 이른 유엔 대피소에서는 “설사, 급성 호흡기 질환, 피부 감염, 이蝨 등의 위생 문제”가 창궐하고 있다.6 이스라엘군 퇴역 소장이자 이스라엘국가안보회의 의장을 지냈던 지오라 아일랜드는 기뻐하며 “가자 남부에 심각한 전염병이 돌면 우리는 승리에 한 발짝 가까워지고 전사자 수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7

가자 지구는 2007년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봉쇄로 이미 서서히 교살당하고 있었다. 이제 이스라엘군은 10월 7일 이스라엘인 약 1200명을 사망케 한 하마스의 공격을 응징하려고 팔레스타인인들을 공동처벌 하고 있다. 목표는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모두 내쫓아 버리는 것인 듯하다. 이스라엘 전쟁 내각의 일원인 아비 디흐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가자판 나크바를 벌이고 있다. …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8 아랍어로 “재앙”을 뜻하는 ‘나크바’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 수반된 어마어마한 규모의 팔레스타인인 인종 청소를 일컫는 말이다. 이스라엘 공식 역사는 이 원조 ‘나크바’를 은폐‍·‍부인해 왔지만, 이스라엘 정치 지도자들은 이번 “가자 나크바”를 공공연히 찬양하고 있다.9

물론 이스라엘은 프로파간다를 적극 펴고 있지만, 그에 대한 호응은 시들하다. 이스라엘 대변자의 한 명인 에일론 레비는 BBC 프로그램 ‘투데이’에서 일련의 특별 인터뷰를 했다. 레비는 가자 지구에서 쌓이는 시신들에 대한 공격적인 질문을 받자 그 사상자 수치가 거짓이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어찌 됐건 이스라엘군이 하마스 공격에 “비례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마스가 아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통치하는 서안 지구에서 최근 몇 주 사이에 수백 명이 살해된 것에 관한 질문을 받자 레비는 답변을 거부했다.10 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군뿐 아니라,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나크바를 실행하려는 무장한 이스라엘인 정착자들의 공격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의 하마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저녁 시간에, 무장한 유대인 정착자들이 점령지 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인 마을 와디 알시크를 습격했다. … 정착자들은 팔레스타인인 남성 셋을 가족들 사이에서 끌어내 옷을 벗겨 속옷 바람으로 만들고 윗도리로 눈을 가린 후 번갈아 구타했다.

염소를 치는 58세 베두인족 노인 아부 하산이 자비를 호소하며 최근 심장 수술로 남은 흉터를 보여 주자 한 이스라엘인 정착자가 그 노인의 가슴을 개머리판으로 찍었다. 그런 뒤 정착자들은 하산에게 오줌을 갈겼다. 하산은 정착자들이 이렇게 소리친 것을 기억했다. “꺼져! 요르단으로든 어디로든 가 버려! 안 그러면 죽여 버릴 테니까.”11

여기서 이스라엘이 말하는 “비례성”은 매우 기이한 개념이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를 상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여 왔다. 2008~2009년 이스라엘의 폭격과 침공은 약 1400명의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를 냈다.12 2012년 제2차 폭격은 174명의 사망자를 냈다. 두 공격보다 훨씬 유혈 낭자했던 2014년 제3차 공격은 공중 폭격과 지상군 침공으로 2250명을 죽였다. 팔레스타인인들도 죽음을 슬퍼하고, 정의와 복수를 바랄 권리,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 이스라엘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비례성” 원리에 따르면, 정당하게 복수할 권리는 오직 식민 점령자에게만 있다.

언제나 그렇듯 그런 논리의 귀결로서, 팔레스타인인들은 그저 살해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애도하고 동정할 가치가 없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된다. 식민 점령자의 인종차별적 언어는 이스라엘 정치인과 유명인, 군인들에 의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나는 가자지구의 완전한 봉쇄를 명령했다. 전기, 음식, 연료, 모든 것을 끊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 짐승들과 싸우는 중이니 그에 걸맞게 대응해야 한다.
─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

가자지구를 완전히 지워 버려라.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마라.
─ 에얄 골란, 이스라엘 유명 가수

가자 지구를 완전히 밀어버리자고들 하는데 …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한 명 한 명 포획해서 고문해야 한다. 손톱을 뽑고 산 채로 가죽을 벗겨야 한다. 비명 소리를 즐길 수 있도록 혀는 마지막까지 남겨둬야 한다. 귀도 남겨둬서 자기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고, 눈도 남겨둬서 우리의 미소를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 치피 나본, 이스라엘 총리 부인 보좌관

가자지구에는 민간인이 없다. 250만 명의 테러리스트만이 있을 뿐이다.
─ 엘리야후 요시안, 전직 이스라엘군 정보장교

가자 북부는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 모든 것을 날려 버리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 일이 다 끝나면 가자 땅을 군인과 구시 카티프에 살았던 정착자들에게 넘겨줄 것이다[구시 카티프는 가자 남부에 있었던 이스라엘인 정착촌이다 – 추나라].
─ 아미하이 엘리야후, 이스라엘 문화유산부 장관

우리는 빛의 민족이고, 저들은 어둠의 민족이다.
─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13

인간 짐승들은 그에 걸맞게 대해줘야 한다. 전기도 끊고, 물도 끊을 것이다. 파괴만이 있을 것이다. 지옥을 원하니 지옥을 줄 것이다.
─ 가산 알리안, 이스라엘군 소속 영토 내 정부 활동 조정관장14

이렇게 팔레스타인인들의 인간성을 박탈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지지를 받는다. 이스라엘민주주의연구소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에 유의하며 공격해야 한다고 보는지를 묻는 설문 조사를 했다. 유대계 이스라엘인 응답자 5분의 4가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15

식민 정착자 국가

현재 이스라엘은 식민 정착자 국가라고 불린다. “비정착 식민주의”가 “군사력, 식민 정부, 현지 지배계급의 협조”를 기반으로 식민지를 지배하는 것이라면, 정착자 식민주의는 식민지를 아예 자신들의 본국으로 전환시킬 의도를 가진 외부인들이 정착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수반한다.16 이데올로기 면에서 정착자 식민주의는 원주민을 상대로 강탈과 추방을 지속하는 것이 공통으로 득이 되는 식으로 해서 식민 정착자들을 그들의 국가에 결속시킨다.

정착자 식민주의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예컨대 오늘날의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을 건국한 유형이 있다. 이 경우에는 토착 원주민이 거의 절멸되다시피 했다. 유럽 정착자들이 오기 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원래 토착 원주민 77~11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1788년 이후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 땅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그 대륙을 “무주지terra nullius(‘아무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땅’이라는 뜻으로, 이는 원주민에 대한 강탈을 정당화하려는 속내가 빤히 보이는 법률적 장치였다)”로 취급했다. 식민지 확장은 몇 세기에 걸쳐 지속됐고, 토착 원주민의 맹렬한 저항에 자주 부딪혔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유럽에서 건너온 전염병에 유럽인들의 폭력이 겹쳐서 토착 원주민 인구가 감소했다.17 살아남은 사람들은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인구의 3퍼센트가 조금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토착 원주민으로 여긴다),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에 강제로 편입됐고, 백인 정착자 사회로 여겨지는 그 나라에서 소수 인종으로 천대받았다. 북아메리카에서 유럽인들의 정착 과정은 이와 달랐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했다. 북아메리카의 경우, 토착 원주민들은 이러저러한 시점에 경제적 착취를 당했지만, 그들의 노동은 그곳에서 등장한 자본주의 경제가 작동하는 데서 중심적 구실을 하지 않았다.

정착자 식민 지배의 또 다른 유형은 남아프리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온 식민 정착자들이 자신의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투쟁했고, 토착 원주민들의 저항은 물론 서로와도 충돌했다. 그러다 마침내 1910년 남아프리카연방[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신]이 수립됐고 이는 흑인을 토지 소유에서 배제하고 흑인의 이동과 노동을 규제하기 위한 인종차별적 법 체계의 수립을 가속화했다. 1913년 원주민토지법은 인구의 다수인 흑인에게 전체 토지의 13퍼센트에 대한 소유만을 허용했고, 이 때문에 흑인들은 생계를 위해 백인 소유의 광산‍·‍농장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이후 도시에 산업이 성장해 대규모 흑인 노동계급이 형성됐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식민지 해방 운동이 아프리카 전역에 퍼지자 집권 국민당은 인종 분리를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로 공식화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도입한 것은 백인 농업‍·‍상업 자본가들의 정당이었지만, 백인 노동계급도 이를 지지했다. 그들도 흑인 배제에 기초한 상대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북아메리카와 달리 남아프리카에서는 흑인이 여전히 전체 인구의 약 80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수였다. 흑인 노동자들은 경제에서 중심적 구실을 했고, 흑인 노동계급의 투쟁은 소수 백인의 지배에 맞선 거듭된 대중 저항의 기반이 됐다.18

이스라엘은 독특한 형태의 정착자 식민주의로, 앞에서 살펴본 두 유형 모두의 요소를 결합한 것이다. 한편으로, 이스라엘 건국의 동력이 된 시온주의 운동은 팔레스타인인을 몰아낸 유대인만의 배타적 국민 경제를 추구한다. 그 결과 인종 학살을 추구하는 흐름이 이스라엘 정치를 이루는 한 줄기가 됐고, 그 흐름은 (롭 퍼거슨이 이번 호 논문에서 묘사하듯) 최근 몇 년 사이 이스라엘의 정치를 주도하게 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1948년 이후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끈질기게 계속 남아 있었고 저항도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안뿐 아니라 국경 바로 바깥의 난민촌에는 훨씬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러고 있었다. 이 문제는 이스라엘 건국 이래로 줄곧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다. 이 모순은 1967년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점령하면서 더 심화됐다. 그 지역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스라엘의 통제하에 두면서도 그들에게 이스라엘 정치에 대한 발언권을 주지 않으려면 결국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필요했다. 오늘날 이 인종차별적 지배 체제는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 전체에 뻗어 있어서, 서안‍·‍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 450만 명과 1967년 이전의 이스라엘 국경 안에 사는 팔레스타인인 190만 명 모두를 상대로 작동하고 있다.19 후자의 집단에 관해 말하자면, 이스라엘 의회가 2018년에 통과시킨 민족국가법은 비유대계 시민으로서 천대받는 사람들의 지위를 그저 법률로 명문화한 것에 불과했다.20

팔레스타인인들을 말살하려는 욕구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에 그들을 종속시키려는 욕구 사이의 긴장은 이스라엘의 정치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 둘 모두에 갖는 함의가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의 남아공 흑인 노동자들과 달리 팔레스타인인 대중은 이스라엘 경제에서 중심적 구실을 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런 구실에서 오는 잠재적인 계급적 힘이 없다.21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이 보여줬듯이 이스라엘에 타격을 줄 수 있지만, 정교하고 값비싼 군사 장비를 갖고 있고 국민 대다수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이스라엘 국가를 타도하지는 못한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 예컨대 허가증을 받고 이스라엘로 일하러 오는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의존도는 지난 몇 년 간 매우 미미했다 — ‘나크바’를 완수할 가능성이 이스라엘 정치 내에 상존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토대 위에서 지난 10월 이스라엘 정보부가 가자 주민 전체를 이집트 시나이 반도로 “이주”시키겠다는 명백한 인종 학살 의도를 담은 “개요 문서”를 작성한 것이다.22

시온주의와 제국주의

이런 틀로 이스라엘을 보면, 이스라엘이 제국주의 질서라는 더 큰 맥락 속에서 하는 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시온주의는 1880년대 후반에 유대인 혐오에 대한 유대인들의 여러 대응의 하나로 등장했다. 당시 유대인 혐오는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로 굳어지고 있었고 그 과정은 결국 나치의 홀로코스트라는 야만을 낳았다.23 20세기 초 시온주의는 유대인들의 정치적 지지를 놓고 다른 이데올로기들과 경쟁했다. 그중에는 마르크스주의도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에서 유대인 활동가들은 중요한 구실을 했으며, 마르크스주의는 유대인 해방을 노동계급 자력 해방이라는 더 큰 과업의 일부로 보는 포괄적인 비전을 제시했다.24 반면 시온주의는 유대인 혐오에 대한 비관적인 대응이었다. 시온주의는 유대인 혐오를 없앨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유대인들이 유럽을 떠나 자신들만의 조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온주의 활동가이자 시온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테오도어 헤르츨을 비롯한 시온주의의 중심 인물들은 얼마간의 논쟁 후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조국을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팔레스타인을 고른 덕분에 시온주의 운동은 유대교 경전의 신화를 이용해 대부분의 그 운동 지도자들보다 훨씬 종교적이었던 시온주의자들의 지지를 모을 수 있었다. 식민지 구축에 초점을 맞춘 헤르츨과 그의 동료 사상가들은 그 땅을 자신들에게 선사해 줄 수 있는 지배적인 제국주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동맹 세력을 찾으려 애썼다. 처음부터 시온주의는 자신들이 구축할 식민지가 “아시아에 대항하는 유럽의 장벽의 일부이자 야만주의에 대항하는 문명의 전초기지”가 돼야 한다고 봤다.26

헤르츨은 오스만 제국과 독일 제국의 지배자들에게 구애하다가 영국으로 눈을 돌렸다.27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제1차세계대전에서 영국의 경쟁자들이 패배하면서 영국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할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중동 정책을 두고 논쟁이 있었고, 몇몇 정치인들은 아랍 엘리트 일부와 동맹 맺기를 선호했지만, 그 지역에 영국에 우호적인 정착자 집단을 육성하는 방안은 분명 매력이 있었다. 이러한 견해를 널리 알린 것이 1917년 당시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의 역사적 선언이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28 초대 예루살렘 총독 로널드 스토스는 영국 제국이 시온주의에 갖는 이해관계를 적나라하게 설명했다. 스토스에 따르면, 시온주의 식민지는 “적대적인 아랍 세계라는 바다 한복판에서 영국에 충성하는 유대인들로 이뤄진 작은 ‘얼스터’[아일랜드 독립 투쟁 이후 영국이 아일랜드에 대한 전략적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만들어 낸 지역 – 역자]”가 될 것이었다.29

1917~1947년 사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그곳 인구의 10퍼센트 미만에서 30퍼센트로 늘었다. 그 증가세는 유럽에서 파시즘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가속됐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 토지를 매입하고 저렴한 팔레스타인 노동력으로 환금 작물을 재배하는 초기 실험이 막을 내리고, 인종에 기반한 배타적 유대인 경제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이를 대신했다. 키부츠 운동, 히스타드루트 ‘노동조합’, 하가나 등의 초기 시온주의 민병대 조직과 같은 “노동 시온주의” 단체들이 이를 관철시키는 데서 중심적 구실을 했다.30 히스타드루트는 통상적인 노동조합이 전혀 아니었다. 히스타드루트와 그 연관 조직들은 이후 건국될 이스라엘 국가의 기초를 상당 부분 마련했다. 이스라엘 역대 총리 중 세 명이 히스타드루트 지도자였다.31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영국 지배자들뿐 아니라 유대인 정착자들과도 맞서 싸우게 됐다. 이런 상황은 영국 식민 점령 당국에 유용한 면이 있었다.32 한편으로는 시온주의를 계속 지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랍 사회의 가장 반동적 부위와 손잡고 식민주의에 대한 반감을 유대인들에게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36년 팔레스타인인들이 항쟁을 일으켰다. 총파업이 6개월 동안 이어지고 정착자들과 영국에 맞선 대중적 비협조 운동이 벌어졌지만, 이 항쟁은 잔혹한 탄압으로 분쇄됐다. 농촌 마을과 도시의 주거 지구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재판 없이 구금하는 등 당시 탄압에 사용된 공동처벌 등의 수법들은 훗날 이스라엘군이 따라하게 된다. 팔레스타인 항쟁 지도부는 1936년 가을에 항복했지만, 이후 게릴라 투쟁 물결이 이어졌고 이에 대응해 더 많은 마을이 파괴되고 즉결 처형, 공중 폭격이 자행됐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항쟁은 배타적 유대인 정착자 경제에 커다란 추진력을 줬고, 영국 식민 당국이 시온주의 민병대의 일부를 자기 보안 기구에 편입시키는 계기가 됐다. 예컨대 시온주의자들과 영국의 공동 순찰대인 “야간특수부대”가 창설돼 팔레스타인인 게릴라를 공격하고 요충지에서 경계 근무를 섰다.33 이는 다가올 일을 준비하는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공격할 계획은 이미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마을 조사(1936년 항쟁 참가 수준에 따라 마을의 “적성도”를 파악하는 작업)는 1930년대 말에 거의 완료됐다.34 1920년대부터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였고 훗날 이스라엘 초대 총리가 되는 다비드 벤구리온은 1937년 자기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아랍인들은 떠나야 한다. 그러려면 전쟁과 같은 적절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35

나크바

제2차세계대전 무렵 정착자들은 영국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통해 유대인만으로 이뤄진 거의 배타적인 경제를 구축하고, 효율적이고 잘 무장된 군사 조직(훗날 이스라엘군이 된다)을 갖추고, 미래 국가의 토대를 마련했다.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해 1946년에 설립된 ‘유럽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영미 조사 위원회’의 영국 측 위원 한 명은 당시 시온주의 활동을 총괄하던 조직인 ‘유대인 기구’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 기구는 실제로는 국가 안의 국가이며 자체의 예산과 비밀 내각, 군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보 기관을 갖고 있다. 지금껏 내가 봤던 조직 중 가장 효율적이고, 역동적이고, 강인한 조직이며 그들은 우리[영국 ― 필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36

그 시점이면 영국은 기력을 소진한 제국주의 국가가 됐고 자신의 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갈수록 잃고 있었다.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의 퇴출을 앞당기고, 1936년 반란의 분쇄로 지도부가 치명적으로 약화된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내서 자신들의 새 국가를 건설할 기회를 포착했다.37 1946년 6월 하가나 민병대에서 분열해 나온 더 과격한 이르군 민병대가 예루살렘의 킹데이비드 호텔을 폭파시켜 91명이 숨졌는데, 사망자들 중에는 그 호텔을 본부로 사용하던 영국 식민 정부 구성원들도 있었다. 영국의 지배력이 취약해졌음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이듬해 2월 영국은 철수를 결정했고 당시 막 창설된 유엔이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그 일을 맡은 유엔이 제시한 분할안은 유대인 정착자들(이제 인구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하고 경작지의 5.8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었다)에게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절반 남짓을 넘겨 주는 것이었다.38

당연하게도 아랍 세계 전체가 이런 분할안에 반대했고,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국경이 “분할 결의안이 아닌 힘으로 결정될 것”이라고 천명했다.39 이 대결은 대등한 세력 간의 대결일 수 없었다. 촉박하게 소집된 팔레스타인 전사들은 대체로 훈련도, 무기도 빈약한 데다 수천 명에 불과했다. 나중에는 이웃 아랍 국가들이 약 1만 5000명의 병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하가나 혼자만 해도 이들을 수적으로 능가했고, 대부분의 하가나 대원들은 무장을 잘 갖춘 데다 제2차세계대전 개전 전과 그 전쟁 동안 영국군에게서 훈련을 받았다. 막 창설된 이스라엘군이 1948년 12월 동원한 병력은 9만 6441명이었다.40

이런 상황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져온 결과를 다룬 가장 방대한 연구는 이스라엘 역사가 일란 파페가 쓴 《팔레스타인 비극사》다. 그의 연구는 팔레스타인 역사가들이 나크바의 증거를 발굴하려고 기울인 갖은 노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41 시온주의자들의 공격으로 아랍 마을들은 지도에서 통째로 사라졌다. 하가나의 정보 부대가 수립한 계획에 따르면,

이 작전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다. 하나는 마을을 파괴하고(불을 지르거나, 폭파하거나, 잔해 사이에 지뢰를 심는 방식으로) 특히 상시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인구 중심지를 파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밀 수색 후 장악하는 작전을 펴는 것이다. … 저항이 있으면 해당 무장 세력은 반드시 섬멸하고 그 주민들은 국경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42

데이르야신 학살이 이것의 사례였다. 원래 이 마을은 하가나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태였고, 그래서 더 극단적인 이르군과 레히 민병대가 투입됐다.43 그들은 마을에 진입하면서 가옥들을 향해 기관총을 쏴서 많은 주민을 살해했다. 이후 시온주의자들은 생존자들을 한데 모았다. 마을 주민들은 “냉혹하게 살해됐고 그 시신도 수모를 당했으며, 많은 여성이 강간당한 후 살해됐다.” 당시 12살 소년이었던 파힘 자이단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들은 우리를 한 명씩 불러내다가 한 노인을 쏴 죽였다. 그의 딸들 중 한 명이 오열하자 그녀도 쏴 죽였다. 그러더니 내 형제인 무함마드를 불러내서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를 쏴 죽였다. 내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며 무함마드를 안으려 하자 (어머니는 수유 중이던 내 여동생 훈드라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들은 내 어머니도 쏴 죽였다.

자이단은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줄을 서 있었는데, 군인들은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도 총을 난사했다. 자이단은 부상을 이겨내고 간신히 살아남았다.44 또 다른 학살이 벌어진 아랍 마을 탄투라에서는 10~50세 사이 남성들을 한데 모은 뒤, 얼굴을 가린 정보원을 대동한 정보 장교가 사전에 작성한 명단을 가지고 잠재적 반항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색출했다. 이렇게 선별된 이들은 “소수 인원으로 나뉘어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여기서 “잠재적 반항자”는 많은 경우 1936년 항쟁에 가담한 이들을 뜻했다.45

“경비견” 국가

이스라엘은 이런 잔혹 행위와 그 행위를 통해 심고자 한 공포로 건국됐다. 팔레스타인인 약 75만 명이 살던 곳에서 쫓겨났는데 그중 일부는 요르단이 통제하는 서안 지구로, 또 다른 일부는 이집트가 통제하는 가자 지구에 자리잡았다. 이제 이스라엘은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4분의 3 이상을 장악했다.

이스라엘은 존립을 위해 이내 새로운 제국주의 후견인에 구애하기 시작했다. 바로 미국이었다. 처음에 미국의 정책은 영국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모호했다. 미국의 핵심 관심사는 세계 최대의 매장량이 확인된 중동의 석유를 지배하고,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1951년 이란에서 급진적 정권이 등장해서 이란 석유를 국유화했을 때, 이는 중동에 잔존하는 영국의 영향력을 주되게 위협했고 영국-이란 석유회사가 추방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미국의 이익이 위협받을 가능성을 보여 주기도 했다. 1951년 이스라엘 신문 〈하아레츠〉는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서방은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곳의 봉건적 정권들은 민족주의 운동에 너무나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는데, 그 민족주의 운동들은 때때로 사회주의적, 좌파적 색채를 두드러지게 보였다. … 그런 만큼 이스라엘을 강화시키는 것은 서방 열강이 중동의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스라엘은 경비견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미국과 영국의 바람을 거스르면서 아랍 국가들을 적대하는 정책을 펼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필요는 없다. 반면, 어떤 이유에서든 서방 열강이 모르는 체하기를 선호하는 때가 오면, 이스라엘은 정도를 넘어선 결례를 서방에 범한 이웃 국가들을 응징하는 일을 듬직하게 맡을 수 있다.46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집트에서 권력을 장악한 사건은 미국의 이익이 처할 수 있는 위험을 더 분명히 보여 줬다. 그러나 미국이 이스라엘을 대대적으로 경제적‍·‍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인근 아랍 국가들(이집트도 그중 하나였다)에 수모를 안기고 나서부터였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이스라엘의 이익이나 미국의 이익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다고 여겨질 때마다 급증했다.47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은 일각의 주장과 달리 “유대인 로비”의 결과가 아니라 여기서 설명한 것처럼 그것이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

1936년 항쟁에 대한 탄압과 1948년 나크바 직후 팔레스타인인들의 대對 이스라엘 투쟁 역량은 잠시 약화됐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1964년 아랍연맹의 주도로 설립됐지만, 새로운 팔레스타인인 지도부가 등장한 것은 1967년 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이 패배하고 나서부터였다. 장차 PLO를 주름잡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조직 파타는 1959년에 결성됐다. 파타의 가장 저명한 인물인 야세르 아라파트는 그 창립자들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이었다. 그는 유복한 재외 팔레스타인인 가족의 일원으로 카이로에서 대학을 나오고 쿠웨이트에서 건설 도급업으로 거금을 벌었다.

파타는 1967년에 PLO에 합류했다. 1년 후 파타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 일련의 게릴라 공격을 이끌며 팔레스타인인들의 긍지를 되찾았고, 이에 매력을 느낀 많은 청년 난민들이 파타의 대원이 됐다. 파타가 부상하면서 PLO는 1세대 지도부 때와 달라졌다. 나세르가 선별한 자들로 이뤄진 1세대 지도부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의 선결 조건으로서 아랍의 단결에 주력했다. 파타는 그런 접근에 대한 거부를 표방하며 아랍 지배자들에 그저 의존하기만 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투쟁을 일으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파타는 아랍 정권들에 대한 의존에서 완전하게 벗어난 적이 결코 없었다. 아랍 국가들의 수도에 본부를 두고 팔레스타인인 난민촌에서 생활을 조직하고, 유엔에서 옵서버 자격을 획득한 PLO는 저항을 표현하는 것과 “예비 아랍 국가”로서 처신하는 것 사이의 긴장을 헤쳐나가야 했다. 이는 서로 연관된 두 가지 문제를 낳았다.

첫째, 기존 아랍 국가들이 ― 더 급진적인 민족주의 형태인 경우에도 ―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였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나세르주의가 단적인 사례다.48 나세르는 민족주의 장교들과 함께 친영 왕정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았다. 1948년 이집트 왕정이 팔레스타인에 지리멸렬하게 개입하면서 자아낸 염증이 한 계기가 됐다. 왕정이 타도되자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격렬한 투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오로지 그 운동의 지도자들이 머뭇거린 덕분에 나세르의 자유장교단이 사태를 주도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자유장교단은 왕정을 끝장냈을 뿐 아니라 그 뒤 수년 동안 파업을 진압하고, 야당인 공산당을 탄압하고, 구 왕정에 맞서던 다른 세력들, 특히 주요 이슬람주의 단체인 무슬림형제단과 충돌했다. 처음에 새 정권의 급진성은 토지 개혁 실시와, 이집트를 냉전의 양대 열강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드려는 나세르의 시도에 한정돼 있었다. 1956년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라엘의 지원 아래 수에즈 운하 장악을 기도하자 비로소 나세르는 어쩔 수 없이 이집트 좌파에게 지지를 구했다. 침공에 맞서려면 대중적 저항을 구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의 여파 속에서 국가자본주의적 경제 개입과 사회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야심찬 강령이 대중에게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로부터 국가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려는 시도였다. 민족주의 프로젝트로서 그 시도는 계급들의 “평화 공존”을 설파했다. 그러나 계급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나세르주의의 핵심 사회 기반은 옛 봉건 질서의 권력 구조에서 배제당하고 대자본과 연계된 권력 구조에서도 배제당하던 중간계급 일부였다. 이들은 그런 권력 구조들에 맞서 싸울 의사가 있었지만 노동자들이 운동의 주체가 돼 자본주의 너머로까지 나아가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독립적인 투쟁이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탄압도 서슴지 않으려 했다.49 그러나 모자라는 자원으로 국제 질서 속에서 입지를 확보하려는 이집트 국가의 국가 발전 노선은 금세 한계에 부딪혔다. 1970년대부터 나세르의 계승자 안와르 사다트는 이집트를 세계경제에 개방하면서 “인피타”(개방)로 알려진 경제 자유화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고,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던 자들은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혜택을 봤다.

아라파트를 중심으로 한 파타 지도자 세대는 자신들의 뜻대로 팔레스타인을 독립시키려면 이런 아랍 정권들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고 봤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아랍 정권들을 움직일 지렛대”로 이용한다는 전략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50 이 점이 둘째 문제를 발생시켰다. 파타는 기성 아랍 국가들을 압박해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에 따라 “불간섭” 노선을 추구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활동하는 나라들의 통치에 차질을 주는 행위를 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그 노선은 그런 사회에 걸린 부유한 소수 팔레스타인인들의 이해관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했다.51

이와 다른 대안이 가능했다. 중동 전역, 특히 이집트 등지에서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깨워서, 중동 전역에 새 질서를 수립할 혁명적 과정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타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계급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슬로로 가는 길

파타의 접근법에 내재한 모순들은 파타와 PLO를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아랍 정권들은 하나둘씩 제국주의 질서에 타협하고 그 질서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였다. 1977년 사다트는 예루살렘을 방문해 평화 협정을 제안했다. 이듬해 체결된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집트는 최초로 이스라엘을 인정한 아랍 국가가 됐다. 그 협정은 이집트가 미국과 가까운 관계를 맺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도움이 됐다. 가자 지구 남부 국경을 통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집트로, 이집트는 오랫동안 가자 지구 봉쇄에 참여해 왔다. 요르단은 1994년 이스라엘을 인정했고, 아랍에미리트연합‍·‍바레인‍·‍모로코는 2020년 이스라엘을 인정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 정부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대사 교환을 논의하던 중에 하마스가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PLO는 거듭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정착하고 있던 아랍 국가들의 정권들에게도 공격받았다. 1970~1971년 PLO 지도부는 요르단의 대규모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자신의 통치를 위협한다고 여긴 국왕 후세인의 군대와 충돌한 뒤 요르단에서 쫓겨났다. PLO는 레바논에 새로 자리를 잡았지만 1975년 레바논의 기독교 우익과 좌파 세력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에 휘말렸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좌파와 연대하면 레바논이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한 인접국 시리아의 정권은 병력을 투입해 레바논군을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PLO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를 침공해서 베이루트를 봉쇄했다. 팔레스타인인 전사들은 두 달 동안 버티다가 바다를 통해 탈출해야 했다. 어떤 아랍 국가들도 실질적으로 그들을 지원하지 않았다.52

이런 탄압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꺾지 못했고, 저항의 초점을 역사적 팔레스타인 내부로 옮겨 놓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이 변화를 보여 준 것이 제1차 인티파다의 분출이었다. 제1차 인티파다는 1987년 12월에 시작된 자발적인 대중 항쟁으로, 가자 지구 자발리아 난민촌에서 이스라엘 군차량이 팔레스타인인 4명을 치어 죽인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53 제1차 인타파다는 6년간 이어졌고 이스라엘군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1988년 1월 국방장관 이츠하크 라빈[이스라엘 노동당 지지자 – 역자]은 보안군에게 “무력, 위력, 폭력”을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철권” 정책에 따라 시위 참가자들의 팔과 다리를 부러뜨리고 두개골을 깨뜨리는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됐다.54

제1차 인티파다 동안 팔레스타인인 약 1376명이 목숨을 잃었다.55

그러나 팔레스타인 점령지[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서안 지구와 가지 지구, 동예루살렘 — 역자]에서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이 이스라엘군 탱크에 돌을 던지는 와중에도 파타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라는 허상, 즉 “두 국가 방안”에 기초한 평화 프로세스에 몰두하고 있었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오슬로 평화 협상의 결과로 일단의 평화 협정이 체결됐다. 1993년 9월 백악관 잔디밭에서 라빈(이제 이스라엘 총리가 됐다)과 아라파트가 그 협정들에 서명을 했다. PLO는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일방적 휴전을 선언했다. 그 보상으로, 팔레스타인 점령지를 관할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세워졌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진정한 팔레스타인 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 기구의 주요 기능 하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단속하는 것이다.56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또 다른 주요 기능은 팔레스타인 점령지를 이스라엘 경제에 종속된 일부, 즉 이스라엘 상품 판매처와 저렴한 산업 예비군 공급지로서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 출입을 계속 통제하고, 아무런 처벌 없이 팔레스타인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서안 지구에서 신규 정착촌 건설이 오슬로 협정 이후 더욱 가속돼 1992~2000년 사이에 정착촌 인구가 갑절이 됐다. 이 무장한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지는 영토의 연속성을 일절 불가능하게 만들며, 이스라엘의 권력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투사하는 수단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립은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의 계급 갈등을 드러내기도 했다. 많은 경우 걸프 연안 국가들에서 부를 쌓은 유력 재외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하의 경제에서 기득권층으로 자리잡았다. 건설 부문 등에서 신용에 기초한 호황이 일자 소수는 사치스러운 소비를 즐길 수 있게 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는 극심한 부패가 들끓었다. 반면, 대부분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더 경제적으로 배제됐다.57 최근의 한 연구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팔레스타인인 정치 엘리트와 재계/자본가 엘리트의 관계는 언제나 긴밀했다. 실제로 PLO는 재외 팔레스타인인 자본가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오슬로 프로세스는 정치권과 재계의 이런 관계망을 견고한 동맹으로 만들어 PLO/파타의 상층부와 귀국 자본가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전문관료와 보안기구 지도자들을 한통속으로 만들었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권력의 정치적‍·‍경제적 중심부를 지배하는 데 있었다. 2007년 이후 팔레스타인 자본가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 정책 결정자 서클 안에서 전례 없는 영향력을 발휘했고… 이스라엘 자본가들과도 특권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 자본가들의 권력이 부상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계급 분단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첨예해졌다.58

오슬로 프로세스의 실패에 대한 분노에 힘입어 2000년 9월 제2차 인티파다가 분출했다. 그 계기는 샤론이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의 하나다)를 방문한 것이었다. 제2차 인티파다는 제1차 인티파다보다도 더 유혈 낭자했다. 8년의 투쟁 동안 팔레스타인인 4916명이 이스라엘군과 정착자들에게 살해당했다.59

하마스의 부상

파타의 민족주의적 저항이 실패한 결과 이슬람주의적 대안인 하마스가 성장할 기회를 얻었다.60 하마스는 제1차 인티파다가 분출하고 며칠 뒤에 창설됐지만, 그 조직의 기원은 1970년대에 가자 지구에서 결성된 이슬람주의 복지 제공 조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조직은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을 본보기로 삼았다. 이 조직들은 처음에 이스라엘의 일정한 지원을 받았는데, 이스라엘이 이들을 파타 등의 세력을 견제할 균형추로 여겼기 때문이다.61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과 연계가 있는 더 광범한 초국가적 이슬람주의 운동의 일부를 표방하면서도, 민족주의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포함하고 있는 독자적 팔레스타인 세력을 표방하기도 한다. PLO 지도자들이 제1차 인티파다를 기회 삼아 (서안 지구,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으로 이뤄진) 허울뿐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받아들이려는 의사를 표현한 반면,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지하드는 의무”라고 선포했다.62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나름의 비대칭 전쟁을 벌였다. 예컨대 팔레스타인 점령지 바깥에서 자살 폭탄 공격을 벌이기도 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군사적 충돌을 벌였는데, 여러 면에서 이는 한때 파타와 PLO의 다른 단체들이 대표했던 게릴라 투쟁의 전통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군사적으로 대항할 의지를 천명하고 자체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자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통해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마스에 대한 지지는 2005년 샤론이 가자 지구에서 일방적 철수를 발표하면서 더 커졌다. 샤론은 그 철수를 통해 가자 지구 정착촌을 지키던 이스라엘군의 부담을 줄이고 서안 지구로 더 깊숙이 침투하는 데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려 했다. 이런 행보는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정치에 더 많이 관여하는 것과 때를 같이했다. 그 전까지 하마스는 학생회와 직능인 선거에 후보를 출마시켰지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선거와는 거리를 뒀다. 이는 오슬로 협정을 인정하지 않는 노선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가자 지구에서 투표율이 높게 나오는 것을 보며 하마스는 자신의 지지자들도 많은 수가 선거에 참여하고 있다고 판단했다.63 2005년부터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변화와 개혁”이라는 기치로 선거에 도전해서, 파타의 부패와 파타의 대對이스라엘 협조를 비판했다.

2006년 총선에서 하마스는 132석 중 76석을 획득해 겨우 43석을 얻은 파타를 가뿐히 제쳤다.64 하마스는 선거 승리를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 운동을 쇄신하고 오슬로 협정의 논리와 단절할 기회로 여겼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과 미국, 유럽연합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의 맹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하마스가 비폭력 노선을 약속하고, 기존 합의를 지지하고,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으면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자치정부에 대한 재정 지원을 끊겠다고 위협했다. 압바스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보안군들을 대통령 직속 기구로 전환하며 쿠데타를 준비했다. 미국은 동맹국인 요르단과 이집트를 압박해 파타 전사들을 훈련시키게 했고 이집트는 가자 지구 안으로 무기를 들여보냈다. 이내 하마스 지지자들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자치정부를 통해 지원되던 자금도 끊겼다. 이 자금은 텅 빈 껍데기 같은 가자 지구 경제에서 전체 임금의 37퍼센트를 지급하던 원천이었는데 말이다.65 하마스는 가자 지구를 장악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2007년 6월 무렵 하마스는 가자 지구 전역을 장악했고, 그때부터 하마스는 사실상 그곳의 정부 구실을 해 왔다.66 압바스는 오늘날 선거가 다시 치러지면 패배할 것이 확실하지만, 여전히 서안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장악한 채 전국 선거를 무기한 연기하고 있다.67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에 의해 오랜 기간 봉쇄됐고,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2002~2018년 동안 가자 지구에서 외부의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주민의 비율은 10퍼센트에서 80퍼센트로 늘었다. 이번 공격 전에도 가자 지구 주민 62퍼센트가 식량을 안정적으로 구하지 못했고, 53퍼센트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2018년 청년 실업률은 무려 70퍼센트에 달했다.68

가자 지구에서는 이스라엘군의 거듭된 공격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정신적 내상을 입었다. 특히 어린이들이 그렇다. 2014년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 직후 6~15세 아동 1850명을 대상으로 한 한 연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다수의 어린이가 폭격과 거주지 파괴를 경험하거나(83.51퍼센트), 집에만 머무르며 밖에 나가지 못하거나(72.92퍼센트), 모스크가 훼손되고 더럽혀지는 것을 목격하거나(70.38퍼센트), 교전 상황에 노출되거나(66.65퍼센트), 시신을 봤다(59.95퍼센트).”69 지붕 없는 감옥에 내몰려 그곳을 벗어날 기회도 없고 폭격과 봉쇄로 파괴된 경제를 복구할 기회도 누리지 못하는 가자 지구 주민들(약 절반가량이 18세 이하이다)이 그런 경험에서 받을 정신적 타격은 너무나 자명하다.

알아크사 홍수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을 향한 공격은 이스라엘의 권력 중심부를 충격에 빠뜨렸다. 하마스와 또 다른 이슬람주의 단체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에 소속된 약 1500명의 특공대원들이 가자 지구를 에워싼 경비 지대를 돌파했고, 그러자 가자 지구 주민들도 거기에 가세했다. 많은 수는 생애 처음으로 가자 지구 바깥 땅을 밟은 것이었다. 아담 샤츠는 이렇게 썼다.

‘알아크사 홍수’(하마스는 자신의 공격을 이렇게 부른다)의 동기는 딱히 수수께끼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 공격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이 국제 사회의 관심을 잃어간다고 여겨지던 때 그 투쟁의 중요성을 다시 각인시키고, 정치수를 석방시킬 담보물을 확보하고, 이스라엘-사우디 관계 개선을 무산시키고, 무능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더한층 수모를 안기고, 서안 지구 정착자들의 대대적 폭력에 항의하고, 종교적인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관료들이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에 와서 도발하는 것에 항의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인들에게 그들이 결코 무적이 아님을 각인시키고 가자 지구를 이대로 두는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메시지를 주려는 것이다.70

잔혹한 식민 점령은 언제나 폭력적 반발을 배양하기 쉽다. 점령자들과 달리 전투 헬리콥터나 탱크, 전투기와 같은 무기를 갖지 못한 저항 세력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동원한다. 이스라엘군이 딱히 비폭력 시위를 유발했던 것도 아니다. “2018~2019년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국경 지대에서 ‘귀환 대행진’을 벌였을 때 이스라엘군은 시위대 223명을 살해했다.”71 지금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서 벌이는 파괴는 단기적으로 하마스의 공격 능력을 얼마나 약화시키든지 간에 또 다른 팔레스타인인 세대를 필사적인 무장 저항에 나서게 할 것이다.

로니 카스릴스는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맞서 싸운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무장 조직을 창설한 인물인데, 그는 하마스의 공격에 관해 이렇게 썼다.

민간인들에게 벌어진 일은 비극이지만, 우리 남아공 사람들이 잘 알듯이,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을 억압하고도 … 그 냄비가 끓어넘치지 않을 거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계획적으로든 우발적으로든 그런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이 억압자들의 구미에 맞게 신사적으로 감행된다는 보장은 없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역사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바다.72

알제리에 관해서도 비슷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알제리는 1830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인 정착자 식민 지배를 겪었다. 알제리에서는 프랑스가 수많은 알제리인을 학살한 것에 대응해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이 프랑스군과 정착자들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73 샤츠는 하마스의 공격과, 1955년 8월 알제리 항구 도시 필리프빌(오늘날의 스킥다)에서 FLN이 감행한 공격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수류탄과 칼, 몽둥이, 도끼, 쇠스랑으로 무장한 소농들이 123명을 살해했고, 많은 경우 시신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다. 그 대상은 대부분 유럽인이었지만 무슬림도 여럿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이것을 이유 없는 선제 공격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공격에 나섰던 사람들에게 그 공격은 프랑스 군이 정착자 민병대의 도움을 받으며 수많은 무슬림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 … 필리프빌 공격에 대응해 프랑스의 자유주의적 총독 자크 수스텔은 … 탄압 작전으로 알제리인 1만 명 이상을 살해했다. … 수스텔은 FLN의 함정에 빠졌다. 군대의 잔혹 행위는 더 많은 알제리인들을 반란에 가담케 했다. … 수스텔은 자신이 “피의 강물이 흐르는 해자[성 주위를 둘러 판 못 – 역자]”를 파는 데 일조했다고 시인했다. 오늘날 가자에도 비슷한 해자가 만들어지고 있다.74

당시 알제리에 살았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란츠 파농은 FLN을 지지했고, 폭력을 자제하라며 멀찌감치 떨어진 채 훈계하는 자들을 비판했다. 파농에 관한 탁월한 연구에서 리오 질릭은 이렇게 설명한다.

1956년 10월 중순 파농은 [FLN의 공격에 대한 — 추나라] 프랑스의 보복을 목격했다. 빌다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유럽인 정착자 민병대가 남성 20명을 포위하고 사살했다. 파농은 분에 못이겨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이것이 프랑스인들이 하는 짓이네. 그런데도 휴머니스트라는 내 지식인 친구들 몇몇이 나를 그 투쟁에 흠뻑 가담했다는 이유로 비판할 줄이야.”75

질릭이 지적한 파농과 FLN의 한계는 이번 하마스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파농은 알제리 같은 아프리카 나라를 해방시키는 데서 노동계급이 결정적이고 역동적인 구실을 할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파농은 노동계급이 식민 지배 질서에 대체로 통합돼 있다고 봤다.76 이런 회의는 FLN의 기반이 알제리 노동계급 바깥에 있던 것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위로부터의 방식으로 도시 대중을 끌어들이려는 FLN의 시도는 프랑스의 탄압으로 단명했다. 당시 프랑스의 탄압은 질로 폰테코르보의 빼어난 리얼리즘 영화 〈알제리 전투〉에 잘 묘사돼 있다.77

하마스 지식인들의 세계관은 중동 전역의 노동계급을 혁명적 변화를 주도할 잠재력이 있는 세력으로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하마스 지식인들의 열망은 파타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인 자본가와 중간계급 일부의 열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중동 전역의 노동계급을 지향하는 관점이 없다면 하마스도 앞서 PLO가 맞닥뜨렸던 것과 똑같은 난관에 부딪힐 것이다. 이스라엘을 꺾을 마땅한 전략이 없는 가운데 하마스도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도, 정치와 외교라는 익숙하지 않은 영역에 실용적으로 발을 담근다. 오래 전부터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1967년 이전 국경 밖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자신의 목표를 한정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또,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지 철수를 대가로 한 휴전을 거듭 제안해 왔다. 하마스는 때때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다.78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선거에 출마하기 시작하면서 파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종류의 신자유주의를 기꺼이 수용했다.79 집권한 하마스에 대해서 역사가 타레크 바코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마스는 정치적 다양성을 탄압하고 보수적인 사회 질서를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통치 방법을 채택하는 능력을 보였다. 인권 단체들과 소통 창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그런 사례다. 하마스는 살라피주의 운동의 분노를 무릅쓰고 이슬람 율법의 시행을 회피해 왔다. … 하마스 통치의 또 다른 핵심적 요소는 저항을 중심으로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정치와 권위주의의 결합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PLO가 자신의 기구들을 구축한 방법을 고스란히 빼닮았다.80

크리스 하먼이 이슬람주의 운동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에서 강조했듯이 테러리즘과 타협, 권위주의적 통치와 제국주의에 대한 도전, 단일한 이슬람 공동체라는 유토피아적 열망과 계급으로 나뉜 자본주의 체제를 실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서 긴장을 빚고 동요하는 것은 이슬람주의 운동이 자주 보이는 특징이다.81

제국주의 질서 속 팔레스타인

앞서 말했듯, 이런 난관을 돌파하려면 중동, 특히 이집트 같은 나라들에 있는 노동계급의 힘으로 중동 전역을 혁명적으로 재편해야 한다. 이것만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정의로운 결과, 즉 유대인이든 무슬림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교가 없는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고 팔레스타인인 난민들의 돌아올 권리를 온전하게 보장하는 단일하고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를 실현할 가능성이 있다.

앤 알렉산더의 논문[‘Palestine: between permanent war and permanent revolution‘,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81호(2024년 겨울)]은 그런 과정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과 이스라엘군의 잔혹 행위는 이미 중동에서 제국주의적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이 불안정은 제국주의가 겪고 있는 더 광범한 위기의 일부다. 미국 패권의 장기적인 쇠퇴와 중국의 부상은 세계 체제 전반에 무질서를 확산시키고 있다. 서방이 2001년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재앙적인 개입은 그런 추세를 심화시켰다. 이런 맥락 속에서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이란,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의 “아亞 제국주의적 열강”이 저마다 영향력을 키우려 들고 있고, 지난 몇 년 동안 시리아와 예멘에서 보듯 끔찍한 결과를 낳고 있다. 중동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는 중국의 노력은 이 국가들이 미국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할 운신의 폭을 키워 준다. 2023년 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관계 정상화를 중재한 것이 미국이 아닌 중국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82

이스라엘은 최근 몇 년 동안 더 공세적으로 입지를 다지려 드는 이런 아亞 제국주의 국가들의 하나이다. 미국 등 다른 서방 열강과의 관계는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관계들은 긴장이 커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지원은 이스라엘의 역동적인 경제를 창출하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했지만, 오늘날 이스라엘 경제는 이전만큼 외부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이스라엘 국내 정치의 우경화, 미국의 중동 장악력 약화와 결합돼 이스라엘은 더 공세적이고 난폭한 태도로 기울어 왔다.

이스라엘이 1년이나 그보다 오래 작전을 펼 계획이라는 12월 초의 보도들이 조금이라도 사실이라면, 미국은 줄타기를 하는 데에 갈수록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83 조 바이든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계속 확고하게 지지할 것임을 천명해 왔다. 그러나 바이든은 가자 지구에서 자행되는 잔혹 행위가 세계 곳곳에서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이스라엘군의 공격은 중동 전반으로 충돌을 번지게 할 위험이 있다. 잠재적으로는 레바논의 헤즈볼라, 어쩌면 이란까지 전쟁에 끌어들여 미국의 이익을 지키는 데 협조하고 있는 다른 정권들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도 있다.

총리 리시 수낙의 취약한 영국 보수당 정부는 이스라엘의 학살을 서둘러 지지하고 나섰지만, 이에 반발하는 대규모 운동이 벌어졌다. 이 시위들은 역사적인 규모를 자랑했다. 한 번은 80만 명이 런던에서 행진하기도 했다. 이 운동은 11월에 첫 승리를 거두기도 했는데, 내무장관 수엘라 브래버먼을 끌어내린 것이다. 브래버먼은 영국에서 “문화 전쟁”을 심화시키고, 보수당 지도권을 위한 경쟁을 앞두고 기층 당원들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다 브래버먼은 경찰이 극우 활동가들은 가혹하게 대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지 행진은 그에 비해 관대하게 대한다고 불평하는 무리수를 뒀다. 극우 활동가들은 브래버먼의 말을 행동 신호로 이해했고 그 결과 런던 거리에서 경찰과 극우 시위대가 충돌하면서 총리 수낙은 손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브래버먼은 곧바로 해임됐다.

노동당 지도자 키어 스타머는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방식으로 한심하게 굴고 있고, 심지어 가자 지구에서의 휴전을 촉구하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다. 이런 행보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전임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을 유대인 혐오자로 모는 비방 운동을 벌인 것의 연장선 상에 있다. 코빈과 대조적으로 스타머는 자신에게 대외 정책을 맡겨도 된다는 것을 영국 자본가 계급에게 입증하는 데 열심이다.

그 결과 영국 노동당 예비내각 성원들과 지방의회 의원들이 무더기로 사임했다.84 이는 반가운 변화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많은 나라에서 등장하고 있는 대중 운동은 매우 중요하다. 그 운동들은 팔레스타인 연대가 국제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여기에는 젊은 팔레스타인인 활동가들이 2000년대에 기울인 노력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 활동가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구조 바깥에서 활동하며 세계적 BDS(보이콧, 투자철회, 제재) 운동을 건설하는 데 기여했다.85

팔레스타인은 국제주의와 진정한 해방의 전통을 자처하는 모든 좌파의 시금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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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의 초고를 읽고 의견을 준 앤 알렉산더, 리처드 도널리, 찰리 킴버, 필립 마플릿에게 감사를 표한다. 존 로즈가 여러 해 동안 나와 토론해 준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존 로즈에게서 나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이 글의 주장들을 조리 있게 하는 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2. https://twitter.com/EuroMedHR/status/1728506827225137241/photo/1을 보시오.↩︎

  3. BBC, 2023.↩︎

  4. United Nations Office for the Coordination of Humanitarian Affairs, 2023a.↩︎

  5. Duggal, Hussein and Asrar, 2023.↩︎

  6. United Nations Office for the Coordination of Humanitarian Affairs, 2023b.↩︎

  7. Levy, 2023.↩︎

  8. Ruebner, 2023.↩︎

  9. Pappé, 2006, 10장과 11장을 보시오.↩︎

  10. Nicholson, 2023.↩︎

  11. Srivastava, 2023.↩︎

  12. B’Tselem data; Stead, 2018.↩︎

  13. 이 인용은 아부 바쿠르 후세인이 수집한 인용 모음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출처가 표시된 전체 인용 모음은 https://t.co/Q5tybQyghW에 있다.↩︎

  14. Pacchiani, 2023.↩︎

  15. 이 수치는 “전혀 아니다”(47.5퍼센트)와 “별로 아니다”(35.9퍼센트)를 더한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 전체는 Israel Democracy Institute, 2023 에서 볼 수 있다.↩︎

  16. Englert, 2022.↩︎

  17. Edmonds and Carey, 2017, pp372 and 375.↩︎

  18. Callinicos, 1996을 보시오.↩︎

  19. 이 체제의 발전에 관해서는 Alexander, 2022 를 보시오.↩︎

  20. 아달라 법률 센터의 “차별 법률 데이터베이스”에는 이스라엘 내의 법률적 차별들이 나열돼 있다. www.adalah.org/en/law/index를 보라. 이런 법률적 차별은 경제적‍·‍사회적 차별과 함께 작동한다. 국제앰네스티는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들을 고립된 거주지들로 … 분리시키려는 … 용의주도한 정책”으로 고통받고 있고, 그들의 90퍼센트가 “갈릴리와 삼각주 … 남부 네게브 지역에 있는 … 인구가 밀집된 마을 139곳”에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군 복무에서 제도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에 중요한 일자리에 접근할 수 없고, 주택 보조금 등 다른 복지도 누릴 수 없다. “아랍인 구역”의 평균 순수익은 “유대인 구역”의 3분의 2에 불과하다. Amnesty International, 2022, pp76, 83 and 167을 보시오.↩︎

  21. Alexander, 2022.↩︎

  22. Teibel, 2023.↩︎

  23. 유대인 혐오에 맞선 투쟁에 관해서는 Gluckstein, 2023을 보시오.↩︎

  24. Rose, 2004, chapter 6.↩︎

  25. Rose, 2002, p38.↩︎

  26. Herzl, 1917, p12.↩︎

  27. Marshall, 1989, p32.↩︎

  28. Khalidi, 2020, p27에서 인용.↩︎

  29. Storrs, 1937, p405.↩︎

  30. Englert, 2020, pp1660-1661. 하가나(현대 히브리어로 “방위”라는 뜻)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한 주요 시온주의 민병대였다.↩︎

  31. Rose, 2002, p43.↩︎

  32. Marshall, 1989, pp38-40.↩︎

  33. Mashall, 1989, pp41-42; Rose, 2004, pp127-131.↩︎

  34. Pappé, 2006, p19.↩︎

  35. Pappé, 2006, p23에서 인용.↩︎

  36. Richard Crossman. Marshall, 1989, p49에서 인용.↩︎

  37. Pappé, 2006, pp17-28.↩︎

  38. Pappé, 2006, pp29-32.↩︎

  39. Pappé, 2006, pp36-37에서 인용.↩︎

  40. Alexander and Rose, 2008, p9.↩︎

  41. Pappé, 2006, chapters 6-8을 보라.↩︎

  42. Pappé, 2006, p82.↩︎

  43. 레히(“스턴 갱단”이라고 불릴 때가 많다)는 강경 우익 민병대로 1940년 이르군에서 분열해 나온 조직이다.↩︎

  44. Pappé, 2006, pp90-91.↩︎

  45. Pappé, 2006, p134.↩︎

  46. Marshall, 1989, pp76-77.↩︎

  47.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81호(2024년 겨울호)에 실린 퍼거슨의 글을 보라.↩︎

  48. Alexander, 2005를 보라.↩︎

  49. Cliff, 2001, pp46-47.↩︎

  50. Marshall, 1989, p117.↩︎

  51. Marshall, 1989, p103.↩︎

  52. Marshall, 1989, p136. 마셜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스라엘군은 계속 남아 사브라‍·‍샤틸라 학살을 감독했다. 사브라‍·‍샤틸라 학살은 레바논의 극우 기독교 민병대 팔랑헤가 천막 살이를 하던 팔레스타인인들과 레바논 시아파 3000~3500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이 작전을 총괄한 이스라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훗날 총리가 됐다.↩︎

  53. Khalidi, 2020, p164.↩︎

  54. Khalidi, 2020, p165.↩︎

  55. B’Tselem 자료.↩︎

  56. 서안 지구에서는 이스라엘군과 정착자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도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에 항의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했다.↩︎

  57. Abunimah, 2014, chapter 4을 보라.↩︎

  58. Dana, 2019.↩︎

  59. Khalidi, 2020, p206.↩︎

  60. 하마스의 부상은 중동 전반에서 급진적 민족주의 조류가 쇠퇴하는 가운데 이슬람주의가 부상하는 더 큰 변화의 일부로 봐야 한다.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 형태의 좌파가 급진적 민족주의의 쇠퇴로 생긴 공백을 메우는 데 실패한 것을 여기서 살펴보기는 어렵다. 그에 관해서는 Marshall, 1989를 보라.↩︎

  61. Baconi, 2018, p17.↩︎

  62. Baconi, 2018, pp22-23.↩︎

  63. Filiu, 2014, pp281-282.↩︎

  64. Baconi, 2018, p96.↩︎

  65. Filiu, 2014, pp290-292; Goldenberg, 2008.↩︎

  66. Milton-Edwards, 2008; Baconi, 2018, p132.↩︎

  67. Robinson, 2023.↩︎

  68. Hammad and Tribe, 2020.↩︎

  69. Manzanero, Crespo and others, 2021.↩︎

  70. Shatz, 2023, p5.↩︎

  71. Shatz, 2023, p5.↩︎

  72. Kasrils, 2023.↩︎

  73. 1954~1962년에 사망한 알제리인들의 수는 40만 명에서 150만 명 사이로 추산된다. 이스라엘군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희생자 수를 집계하지 않았다.↩︎

  74. Shatz, 2023, p6.↩︎

  75. Zeilig, 2016, p97.↩︎

  76. Zeilig, 2016, pp140, 180, 187-188 and 197-200.↩︎

  77. 알제리 활동가 함자 하무첸느는 폰테코르보가 감독한 영화의 한 장면을 인용한다. 포로로 잡힌 한 FLN 지도자가 기자회견장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 “여성의 바구니와 핸드백으로 폭탄물을 운반해서 그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는 이렇게 답한다. “무방비 상태의 마을에 네이팜탄을 떨어뜨려 천 배나 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내는 것이 더 비겁하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당신들이 폭격기를 넘겨 주면, 우리도 바구니를 넘겨 주겠습니다.” Hamouchene, 2023를 보라.↩︎

  78. 예컨대 다음을 보라. Baconi, 2018, pp46, 51, 82, 142 and 179-180.↩︎

  79. Burton, 2012에서 탁월한 설명을 볼 수 있다.↩︎

  80. Baconi, 2018, pp239-240.↩︎

  81. Harman, 2002.↩︎

  82. Davidson and Hawkins, 2023.↩︎

  83. Zilber, 2023.↩︎

  84. Ringrose and Kimber, 2023.↩︎

  85. BDS 운동과 그에 격분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반응에 관해서는 Marfleet, 2019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