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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개악, 기금 고갈 때문에 불가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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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 자살률 모두 최악인 한국 사회. 노후 지원을 늘려도 모자랄 판에, 지난달 윤석열 정부가 구체적인 국민연금 개악안을 내놨습니다.
그런데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은 개악의 수준을 놓고 여당과 실랑이할 뿐 개악 자체는 반대하지 않죠.
진보 단체들 다수는 정부의 안과 민주당의 안을 비판하면서도, 보험료 인상 등 노동자들의 고통 분담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국민연금 ‘개혁’을 둘러싼 쟁점들을 살펴봤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국민연금 개악안을 내놨습니다. 핵심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지난 9월 4일 윤석열 정부는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현행 소득의 9퍼센트에서 13퍼센트로 대폭 인상하고, 소득대체율을 40퍼센트에서 42퍼센트로 찔끔 인상하는 연금 개악안을 발표했습니다.
내야 하는 연금 보험료는 45퍼센트가량이나 인상하는데, 받는 연금액은 5퍼센트만 올리자는 겁니다.
예를 들어, 소득이 평균 수준인 노동자를 생각해 보죠. 이 노동자는 월급 286만 원에서 현재 매월 25만 7400원을 국민연금 보험료로 냅니다. 그런데 이번 개악이 통과되면 월 보험료가 37만 1800원으로 11만 4400원이나 늘어나게 됩니다. 이 중 절반을 사측이 부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매달 월급에서 5만 7200원이 더 나가게 되는 겁니다. 자영업자라면 11만 4400원을 고스란히 혼자 부담해야 하는 것이고요.
최근 생계난이 심화돼서 노동자·서민의 삶이 매우 팍팍해졌는데, 앞으로 매달 보험료를 10만 원 넘게 더 내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꽤 큰 부담입니다.
반면, 정부는 국민연금 수령액은 소득대체율 40퍼센트에서 42퍼센트로 고작 5퍼센트만 올리겠다고 합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연금통계 결과’를 보면, 65세 이상 노인 중 국민연금을 받는 사람은 절반이 채 안 됐고, 평균 수령액은 41만 3000원에 그쳤습니다. 여기에 평균 30만 원이 채 안 되는 기초연금을 받아도, 전체 연금 수령액은 평균 65만 원 정도에 그칩니다. 1인 최저생계비가 116만 원인데, 절반밖에 안 되는 ‘용돈 연금’ 수준인 것이죠. 여기서 국민연금 수령액을 5퍼센트 높여도 고작 2~3만 원 정도만 더 받는 것입니다.
그나마도 상당수 노인은 평균도 안 되는 국민연금을 받고 있고, 노인의 10퍼센트가량은 공적연금을 한 푼도 못 받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38.1퍼센트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습니다. OECD 국가 평균 노인빈곤율의 3배 가까이 되는 것이죠. 이처럼 연금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으니 상당수 노인은 65세 이후에도 일을 해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계획은 연금으로만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은 전혀 만들어 주지 못하면서, 당장 국민연금 보험료를 대폭 올리겠다는 방안이니 명백히 개악인 것입니다.
정부는 더 많이 내는 연금 개악 외에도, 국민연금 ‘자동안정화’ 장치라는 것을 도입하고 보험료율을 세대별로 차등 인상하겠다고도 하는데요.
우선, 자동안정화 장치는 인구 구조나 경제 여건의 변화, 국민연금 기금 수익률 등에 따라 보험료와 소득대체율, 연금 지급 시기 등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제도입니다. 서구 여러 나라들이 이미 연금 개악의 일환으로 시행 중인 연금 삭감 방안입니다.
‘공적연금강화 국민행동’(이하 연금행동)이 다른 나라 사례들을 분석한 보고서는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자동안정화 장치는 전반적으로 공적연금의 수준을 하락시킨다.”
국가기관인 국민연금연구원이 작성한 다른 보고서를 봐도, 자동안정화 장치를 도입할 경우 2030년부터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사람은 전체 연금액이 기존보다 17퍼센트가량 감소하는 것으로 추계했습니다.
안 그래도 쥐꼬리만큼만 주는 국민연금인데, 연금 재정을 안정화시켜야 한다며 연금이 자동으로 깎이는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겁니다.
한편, 정부는 세대별로 보험료를 차등 인상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세대 간 공정성’을 높여야 한다며 내놓은 것인데요. 실상은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는 사악한 방안이고, 결정적으로 청년 세대에 유리하기는커녕 큰 피해를 주는 방안입니다.
정부안을 구체적으로 보면, 내년 50대인 가입자는 매년 1퍼센트포인트씩 4년에 걸쳐 보험료율을 올리고, 40대는 0.5퍼센트포인트, 30대는 0.3퍼센트포인트, 20대는 0.25퍼센트포인트씩 인상하는 방식입니다.
마치 청년 세대를 위하는 척 청년 세대의 보험료는 천천히 올리겠다는 것인데, 그러나 본질은 인상 속도만 달리해서 청년 노동자와 중장년 노동자의 보험료 부담을 대폭 올리겠다는 것입니다. 20~30대의 보험료를 천천히 올려도 결국 20~30대가 더 오랫동안 높은 보험료율을 감당해야 합니다. 청년 세대가 더 큰 피해를 보는 것이죠.
중장년층이라고 해서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법정 정년이 60세라고 하나 50도 되기 전에 퇴직하는 노동자들이 허다합니다. 이렇게 퇴직한 노동자들은 다시 열악한 비정규직 일자리를 찾아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경우가 많죠. 2022년 기준 비정규직 노동자 약 820만 명 중 59퍼센트가 50~60대라고 합니다. 이들의 보험료를 더 빨리 올리는 것은 노동자와 서민층의 생계난을 더욱 가중시킬 것입니다.
정부가 이렇게 집요하게 국민연금을 개악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국민연금 기금 고갈을 막아야 한다는 겁니다.
정부는 이번 개악으로 기금 고갈 시점을 2056년에서 16년가량 더 늦출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파들은 국민연금 기금이 고갈되면 마치 연금을 받을 수 없게 되는 양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연금 기금 고갈은 국민연금 제도가 시작될 때부터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금이 소진되면 그해 필요한 돈을 그해에 걷어 지급하는 방식으로 변경하는 게 예정돼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상당수 유럽 국가들은 이런 식으로 연금을 지급하고 있고, 한국의 건강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우파들이 기금 고갈을 걱정하는 까닭은, 연금 지급을 보조해야 하는 정부의 재정 적자가 늘어나는 부담, 그리고 그 적자를 메울 때 늘어날 부유층과 기업의 세금 증가 부담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연금 개악에 단호하게 반대해야 할 텐데, 민주당의 입장은 어떤가요?
민주당은 이미 자체적으로 연금 개악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정부·여당과 민주당이 논쟁을 벌이고는 있지만, 개악을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하고 있을 뿐입니다.
올해 총선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5월 말에,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5월 29일에 임기가 끝나는 21대 국회가 ‘연금개혁안’을 처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여기서 이재명 대표는 “시간이 없으니 우리 민주당이 다 양보하겠다”면서 “여당이 제시한 소득대체율 44퍼센트를 전적으로 수용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애초에 민주당은 올해 4월 말 국회 연금특위 공론화위원회에서 채택된 다수안을 지지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다수안도 진정한 개혁안이 아니었죠. 국민연금 보험료를 이번에 정부가 제시한 것처럼 9퍼센트에서 13퍼센트로 올리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40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올리자는 안이었기 때문입니다. 보험료는 45퍼센트 가까이 올리면서, 연금은 25퍼센트만 더 주겠다는 방안입니다.
민주당은 국민연금 수령액을 조금 늘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보험료 부담을 대폭 올리는 안에 찬성했던 겁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여당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연금 수령액 인상 부분을 계속 줄이며 후퇴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당시에 〈조선일보〉조차 사설을 통해 이재명 대표의 제안을 지지하면서, 중간 지점에서 절충해 “21대 국회에서, 내는 돈 인상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리고 민주당이 정부·여당과 협상하며 연금 수령액 삭감에서 계속 타협하니, 정부가 더 자신감을 얻어 이번에 수령액을 정말 찔끔 올리는 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겁니다.
민주당은 이미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 보험료는 인상하고 소득대체율을 대폭 낮추는 연금 개악도 주도한 바 있습니다.
민주당의 이런 한계는 그 당의 친자본주의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민주당은 포퓰리즘 전략을 구사해 온건 좌파(소위 진보) 정치 세력과 연대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자본가 계급에게 인정받아 집권당이 되려는 중도 정당입니다. 그러니 기업주와 부유층의 부담을 대폭 늘리고, 노동자들의 노후 생활을 보장하는 진정한 연금 개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보당, 정의당, 연금행동 같은 주요 진보 단체들은 이 문제에 대해 뭐라 주장하나요?
민주노총·한국노총·참여연대 등이 포함된 연금행동이나 진보당·정의당 같은 주요 진보 단체들은 윤석열의 개악안이 ‘세대 간 갈라치기’이고, ‘노후생활 파탄’ 방안이라며 비판했습니다.
연금행동과 진보당은 지난 5월에 이재명 대표의 양보 제안을 비판했고, 국민연금 수령액을 좀더 올리는 안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단체들도 노동자들이 보험료 인상으로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데에는 찬성합니다. 즉, 이들도 연금 기금이나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난 대선에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국민연금 보험료는 대폭 올리지만 국민연금 수령액은 그대로 두는 방안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 윤석열 정부가 내놓은 연금 개악안과 비슷한 방안이었습니다.
이렇게 노동자가 고통 분담을 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우파들이 펼치는 ‘세대 간 갈라치기’ 주장에 대응하기가 어렵습니다. 부유층·기업주의 부담을 늘리는 논의가 중심이 되지 않고, 노동계급 청년과 중장년 중에 누가 더 부담해야 하는지로 논점을 돌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즉, 재원을 어느 계급으로부터 거둘 것인지 하는 진정한 문제가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에게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연금 개혁을 위해 투쟁에 나설 의욕을 떨어뜨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미 생계난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상당수인데, 자기의 보험료 부담을 대폭 올리라고 투쟁에 나설 노동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죠.
또, 앞서 말한 진보 단체들은 연금 개혁을 위한 의회 협상을 중시하지,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키우는 일은 부차적인 것으로 방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연금 개혁이 불가능합니다. 경제가 원체 지지부진해 자본가들이 양보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또, 민주당이 정부·여당과의 타협에 나서 더한층의 개악안을 수용하는 것을 막을 힘도 없게 됩니다. 그것이 올해 5월에 일어난 일입니다.
보험료 인상은 불가피하고 연금 기금이 고갈되는 건 막아야 한다는 데 진보 단체 다수도 동의하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국민연금 기금이 고갈된다고 해서 연금 지급이 중단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연금은 보험료를 낸 사람한테만 주는 방식으로 설계됐기 때문에 처음에는 기금이 쌓이다가 받는 사람이 늘어나면 기금이 소진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보험료를 내는 사람한테만 준다는 점에서 국민연금은 애초부터 시장주의라는 문제점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아무튼 서구 여러 나라들은 이미 기금이 없어도 노령연금을 지급하고 있고, 한국의 건강보험도 기금 없이 운영 중입니다. 따라서 연금 기금 고갈은 노동계급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국민연금 제도의 열악한 상황을 살펴보려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금 지급액을 보는 게 더 낫습니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이 OECD 국가 중 최악이라고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이는 한국의 GDP 대비 공적연금(국민연금·기초연금·공무원연금 등) 지출 규모가 OECD 국가 중 가장 낮기 때문입니다. 2020년 기준 3.7퍼센트밖에 안 됩니다. 이미 유럽 국가들은 연금 지급에 GDP의 10퍼센트 이상 쓰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와 우파들은 2055년 즈음에 국민연금 기금이 소진된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그해 한국의 전체 연금 지출은 GDP의 7퍼센트가량에 불과할 것으로 추계됩니다. 2055년에 노인 인구 비중이 50퍼센트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한국의 연금 지출 규모는 매우 작은 것입니다.
즉,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 1위라는 비극적 현실은 서민층의 노후를 위해 충분히 지원하지 않은 정부의 책임입니다.
국내외에서 연금을 둘러싼 개악 시도와 저항이 벌어져 왔는데요. 그 경험에서 이끌어 낼 만한 교훈이 있을까요?
지난해에 프랑스에서 연금 개악 반대 투쟁이 거대하게 벌어졌습니다. 이 투쟁은 1월부터 5월까지 4개월 동안 14차례 공식적인 전국 시위가 벌어지는 등 수많은 노동자들이 참가했습니다.
물론 프랑스에서 연금 개악안이 결국 통과됐고, 이 운동은 표면적으로는 패배했습니다.
그럼에도 거대한 반대 운동 때문에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의회를 건너뛰고 대통령의 특별 권한으로 개악안을 겨우 통과시킬 수 있었습니다. 연금 개악은 프랑스의 모든 자본가와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원하던 것이었는데도 말이죠. 결국 연금 개악을 밀어붙인 것 때문에 마크롱은 정치적으로 매우 취약해졌습니다.
이 운동의 패배에는 프랑스의 노조 지도자들이 한몫했습니다. 이들은 마크롱이 민주주의를 짓밟고 경찰을 동원해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비판했지만, 노조 지도자들 스스로도 단발적인 파업과 시위 이상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파업 수위를 높이고 연금뿐 아니라 임금 인상 투쟁도 벌였다면 마크롱은 연금 개악에 실패했을 공산이 큽니다. 그럼 마크롱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을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든 한국이든 지배자들이 연금 개악에 사활적으로 달려드는 것은, 국민들의 노후 생활 보장에 기업과 부유층들이 너무 많은 돈을 쓰게 되면 결과적으로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최근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지배자들은 이 부담을 사활적으로 덜어내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연금 개악을 막고, 진정으로 노후 생활 보장을 위한 연금 개혁을 달성하려면 지배자들을 위협하는 거대한 투쟁이 벌어지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점점 더 많은 부를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노동자를 비롯한 서민층은 젊은 시절에 이 사회의 부를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 이들은 늙어서 평안한 삶을 보낼 권리가 있습니다. 이를 위한 재원은 이 사회의 부를 독차지해 온 부유층과 기업주들이 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한국의 주요 노동조합들, 그리고 진보당·정의당 같은 주요 진보 단체들도 노동자들이 부담을 더 져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는 연금을 지급할 재원을 어느 계급이 책임져야 하는지 하는 진정한 문제를 흐리게 만드는 일입니다.
또, 노동자들이 생계난에 시달리고 있는데, 연금 보험료를 매월 10만 원이나 더 내라고 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연금 개혁을 위해 투쟁에 나설 의욕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기업과 부유층에게서 더 많은 세금과 보험료를 걷어 노동자 서민의 안정적 노후 생활을 보장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 자신감도 키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