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최고위 관료 김정은: “[남북한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두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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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조선로동당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에서 “대남 부문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선언했다.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전쟁 중인 두 교전국 관계”로 규정한 것이다. 이로써 북한 관료의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하나가 바뀌었다.
그간 북한 정권은 전통적으로 한반도의 재통일을 강조해 왔다. “나라의 통일을 민족지상의 과업”(헌법 전문)이라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왔던 것이다.
김일성-김정일 2대를 이어 온 이데올로기를 이번에 손자인 김정은이 폐기해 버렸다.
사실 지난 70년간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해 왔다. 남·북한 지배자들은 해방 직후 38선 남북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의 도움을 받아 각자 자신의 국가를 창건했고, 자본 축적의 독자적인 중심을 형성해 왔다. 특히, 국제 정치 무대에서 남·북한은 별개의 독립 국가로 행동해 왔다.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과 북한 관료들은 통일을 강조하면서도 스탈린주의의 “일국 사회주의”론을 변형해 북한에서 독자적인 국가자본주의 발전에 매진했다. 그들도 세계 제국주의 체제 안에서 북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제일 중시했던 것이다.
소련 붕괴 후, 1990년대에 북한 당국은 남한에 의한 흡수 통일을 염려했고, 그래서 상당 기간 남·북한 두 국가가 ‘평화 공존’하는 쪽으로 기존의 연방제 통일 방안을 변경하기도 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코리아’ 원칙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 김정은의 행보는 아버지 대에 견줘 훨씬 더 나아간 것이다. 남한이 같은 민족임을 부정하고 ‘두 개의 코리아’를 공식화하니 말이다. 더구나 이제 남한은 여차하면 핵공격까지 불사해 점령해야 할 적대국이다.
김정은 정권이 새로운 대남 정책을 내놓은 것을 두고 주류 언론들은 대체로 북한 내부 단속의 필요로 설명한다. 김정은 정권이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가볍게 물리치고 더 나아갈 수 있음을 강조해 내부 불만을 잠재우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김정은과 그의 관료에게는 무력 과시를 통해 내부적으로 체제의 결속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대남 정책은 변화되고 있는 제국주의 질서와 한반도 주변 정세라는 더 큰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급격한 국제 질서 변화에 대응하는 노력 속에서 한반도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은 전원회의 보도문에서 이번 결정이 “거대한 지정학적 변화와 현 국제 정세의 기본 특징”과 관련돼 있다고 밝혔다.
2018~2019년 북·미 정상회담의 실패
냉전 종식 후, 30년 가까이 북한 지배자들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애써 왔다. 특히 경제적 활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북한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핵과 미사일 개발을 하는 한편, 그 핵개발 카드를 포함한 여러 수단을 동원해 미국과 협상하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를 거듭했다. 냉전 종식 이후 유동적으로 변해 가는 국제 질서가 가장 문제였다. 아시아·태평양을 계속 지배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고 미국이 북한을 ‘악마화’하고 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김정은 정권은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으로 돌파구를 열려고 했다. 김정은은 2018~2019년 트럼프와 친서 27통을 주고받으며 북·미 협상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북·미 정상회담은 실질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트럼프하에서도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을 의식하며 협상 테이블에서 북한에 일방적 양보만 요구했다. 트럼프는 국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정상회담을 이용할 뿐이었다.
2019년 8월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보내는 마지막 친서에 이렇게 썼다. “각하께서 우리의 관계를 오직 당신에게만 득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지 않는다면, 나를 주기만 하고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는 바보로 보이게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바보’라는 표현을 스스로 쓸 만큼 당시 김정은의 불만과 좌절감은 컸던 듯하다.
김정은은 트럼프가 올 연말에 재선돼 다시 만나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2018~2019년 경험을 통해 북·미 관계 개선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고차 방정식인지도 실감했을 것이다.
“한 참호에”
미·중 간 제국주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오늘날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는 국가들 간 갈등과 분열 위험이 증대하고 있다. 한반도와 그 주변도 그 불안정의 한가운데에 있다. 제국주의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부딪히고 있어서다.
이런 상황 변화에 대응하려고 남한에서는 문재인과 윤석열 정부가 모두 군비 증강에 열을 올려 왔다. 윤석열은 미국 쪽에 확고히 기우는 선택을 하고, 대북 적대도 강화하며 불안정 증대에 일조하고 있다.
북한도 제국주의적 갈등 심화로 압박을 받고 있고, 그 속에서 자국이 숨쉴 틈을 찾아야 하는 처지다.
202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202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발발 등 몇몇 국제적 사건들은 북한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데 영향을 줬을 것이다.
비록 여전히 세계 최강이지만 지금 미국은 세계 곳곳에서 제기된 지역적 도전들에 고전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그 경쟁자인 중국·러시아의 지정학적 영향력은 좀 더 커졌다.
북한은 중국,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해 왔다. 중국과는 교역이 증대하며 경제적 관계가 발전하고 있고, 외교적 관계도 과거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견줘 훨씬 밀접해졌다.
또한 최근 러시아와의 관계 발전이 두드러진다. 러시아는 제국주의 국가로서 동아시아에 다시 관여하고자 하는데,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이 북-러가 더욱 밀착한 계기가 된 듯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후인 2022년 9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은 국제 관계가 “미국이 제창하는 일극 세계로부터 다극 세계로 전환”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 “일극 세계”의 종언과 “다극 세계”의 도래를 강조했던 그해 6월 푸틴의 연설과 궤를 같이하는 주장이었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공개적으로 응원한 몇 안 되는 국가다. 지난해 1월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 부부장은 한 담화문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 러시아 군대와 인민과 언제나 한 전호[참호]에 서 있을 것이다.”
최근 북한과의 군사 협력이 진전되면서 푸틴은 북한의 인공위성과 로켓 개발을 지원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김정은 정권은 미·중 군비 경쟁, 일본의 선제공격 능력 확충 등 주변 질서의 변화와 압박에 핵과 미사일 강화로 대응해 왔다. 아마 북한 관료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핵무장 강화의 필요성을 더 절감했을 듯하다.
2022년 9월 북한은 ‘핵무력정책법’을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하며, 유사시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유사시 남한을 전술핵으로 타격할 수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제국주의 문제
이처럼 제국주의적 경쟁과 갈등이 한반도에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주는 가운데, 한반도의 두 국가는 서로를 향한 적의를 키우면서, 각자 경쟁하는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한편에 서는 길을 선택해 왔다.
이런 맥락 속에서 북한이 ‘두 국가론’을 확립한 것이다.
김정은 정권은 이런 전환을 수년 전부터 검토하고 가다듬어 온 게 분명하다. 2019년 이후 ‘우리민족제일주의’에서 ‘우리국가제일주의’로의 슬로건 변경, 지난해부터 북한 지도부가 ‘대한민국’이란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일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북한 국가의 중국·러시아와의 밀착은 “반제공동투쟁”이나 (남한의 미·일과의 밀착이 그렇듯이) “평등과 호혜에 기초한 국제적 정의 실현”과는 상관없다.
북한 당국의 ‘적대적 두 국가론’은 동·서 제국주의간 갈등의 맥락 속에 있다. 북한의 대남 핵공격 언급은 한반도 긴장을 낮추지 못하면서, 남한 노동계급의 투쟁과 의식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제국주의간 갈등과 남북한 긴장 속에서 북한 비판에 더 큰 강조점을 두는 것은 남한에서 활동하는 좌파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자국 정부의 친제국주의에 대해 정치적으로 무장해제될 뿐이다.
남한의 좌파들은 중국·러시아 제국주의와 북한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미국·일본 제국주의와 자국 정부를 반대하는 데 훨씬 주력해야 한다. 그러한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운동의 건설을 지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