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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스페인·미국의 경험으로 살펴보는:
광장 운동과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

윤석열의 군사 쿠데타에 반대해 윤석열 퇴진(파면)을 요구하는 거리 운동이 석 달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거리 운동은 아직 노동자 투쟁과 연결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보다는 조기 대선 실시 가능성을 내다보며 상이한 정치적 구조물을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가장 앞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민중전선 결성 움직임이다(‘내란 종식 민주 헌정 수호 새로운 대한민국 원탁회의’). 민주당이 매우 신속하게 쿠데타를 반대하며 계엄 해제 국회 결의안 통과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쿠데타의 밤 때 국회의사당 앞 시위를 주도했던 진보당이 민중전선 결성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민중전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본지 514호에 실린 최일붕의 ‘민중전선 ─ 파시즘에 맞서려면 반드시 필요한 연합인가?’를 보라.)

이런 민중전선과 거리를 두며 그 왼쪽에서 광장 운동의 정치적 표현체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2010년대 초반 서구의 광장 운동과 그것을 기반으로 떠오른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연상케 하는 움직임이다. 물론 서구와 한국의 운동 경험이 똑같지는 않다. 가령 서구의 광장 운동은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극우의 부상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현재 한국의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프로젝트는 민주당과 민중전선에 가려, 2010년대 전반부 유럽에서와 같은 커다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 서구의 경험들에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그것은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대중 운동의 부상에서 활력을 얻었지만 결국에는 계급 협력주의(민중전선의 논리와 똑같다)와 타협했다는 점이다.

2011년 광장 운동의 분출

2011년 스페인·그리스·미국 등지에서 광장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들은 그해 초에 일어난 이집트 혁명, 특히 타흐리르 광장(카이로 소재) 점거 운동에서 영감을 얻었다.

2011년 5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푸에르타델솔(태양의 문이라는 뜻) 광장에서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 운동이 분출했다(M15 운동으로도 불렸다).

‘분노한 사람들’ 운동은 재정 긴축을 반대하고 부패하고 비민주적인 기성 정치권을 철저하게 청산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사회당과 국민당은 둘 다 쓰레기다,” “그들은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 하고 외쳤다. 사회당(PSOE)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고, 국민당(PP)은 주류 우파 정당이다.

‘분노한 사람들’ 운동은 곧이어 그리스에 영향을 미쳤다. 아테네 신타그마(그리스 헌법을 가리킴) 광장을 비롯해 그리스 전역의 광장들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광장 운동으로 당시 그리스 정부는 붕괴 일보직전까지 내몰렸다. 사회당 소속 총리 파판드레우가 2011년 6월 15일 총파업과 거리 시위의 압력을 받아 사퇴 의사를 밝혔다가 하루도 못 지나 번복하는 등 정치적 불안정이 증폭됐다.

유럽의 광장 점거 운동은 미국으로 확산됐다. 9월 17일 뉴욕시 월스트리트 인근의 주코티 공원에 텐트들이 설치됐다.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운동은 청년들의 근거지가 됐고, 일부 지역에서 노동조합들의 참가를 이끌어 내며 미국의 많은 도시들로 확대됐다.

상위 1퍼센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 ⓒ출처 Paul Stein (플리커)

뉴욕시 대중교통노조, 미국철강노조, 전국간호사노조, 컨티넨탈항공 조종사노조 등이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했고 조합원들을 이 운동에 동원했다.

2011년 10월 15일에는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을 지지하는 국제 연대 시위가 벌어졌다. 전 세계 950개 도시에서 100만여 명이 참가했다. 2003년 2월 15일 이라크 전쟁 반대 국제 시위 이후 가장 규모가 큰 국제적 동원이었다.

광장 운동의 자율주의적 정서

광장 운동들을 지배한 정서는 연성 자율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월스트리트 점거하라’ 운동에서 이런 주장들을 가장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구체적인 요구나 정책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리스 신타그마 광장 운동에서도 정치적 리더십을 부정하고 운동의 자율성과 자발성을 예찬하는 주장들이 나왔다. 이런 자발성주의는 기성 정당들에 대한 (정당한) 불신을 나타낸 것이었다.

일부 좌파 정당들(가령 그리스 공산당)은 광장 점거 운동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런 자율주의적 ‘반(反)정치’를 결과적으로 정당화해 줬다.

그러나 ‘반정치’ 사상은 아무리 급진적일지라도 약점이 분명했다. 정치와 이데올로기 없이 어떻게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 예컨대, 광장 운동이 합의나 만장일치를 위해 인종차별 쟁점에 침묵한다면, 운동 전체와 인종차별 반대 투쟁은 커다란 기회를 유실하지 않겠는가.

또 다른 정치적 문제점은 광장 운동이 대적해야 하는 적이 누구인지가 불분명했다는 점이다.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의 핵심 슬로건은 “우리는 99퍼센트다”였다. 이 구호는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 분열을 드러냈지만, 정확히 누가 적인지를 규정하지 못했다. 적은 월스트리트의 탐욕스러운 투기꾼들뿐인가?

오바마 정부는 이런 모호함을 파고들었다. 오바마 정부는 시위대의 “우려를 이해한다”고 재빠르게 선언했고, 민주당은 월스트리트를 규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0월 말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경찰은 점거 캠프를 폭력적으로 해산했다.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부침

‘반정치의 정치’가 한계에 직면하자 광장 운동은 정치적 표현체를 찾기 시작했다. 스페인 ‘분노한 사람들’ 활동가들은 이런 물음을 던졌다.

‘우리는 조직했고, 집회를 열었으며, 결정을 내렸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저 위에 있는 자들의 ‘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와 권력은 그들 손아귀에 있다. 우리는 거기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그들은 포데모스의 창당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스에서는 시리자가 그 구실을 맡았다. 미국에서는 버니 샌더스와 민주사회당(DSA)이 부각됐다. 그 비슷한 시기에 광장 운동이 없었던 포르투갈과 아일랜드에서도 각각 좌파블록과 신페인당이 부상했다.

이 정당들도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 버니 샌더스는 주류적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기 때문에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는 규정은 이 정당들의 양면성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하다. 이 정당들은 대중 운동의 부상에서 활력을 얻었고, 지난 몇 년 동안 그 나라들의 노동계급과 청년층이 축적한 경험과 사회적 좌선회의 산물이었다.

그 나라들의 운동이 지난 몇 년간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이념적·조직적 거리를 뒀기 때문에,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주류 사회민주주의와는 다르게 좌파적 스탠스를 취했다.

따라서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선거적 성공은 그저 주류 사회민주주의의 화장술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적 사회민주주의(사회적 자유주의)의 우경화가 남겨 놓은 정치적 공백을 메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반자본주의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특히 국가와 관련된 그들의 전략은 역시 사회민주주의답게 개혁주의적이었다.

가령 포데모스는 두 주요 정당(국민당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카스트(caste)라고 불렀으나, 2015년 초부터 포데모스 안에서 카스트라는 용어는 사라지고 사회당과의 소통 채널이 열렸다. 마침내 포데모스는 2019년에 사회당과 연정을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포데모스는 카탈루냐의 자결권 옹호를 회피했다.

이글레시아스는 자신이 '카스트'라고 부른 자들과 손을 잡았다 사회당 총리 페드로 산체스(왼쪽)와 포데모스 대표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오른쪽) ⓒ출처 La Moncloa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포데모스의 전략이 주류 사회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데모스도 의회(내 세력 관계)의 변화를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봤다. 포데모스는 사회당을 선거적으로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봤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의회 내 세력 관계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한다. 그럼에도 의회 내 다수파는 가야 할 지평선이고, 대중 운동은 의회 협상에 그 자리를 내준다.

대중 운동은 선거적 성공을 돕기 위한 지렛대로 간주됐을 뿐, 그 반대가 아니었다. 그러자면 대중 운동은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지도부가 통제할 수 있는 수위 아래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포데모스 창당 대표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선거 운동을 하면서 사회당보다 포데모스에 한 표 더 달라고 호소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스 시리자 정부는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경험을 제공했다. 시리자 정부가 등장하기 전에는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자유주의”로 변질됐기 때문에, 시리자 정부가 등장하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이제 시리자 정부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첫째, 양보하고 긴축 반대 약속을 철회하는 것이었다.

둘째, 유럽연합과 국제 금융 자본가들에 맞선 장기적인 투쟁에 돌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리자의 목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대중 투쟁이 시리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크게 벌어져 그리스와 유럽 지배자들을 위협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시리자 정부는 첫 번째 선택지를 택했다.

포데모스 지도부는 그리스 총리 치프라스가 긴축 반대에서 찬성으로 선회한 것을 지지했다. 이글레시아스는 “이것이 체제의 ‘한계’이며 우리는 이 한계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사회민주주의야말로(주류든 좌파든) 이런 “한계” 내 “활동”에 딱 들어맞는 정치였다.

포데모스 내 극좌파인 반자본주의 좌파(Anticapitalistas)는 이글레시아스의 논리를 반대하지 않았다. 반자본주의 좌파는 포데모스 창당의 핵심 지지 세력이었다. 반자본주의 좌파는 유럽연합과 유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래야 포데모스가 더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혁명가들이 좌파적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취할 일반적 태도를 밝히면서 마무리하겠다.

첫째, 좌파적 사회민주주의의 선거적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에 대해 종파주의적 태도를 취하면 안 된다.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이 기성 개혁주의 정당들과의 선거적 연합을 중시하는 반면, 혁명가들은 투쟁하는 노동자와 차별받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 행동을 건설하는 것을 진정으로 중시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런 공동 행동을 잘 수행하려면 혁명가들은 독립적인 조직을 구축하고 운동의 이니셔티브를 발휘하되 개방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셋째, 혁명가들이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을 때만 좌파적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효과적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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