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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가족,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어린이집 휴원 등 공공서비스 중단의 후폭풍은 노동계급 여성들의 부담과 고통을 가중시킨다. ⓒ이미진

“집 밖에 나오지 말고 생명을 살려라.” 이 지침의 의미는 명백하다. 가만히 있는 것이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을 막는 핵심 전략이라는 것이다.

물건을 사러 가거나 운동하러 나가는 것을 제외하면 대다수 사람들에게 가만히 머물 곳은 집뿐일 것이다.

외출 제한령 하에서의 삶은 흔히 잠옷 바람으로 화상회의를 하거나 오랫동안 미뤄왔던 취미 활동을 하는 일상적인 휴일처럼 제시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외출 제한령이 내리면 부자들은 집 앞까지 배달되는 유기농 채소를 주문하고 유급 간병인을 불러 몸이 약한 친척들을 확인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압도 다수 사람들은 서로를 돌보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적인 작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위기에서 생생하게 확인하고 있다.

또, 노동계급 여성들은 이 어려운 상황에 뛰어들어 평소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여성단체 ‘곤경에 처한 임산부들’(Pregnant Then Screwed)의 설립자 조엘리 브리얼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위기를 버티기 위해 [희생된 것은] 무보수 노동을 떠안은 여성들이었다.

“기업들은 직원들에게 재택 근무를 하라고 하지만, 아이가 있는 여성들에게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임신한 여성들을 아무런 절차 없이 해고하고, 그렇지 않은 임산부에게는 일터로 나와 일할 것을 강요했다.”

이스트런던 지역 중등학교 교사인 폴린은 외출 제한령 때문에 “삶이 엄청나게 바뀌었다”고 말했다.

“결국 하루에 교대근무를 두 번 뛰는 꼴이 됐습니다. 낮에는 두 아이를 가르치고 오후 8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직장 일을 합니다.

“부모에게는 정말 힘겨운 상황입니다. 모든 부모들은 자녀들을 집에서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경력 교사인 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에요.”

(정보·통신 분야에서 일하는 제 남편은) 재택 근무를 하지만 회사는 근무 시간 단축을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어요.”

“누가 양육을 떠맡을지를 전적으로 회사가 결정하는 것은 옳지 못해요. 한부모 가정은 어떻게 견디는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모르겠어요.”

운영을 멈춘 것은 학교만이 아니다. 도서관, 어린이집, 급식소, 엄마 모임, 방과후 활동, 청소년 클럽 등이 모두 운영을 멈췄다.

지난 10년 간 긴축 때문에 누더기가 된 공공서비스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더한층 쪼들리고 있다.

위기가 오자 공공서비스 중단의 후폭풍은 부모들에게 떠맡겨졌다.

개인이 받는 스트레스가 극심하다. 코로나19 때문에 부모들은 양육을 전적으로 짊어져야 한다는 압박감을 점점 더 크게 느낄 것이다.

부모가 무한정 보살핌과 관심을 베풀 수 있을 것이라는 시각은 거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양육이 가족 단위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가족은 계급 사회가 굴러가게 하는 데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일상적으로 사회에 필요한 돌봄 대부분은 여성이 무보수로 수행한다.

여기에는 대부분 자녀 양육이 포함된다. 나이든 친척 등 다른 가족을 돌보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상황은 남성과 여성의 타고난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가 조직된 방식의 산물이다. 예컨대 육아휴직 관련법에 따른 휴직 기간은 여성에게 더 많이 주어진다. 그래서 처음부터 여성이 양육을 더 많이 맡는 것이 합리적이게 된다.

영유아 양육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여성을 집에 머물게 하여 아이를 돌보게 하는 것이 전일제 일자리로 복귀시키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타당해진다.

압박감

자녀가 학교에 입학해도 — 학교는 국가가 양육에 기여하는 몇 안 되는 요소의 하나다 — 보호자들은 학기 중이 아닐 때, 잘 때, 하교하는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 아이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여성은 육아휴직 이후에 복직해도(대부분 여성들이 그럴 것이다) 시간제 일자리나 저임금 일자리에서 일할 가능성이 더 높다.

집 밖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현재 집에 있는 자녀를 교육할지 직장에 나갈지 선택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임금이 적고 고용이 불안정한 일자리를 벗어나기 어려운 노동계급 여성들은 자가 격리 같은 조처에 훨씬 큰 타격을 받는다.

영국노총(TUC)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 약 140만 명이 주급 118파운드[약 17만 7000원] 이하를 버는데 이는 법정 최저 병가 수당에도 못 미치는 액수이다.

동일임금법이 시행된 지 40년이 넘었지만 동일 노동에 대한 성별 임금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통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성단체 ‘포셋 소사이어티’에 따르면 2019년에 성별 간 임금 격차는 전일제 노동자의 경우 18.4퍼센트였으며, 시간제 노동자의 경우 그 격차는 최대 13.7퍼센트로 벌어졌다.

가장 최근에는 2018년에 여성이 대부분인 글래스고시(市) 공무직 노동자 수천 명이 동일 임금을 요구하며 이틀 간 파업을 벌여 승리했다. 이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체계적인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이처럼 여성의 임금이 더 적은 이유 하나는 가족을 위해 요리하고 돌보고 청소하는 것이 여성의 “자연스런” 구실로 여겨지는 데에 있다.

여성이 누군가를 보살피는 본성을 타고난다는 시각은 지배계급에게서 나온 것이다. 때로는 몇몇 페미니스트들도 그런 시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남성이 폭력적이거나 대담한 기질을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생물학적으로 누군가를 돌보는 존재로 태어나지 않는다.

이런 고정관념은 체제가 여성의 가사노동에 의존하게 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위기로 여성들의 양육과 가사 부담이 더 커진 동시에, 여성들이 집 밖에서 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모순이 벌어진다.

국민보건서비스(NHS) 인력의 약 77퍼센트가 여성이다. 소매업 노동자의 약 3분의 2도 여성이고 청소 노동자 대다수도 여성이다.

이는 코로나19 위기 시기에 매우 중요한 일들이다.

정부는 여성이 그런 일자리에서 이탈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여성들이 근무 시간을 더 늘리기를 바란다. 정부는 사실상 여성들이 계속 일터에서 일하면서 가정에서도 더 많은 부담을 지라고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가정에서 똑같이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부유한 여성들은 노동계급 여성을 고용해 요리나 청소, 양육을 맡길 수 있다.

이런 불균등은 코로나19 대유행이 지속되는 동안 더 심해질 것이다.

비좁은 단칸방에서의 외출 제한과 호화로운 별채에서의 외출 제한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을 것이다.

외출 제한이 뜻하는 바는 자녀가 컴퓨터를 쓸 수 있는지, 심지어는 뭔가를 대고 쓸 책상이 있는지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대형 매장에서 일하는 ‘0시간 계약’[호출 노동] 여성 노동자의 경험과 집에서 안락하게 업무를 보며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를 강 건너 불보듯 구경하는 여성 CEO의 경험은 천양지차일 것이다.

불안정

가족은 애정과 도움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학대와 폭력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부분 여성과 아이인 가정 폭력 희생자들이 외출 제한령 하에서 겪는 경험은 공포로 얼룩져 있을 것이다.

가정 폭력 상담·구호 단체 “쉼터”(Refuge)는 가정폭력 상담 건수가 외출 제한령 발령 첫 주 동안 65퍼센트 늘었다고 밝혔다.

이번 위기 동안 사람들은 엄청난 불확실성과 긴장 속에서 살 것이다.

게다가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의 도움도 없고 국가의 지원도 거의 받지 못한 채 고립되어 사는 경험을 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은 우리가 들어 왔던 것과 같은 안식처가 아니게 될 수 있다.

가정은 일상적 스트레스와 긴장에서 벗어나는 피난처이기는커녕 그런 압박감이 표출되는 곳이 될 수 있다.

자기 삶이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가혹하게 대하기 쉽다.

게다가 가정 폭력은 마치 가족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개인 문제처럼 취급된다.

긴장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은 가정을 그저 긴장만 가득한 곳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냉혹한 세상에서 우리는 애정과 도움, 유대를 가정에서 경험할 때가 종종 있다.

그렇다 해도, 완벽하고 행복한 가정이라는 이상은 사회 꼭대기로부터 강요되는 것이다.

가족이 다음 세대 노동자를 배출하는 핵심 제도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에게 거의 아무 비용도 물리지 않은 채 부모에게 자녀 양육을 맡기는 것이 사장들과 정부의 이해관계에 부합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아이들이 적당한 교육과 보건, 사회화를 통해 생산적인 노동자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자녀를 어머니 품에서 빼앗는 것을 해법으로 여긴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진정한 해법은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무보수로 수행되는 노동을 집단적·사회적 영역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육아는 전체 사회, 남성과 여성 모두의 문제여야 한다. 요리나 빨래 같은 가사노동은 집단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그러면 여성들이 아무런 인정과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가정에 수십 년을 바쳐야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덜 중요한 일로 취급되고 보수도 형편없던 소위 “여성의 일”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일로 대접받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판에 박힌 ‘핵가족’보다 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를 쟁취하려면 노동계급 여성의 돌봄과 보살핌에 의지해 사회를 유지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고 우리 스스로를 위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