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정년 연장? 늙어서까지 일하는 것이 대안일 수 없다
〈노동자 연대〉 구독
현재 60세인 법정 정년을 65세로 늘리자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한국의 낙후한 연금과 복지 제도 탓에 노후가 불안한 노동자들을 위한다며 말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수십 년을 뼈빠지게 일한 노동자들더러 더 일하라고 하는 것이 노후를 위한 진정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정년 연장 요구는 근본에서 잘못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저출생 고령화 시대에 노동력이 부족하니 노년층도 일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정부나 국민의힘, 민주당뿐 아니라 민주노총, 한국노총도 이런 전제를 공유한다.
그러나 이는 자본가의 관점일 뿐이다. 정부와 기업주들은 노동력이 부족하다면서 정작 청년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는 늘리지 않고 있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면 기업주들의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노년의 삶마저 희생해야 한다는 결과로 이어진다. 늙어 죽을 때까지 착취당하는 삶이 강요되는 것이다.
그러나 온갖 기술과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생산성이 향상되는 새 시대가 온다며 호들갑 떠는 상황에서 왜 노동자들은 늙어서까지 힘들게 일해야 하는가?

물론 한국경영자총연합회는 법정 정년 연장조차 반대하며 ‘퇴직 후 재고용’을 주장하고 있다. 퇴직한 고령 노동자들을 더 싼값에 부려먹겠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경총의 입장에 힘을 실어 왔다.
그러나 민주당 등이 주장하는 정년 연장도 본질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요구는 아니다. 노후의 삶마저 스스로 대비하라는 방향에 불과하니 말이다.
또한 노동력 공급을 위해 노년층도 일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이윤 논리를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업주들이 정년 연장의 전제 조건으로 임금 체계를 공격하는 것에도 제대로 맞서기 힘들어진다.
실제로 2013년에 법정 정년이 58세에서 60세로 늘어날 때 법 조문에 임금 체계를 개악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당시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만이 아니라 민주당도 임금 체계 개악을 지지했다. 이후 각 사업장 별로 정년 연장이 추진될 때 대다수 노조 지도부가 임금피크제를 수용했다.
그 결과 법적 정년은 연장됐을지라도 노동자들이 주된 일자리에서 실제 퇴직하는 연령은 2005년 50세에서 2024년 49.4세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임금피크제로 퇴직 전부터 임금이 감소하는데다 기업주들의 조기 퇴직 압박 등이 늘어나 정년까지 다니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자들의 기대와 달리 법적 정년 연장이 고령 노동자들의 처우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연금 개악
게다가 정년 연장은 더한층의 연금 개악을 향한 문을 여는 지렛대가 될 가능성이 있다.
노동계에서는 연금 수급 개시 연령과 정년 퇴직 연령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정년을 연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상당수 노동자들도 이게 불가피한 대안이라고 ‘선택’한다.
그러나 늦춰지는 연금 수급 연령에 맞춰 정년을 연장한다면 이는 연금 수급 연령을 높인 개악을 못박는 효과를 낸다. 국민연금 수급 연령 상향은 1998년 IMF 위기 때 도입된 대표적인 개악 조처이다.
게다가 연금 수급 연령 65세로 상향이 완료되면 더한층의 개악이 뒤따르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이미 지난해 정부는 연금 의무 가입 연령을 현재 59세에서 64세로 상향하는 방향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세계 곳곳에서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높이는(즉 정년을 연장하는) 개악이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악으로 추진됐다. 미국은 1980년대 연금 개시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높였다. 영국, 독일은 현재 65세인 연금 개시 연령을 67세로 높일 예정이고, 심지어 호주는 현재 67세에서 70세로 늦추는 개악이 시도되고 있다.
최근 정부는 노인 연령 기준 자체를 상향하려 한다. 이를 통해 기초연금 지급 연령도 늦추고 쥐꼬리만 한 대중교통 혜택도 줄이려 하는 것이다. 법정 정년 연장은 이런 개악에 발을 맞추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노총에 이어 민주노총이 얼마 전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정년 연장을 요구하기로 결정한 것은 부적절하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최근 민주당의 ‘회복과 성장을 위한 정년 연장 TF’에 참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사용자 단체들도 포함돼 있다. TF의 이름에 “성장”이 강조돼 있듯 정년 연장을 고리로 각종 개악이 강요될 수 있다.
물론 이미 고령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업장에서 사용자들이 나이를 이유로 고령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임금을 삭감하는 공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에 맞서 고령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 후퇴 없는 정년 연장을 요구한다면 일자리와 노동조건 향상을 위해 이 요구를 지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별 사업장에서 일자리와 노동조건 향상을 위해 요구하는 것과 법적으로 정년을 연장하자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법정 정년 연장은 모든 노동자에게 더 늙어서까지 일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노동계급의 노후를 개선하려면 연금을 더 많이, 더 빨리 지급하고 복지를 대폭 확대하라고 요구하며 투쟁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주들은 노후 복지와 연금 증대를 청년층과 노년층의 세대 갈등으로 몰아가지만, 노동계급 부모의 노후가 풍족해지는 것은 노동계급 청년층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연금과 복지를 늘릴 재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는 부자와 기업주들에게 5년간 81조 원에 달하는 감세 혜택을 줬다. 국민의힘뿐 아니라 민주당도 이 감세안에 합의했다.
이런 돈을 연금과 복지, 일자리를 위해 쓴다면 노년층이든 청년층이든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 연금과 복지 증대는 세대 갈등이 아니라 계급 갈등 문제다.
2019년 수천만 노동자가 파업에 나선 브라질 연금 개악 반대 투쟁, 2023년 수백 만 명이 참가한 프랑스 연금 개악 반대 투쟁 등 국제적으로 연금 수급 연령을 늦추고 정년을 연장하는 것에 맞서 투쟁이 벌어져 왔다. 한국의 노동계급도 이런 국제적 투쟁의 일부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