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인 난민들과 연대자들이 서울 도심을 행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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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서울 도심에서 재한 이집트인 정치 난민들이 법적 난민 지위 인정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집트인 정치 난민들은 2011년 이집트 혁명에 참가했고, 2013년 반혁명 쿠데타로 집권한 엘시시 독재 정권의 탄압을 피해 2018년 한국으로 망명해 왔다.
그러나 지난 8년 동안 이들은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법무부에 이어 사법부까지 난민 인정을 잇달아 거부했다.
이에 이집트인 정치 난민들은 스스로 투쟁에 나섰다.
10월 14일 대통령실 앞 집회를 시작으로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인천출입국·외국인청, 법무부, 국회의사당 앞에서 난민 인정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동안 난민인권센터,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 진보적 목사들, 기간제교사노동조합, 민주평등사회를위한전국교수연구자협의회, 이주민연대 샬롬의 집, 노동자연대 등 여러 시민사회 단체들이 난민들의 행동에 연대해 참가하거나 지지를 표명했다.
10월 26일 서울 도심 집회와 행진에는 난민들뿐 아니라 한국인과 다양한 이주 배경의 사람들 150여 명이 함께했다.
“거대한 감옥 같은 삶”
첫 발언자인 이집트인 정치 난민 카말 씨는 “오늘 집회와 행진은 이집트인 정치 난민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한국에 살고 있는 모든 난민들의 권리 보장과 법적·인도적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자리”라며 발언을 시작했다.
“저희는 이집트 출신의 정치 활동가들입니다.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엘시시 정권을 거부하면서 싸웠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정치적 박해, 체포, 고문, 군사 재판, 강제 구금 등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말로 많은 동료들이 끔찍한 탄압을 피해 목숨을 걸고 이집트를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탈출에 실패했습니다. 탈출하지 못한 동료들의 상당수는 살해되거나 구금됐습니다. 지금도 6만 명이 넘는 정치 활동가들이 엘시시 정권의 감옥에서 천천히 죽어 가고 있습니다.
“운 좋게 소수만이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했고, 이 자리에 서 있는 저희는 그 일부입니다.”
카말 씨는 한국에 왔지만 한국 정부의 “고의적 지연, 비인도적 처우, 신분증 회수, 강제 출국 위협, 제출 증거 무시” 속에서 8년이 흘렀다며 난민 신청자의 위태로운 삶을 토로했다.
“저희는 일을 할 수도, 치료받을 수도, 기본적 생활을 보장받을 수도 없는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저희는 지금 거대한 감옥 같은 삶 속에 갇혀 있습니다.”
카말 씨는 한국인들의 지지와 연대를 호소했다.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 낸 한국 시민들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불의를 외면하지 않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날 집회에는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학교를 다니는 이집트인 난민 자녀들도 많이 참가했다.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이집트인 난민 후르 양은 연단에 서서 가족의 처지를 말했다.
“아버지가 이집트로 돌아가면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모든 증거를 제출하셨지만,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한국이 법과 정의의 나라라고 배웠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정의가 적용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후르 양은 당차게 얘기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난민 지위를 얻을 때까지 계속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를 목소리 없는 사람처럼 대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밖으로 나와 목소리를 높일 것입니다.”
“동지”
최규진 인의협 인권위원장은 난민들이 겪는 의료적 어려움을 얘기했다.
“난민 신청자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 분들은 아파도 병원에 못 갑니다. 그렇게 참고 참다 죽을 지경이 돼서야 도움을 청합니다.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앓고 있는데도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8년 동안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암으로 발전해 죽음을 앞두고 있는 분이 실제로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받은 고통보다 한국에서 받은 고통이 더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미등록 이주민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는 초등학교 교사 서지애 씨는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난민 아이들이 “미래를 설계하기도 힘든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다”며 “난민 아이들이 하루빨리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안정적인 양육과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대학생 강혜령 씨는 이집트인 정치 난민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이재명 정부를 규탄했다.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은 이집트 독재자 엘시시와 통화하며 교류와 협력을 약속했습니다. 독재자 엘시시에 맞서 싸우다 한국에 망명해 온 난민들은 이렇게 내팽개쳐 두고 말입니다.”
강혜령 씨는 어려운 처지에도 투쟁하는 이집트인 난민들에 연대의 인사를 했다.
“이집트인 동지들의 난민 인정 투쟁은 한국의 여러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영감과 자신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정의를 실현하는 그날까지 동지들의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
참가자들은 집회 후 종로와 인사동거리를 행진했다. 난민 어린이들도 씩씩하게 행진에 나섰고, 확성기를 잡고 구호를 선창하는 어린이도 있었다.
행진은 많은 관심과 응원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시선과 카메라가 집중됐다.
“Refugees are welcome here”(난민들을 환영한다) 세계적으로 난민 연대 집회에서 많이 외치는 영어 구호를 듣고 다가와 박수를 치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 일부는 행진에 합류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신기해 하는 표정으로 행진을 지켜봤다. 따뜻한 미소를 띠고 바라보는 한국인들도 많았다.
조계사 앞에서 행진을 구경하던 한국인 중년 여성 두 명은 “난민들 얼마나 힘들까”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행진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중년 남성도 있었다. 인사동거리에서 한 젊은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이집트에서 한국으로 피난 온 분들이래” 하고 설명했다.
행진을 성공적으로 마친 난민들과 참가자들은 환한 표정으로 함께 기념 사진을 찍으며 집회를 마무리했다.
이집트인 난민들은 행동을 계속 이어 가겠다고 밝혔다. “저희가 계속해서 이어 갈 행동에 연대와 지지를 보내 주십시오. 정의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끈질기게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한 이집트인 정치 난민들은 난민들이 그저 불쌍한 사람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투쟁에 나설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난민들의 투쟁에 연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