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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 성소수자 운동의 간단한 역사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지난 한 달 새 미국에서는 워싱턴DC, 시카고,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미니애나폴리스 등에서 성소수자들 자신이 자긍심 행진에 항의하는 행동을 벌였다. 이들은 대체로 주최 측이 제복 경찰 참가를 허용한 것이 흑인 등 유색인 성소수자들을 위축시킨다는 것과, 수많은 성소수자 등 가난한 이들을 궁지로 내모는 각종 은행과 대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행사가 치러지는 것에 항의했고 논쟁을 촉발했다. (관련 기사: ‘미국 성소수자들이 자긍심 행진을 막아서다, 왜?’(213호))

이를 두고 미국의 한 트랜스젠더는 언론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올해의 ‘자긍심’은 무척 개인적인 동시에 매우 정치적이다.” 성소수자 운동 내에서 자긍심 행진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있어 왔다. 그 비판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면서 직접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금 논쟁을 낳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항의 행동에 나선 성소수자들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성소수자들이 처한 현실이 날카롭게 나뉘는데 기존 행사가 백인이나 유복한 성소수자들만 대변한다고 일갈한다. 흑인들이 경찰에게 살해당할 확률이 백인보다 7배나 높은 미국 사회에서 흑인 성소수자의 지위는 백인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흑인 남성 동성애자는 백인 남성 동성애자보다 평균적으로 섹스 파트너가 적고 안전한 섹스를 하는 비율이 높은데도 에이즈에 걸릴 확률은 더 높다. 미국의 값비싼 의료 서비스를 흑인들은 잘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유색인 성소수자와 트랜스젠더들은 “자긍심 행진은 축제가 아니라 반란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외친다.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대사관과 다국적 기업들의 지원을 받으며 그들이 성소수자들의 친구인 양 치켜세우는 한국의 일부 성소수자 단체들도 새겨 들어야 할 내용이다.

스톤월 항쟁: 급진적 성소수자 운동이 등장하다

1969년 6월 28일, 뉴욕의 한 술집 ‘스톤월 인’에서 성소수자들이 돌과 술병을 던지면서 싸워 단속 경찰을 물리쳤다. 경찰은 이날의 굴욕적 퇴각을 만회하려고 매일 밤 거듭 했지만 성소수자들은 6일 동안 충돌을 벌이며 스톤월을 지켜 냈다. 그만큼 성소수자 억압에 대한 분노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스톤월 항쟁이 역사적 사건인 것은 단지 경찰과 대차게 싸워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기존 성소수자 운동과 급진적으로 단절하는 새로운 성소수자 운동이 시작됐다.

이전까지 미국의 주요 동성애 단체들은 자신들이 성소수자라는 것을 드러내길 최대한 삼갔다. 그들은 성소수자들더러 “삐딱함을 드러내지 말고” “사회에 순응할 것”을 주되게 촉구했고, 심지어 동성애는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라는 생각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매터신 협회’, ‘빌리티스의 딸들’처럼 단체 명칭만 들어서는 그것이 성소수자 단체라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반면, 스톤월 항쟁은 그 당시 미국 사회를 뒤흔들던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다른 운동들을 훨씬 더 닮아 있었다. 당시의 세계적인 급진화 물결 속에서 베트남전 반대 운동과 공민권 등을 요구하는 흑인 운동이 미국을 뒤흔들고 있었다.

특히 주요 도시들의 흑인 빈민 지구에서는 수년 전부터 반란이 거듭 벌어졌고, 경찰과 주방위군이 수십 명을 사살해야만 진압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로 벌어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처럼 격렬한 저항을 배경으로 반(反)자본주의를 내건 흑표범당 같은 급진적 세력이, 지배자들에 청원하는 방식의 운동을 이끄는 중간계급 지도부(마틴 루터 킹이 대표적 인물이다)의 영향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었다.

단속을 피하려고 경찰과 마피아의 뒷거래로 운영되던 스톤월도 고급스런 술집과 거리가 멀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다른 곳에 가기엔 너무 어리거나, 너무 가난하거나 아무튼 너무 ‘심한’” 사람들이었고, 스톤월은 뒷골목 청년들, 흑인, 히스패닉, 백인 LGBT+가 모이는 곳이었다.

스톤월에서 연일 경찰과 충돌을 벌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흑표범 당원, 좌파, 사회주의자, 급진적 푸에르토리코인 등이 함께 싸우려고 모였다. 반면 매터신 협회는 경찰 충돌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내고 스톤월에서의 충돌과 거리를 뒀다.

스톤월 항쟁 이후 출현한 성소수자 운동이 다른 급진적 운동들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스톤월 항쟁에 고무돼 성소수자들이 만든 조직의 이름은 ‘동성애자해방전선’이었는데, 베트남에서 미군에 맞서 싸우던 ‘베트남해방전선’의 명칭을 본뜬 것이었다. 당시 그들이 외친 “게이 파워!”라는 구호는 앞서 흑인 운동 내 급진적 세력이 외친 “블랙 파워!”를 따라 한 것이었다.

동성애자해방전선(GLF)은 동성애 억압이 자본주의 자체에서 생겨난다고 봤고, 핵가족 제도와 전통적인 성 역할에 도전했다. 또한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모든 사람들의 해방은 일체의 억압이 사라진 사회를 건설하는 것, 곧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봤다.

이처럼 “게이 혁명”을 요구하는 운동은, 기성 사회에게 자신들을 포용해 달라고 청원하던 이전까지의 단체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다.” 스톤월 항쟁 이후 등장한 운동과 기성 성소수자 운동 사이에는 그만큼 큰 단절이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운동은 당시 시대상과 맞물리며 스톤월 일대뿐 아니라 전국적 반향을 낳았다. 미국의 저명한 성소수자 역사가인 존 데밀리오는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톤월 소식을 몇 달 뒤에나 알게 됐지만) 내가 그 사건에 푹 빠지게 된 것은 그때 내가 대학생 반전 활동가였기 때문이다. … 만약 내가 시위와 운동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시대에 살지 않았더라면 스톤월은 그저 하나의 사건에 그쳤을 것이다.”

자긍심 행진은 바로 이 급진적 성소수자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시작한 것이다. 스톤월 항쟁 1년 뒤 동성애자와 트렌스젠더들이 여전히 경찰의 해코지와 국가 기구의 비난에 맞서 투쟁 중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몹시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행진을 조직한 것이 자긍심 행진의 기원이다.

당시의 운동은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절반이 넘는 주들에서 반(反)동성애법을 폐지했고, 공공부문에 남성과 여성 동성애자 채용을 금지한 조항을 폐지했고, 수십 개 도시에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됐다. 미정신의학회(APA)가 정신질환 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하도록 한 것도 커다란 성과였다.

부유한 백인 성소수자 중심으로 운동이 보수화하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면 성소수자 운동은 이미 사뭇 달라져 있었다. 성소수자와 그 지지자들을 겨냥해 상품을 파는 ‘핑크 경제’가 크게 성장했다. 성소수자 운동에서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보다 소득이 더 많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제기됐고 관련 마케팅 보고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더 세심한 통계 연구자들은 성소수자들이 오히려 미국인 평균보다 소득이 적다고 반박했지만 쉽게 무시됐다. 자긍심 행진은 상업화됐다.

무엇보다 “스톤월 항쟁의 향수를 잊어야만 동성애자 권익신장 운동이 전진할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우파 이데올로그들이 부상했다. 이들은 성소수자 운동이 다른 사회 운동과 연계를 맺으며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재앙적”이라고 주장했다. 마거릿 대처의 열렬한 지지자인 미국 유력 언론인 앤드류 설리번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흑인은 대대로 차별받지만 동성애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성애자들 사이에서 태어나고 정체성을 숨긴 채 이 사회의 상류층(기업 이사회, 정부, 언론, 군대, 법조계 등)에 이미 많이 진출해 있다. 우리가 손잡아야 할 사람들은 [다른 억압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다.’ (‘동성애의 정치학’, 《뉴리퍼블릭》 1993년 5월 11일자)

또한 그는 사회를 바꾸려 드는 것은 불필요하게 이성애자들의 반발만 불러일으킨다며 사회 변화의 극대화가 아니라 극소화를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스톤월 직후의 급진적 운동처럼 군대와 결혼 제도 자체를 급진적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그 제도들을 그대로 두거나 더 강화하는 데 동성애자들이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국가는 중립적이므로 그들에게 동성애자를 인정하라고 요구해야지, 사회적·경제적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괜히 역풍만 일으킨다. 민간 영역에서의 변화는 요구하지 말고 국가의 변화가 시민사회로 확산되길 기다려야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성소수자는 ‘민간 영역으로의 확산’을 천천히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유복하거나 여유롭지 못하고, 그들이 성소수자로서 겪는 차별은 다른 수많은 차별(계급차별, 여성차별, 인종차별 등)과 맞물려 나타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런 보수적 노선은 경제적·사회적 여유가 있는 상층 중간계급 또는 지배계급 동성애자만을 염두에 둔 것이다.

스톤월 항쟁 이후 부상했던 급진적 성소수자 운동이 불행히도 쇠퇴하면서 이처럼 보수적인 경향이 영향력을 키워 왔다. 오늘날 노동계급에 속하는 많은 성소수자들이 자긍심 행진이나 주류 성소수자 운동을 두고 “우리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데는 바로 이런 맥락이 있는 것이고, 그런 비판은 완전히 정당하다.

왜 보수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됐는가

스톤월 이후 부상했던 급진적 성소수자 운동이 이처럼 보수적 경향에 밀려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무엇보다, 스톤월 항쟁의 배경이 된 사회 운동과 급진화 흐름이 1970년대에 들어 퇴조한 것이 컸다.

반전 운동은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굴욕적 패배로 끝나자 사그라들었다. 흑인 운동은 그 지도자들이 혹독한 탄압 때문에 살해·투옥되거나, 정부와 기업이 열어 준 중간계급 일자리로 진출하면서 전투성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반전 운동이 베트남전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필연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반전 운동은 더 커다란 변화 염원을 대변했다. 흑인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끔찍했을 뿐 아니라 1970년대 초 경제 위기가 닥치자 더 나빠졌다.

이런 결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급진성을 더 지속적으로 이어 갈 수 있고 체제를 뒤흔들 잠재력을 가진 노동계급 속에 뿌리를 내린 채 다음번 투쟁의 고양기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 미국의 많은 활동가들은 ‘노동계급이 체제에 포섭됐다’는 잘못된 견해를 받아들여서, 효과적으로 관계를 맺지 못했다.

결국, “1968년 사건으로 일어난 운동들은 반란의 물결이 퇴조하자 해변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많은 운동이 시들어 말라 죽었고 남은 것들은 사회의 주류에서 차단된 채 작은 물웅덩이에서만 살아남았다.” (크리스 하먼, 《세계를 뒤흔든 1968》)

스톤월 항쟁 직후의 급진적 성소수자 운동은 성소수자 쟁점만 놓고 싸우지 않았다. 동성애자해방전선은 투옥된 흑표범당 지도자를 옹호하는 주장을 했고 흑표범당 행사에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했다. 동성애자 대표단은 반전 시위에 참가했고, 레즈비언들은 여성해방운동에 참가했다.

그러나 당시의 다른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계급 분석에 기초한 정치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었다. 당시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동성애를 ‘부르주아적 일탈’로 치부한 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점차 성소수자 운동에서도 각각의 피억압 집단이 저마다 독자적으로 사회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됐다. 그러나 성소수자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성적 지향을 긍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을 운동의 원리로 격상하면 각자가 겪는 억압의 특수성, 즉 차이점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게 되면서 단결이 어려워지는 문제가 생긴다.

그 결과, 각자 겪는 억압에 따라 조직과 운동을 분리하려는 경향이 갈수록 커졌고, 운동이 퇴조하자 실제로 분열을 겪었다. 성차별적 언행에 대한 반발로 여성 동성애자들이 남성 동성애자들과 갈라서고, 뒤이어 남성 동성애자들이 여장 남자와 ‘사내다운 자들’로 분열했다. 여성 동성애자들은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남성과 섹스를 거부해야 진정으로 급진적이라는 주장)를 수용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분열하는 식이었다.

비록 초기의 급진적 경향은 퇴조했지만 그 뒤에도 성소수자들은 계속 투쟁했다. 단적으로 1980년대 들어 정부가 수수방관하는 가운데 에이즈가 창궐해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우익들은 에이즈를 ‘게이 돌림병’이라며 반격에 나섰다. 이에 대응해 성소수자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액트업은 전쟁이 아니라 치료약 개발에 돈을 쓰고 약값을 인하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정부와 제약회사에 맞서 눈부신 투쟁을 벌였고 귀중한 성과도 거뒀다.

그러나 미국의 취약한 계급 투쟁과 성소수자 운동 내 정치적 약점은 계속됐다. 성소수자 운동 주류는 기존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의 일부로 편입되고자 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은 생산을 마비시킬 힘을 갖게 되는 것과 달리 억압은 피해자라는 그 자체만으로 사회를 바꿀 힘이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들의 후원을 얻어 내고 정치권 로비를 사회 변화의 수단으로 택하는 경향이 늘면서 미국 성소수자 운동의 주류는 체제로 더 흡수됐다.

동성결혼 합법화와 그 이후

2003년 매사추세츠 주 대법원이 주 차원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면서 첫 균열이 생겼다. 이후 수년에 걸쳐 미국 각 주에서 동성결혼 합법 판결이 내려지지만 곧바로 이를 무효화하는 법이 생기거나,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선제적으로 발표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성소수자와 그 지지자들은 이를 보며 고무되기도 하고 또 분노하기도 하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009년 워싱턴DC에는 동성결혼 합법화를 요구하며 25만 명이 행진했는데 15년 만에 최대 규모였다. 그러나 미국의 가장 큰 성소수자 단체이자 로비단체인 인권캠페인(HRC) 등 주류 성소수자 단체들은 이 행진 조직에 반대하다가 더는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뒤에야 함께했다.

성 일반에 대해 개방적 태도가 커지고, 결혼에 관한 전통적 생각들이 변하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또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커밍아웃을 했다. 그 결과, 1996년 동성결혼을 지지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27퍼센트에 불과했지만 2014년에는 55퍼센트로 크게 늘었다. 2008년 대선에서 동성결혼에 반대했던 오바마는 이런 변화를 보며 2012년 5월에야 동성결혼 지지 입장으로 돌아섰다. 연말의 재선을 앞두고 득표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변화된 대중의 정서와 아래로부터 운동의 압력에 직면해 미국 지배계급 내 일부는 양보하기를 택했다. 2015년 동성 결혼은 전국적으로 합법화됐다.

동성결혼 합법화는 분명한 전진이다. 비록 결혼에 대한 생각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결혼할 의사가 있고 그중에는 일부 성소수자들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화당 같은 우파들이 당론으로 법원 판결을 비판하며 동성결혼 합법화를 뒤집으려는 것에 맞서 단호하게 싸워야 한다.

동시에, 지배자들이 동성결혼 합법화가 가족 제도를 그다지 위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과 미국 제국주의가 중동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할 때 성소수자 쟁점을 활용할 수 있겠다는 점을 고려한 정황도 봐야 한다.

따라서 동성결혼 합법화가 주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더 큰 사회 변화를 요구하고 운동을 한층 더 급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평범한 성소수자들은 동성결혼을 인정받는 것 외에도 수많은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당장 트럼프는 올해 성소수자 차별을 금지하도록 한 행정명령 일부와 트랜스젠더 학생들의 학교 내 화장실 권리 보호 지침을 폐기했다.

흑인들에 대한 공식적인 법률적·제도적 차별은 사라진 지 수십 년이 지났고 심지어 흑인 대통령까지 배출했지만 평범한 흑인들은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 각종 차별을 낳는 것은 특정 국가 정책이나 제도가 아니라 바로 노동자들을 분열시켜야만 착취에 유리하다는 자본주의 동역학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한 이후 미국에서 자긍심 행진과 주류 성소수자 운동의 상업화, 친제국주의화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아지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스톤월 항쟁 직후의 급진성을 되찾는 것만이 소수의 유복한 성소수자뿐 아니라 모든 성소수자들을 위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주장해야 한다. 또한 과거 급진적 성소수자 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단결하자는 정치적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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