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미국 대선이 좌파에게 보여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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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는 승패와 무관하게 미국 정치를 뒤엎어 버렸다. 트럼프의 2016년 대선 승리를 두고 전 세계의 자유주의 논평가들은 트럼프가 러시아의 개입 덕분에 선거를 훔쳐 갈 수 있었다고 폄하했다.
2020년 대선은 그런 탈선을 바로잡을 완벽한 기회였다. 몇 주 동안 (타리크 알리가 “극단적 중도”로 일컬은) 신자유주의적 주류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후보, 즉 따분한 민주당 수뇌부 정치인인 조 바이든의 “압승”을 확신했다. 이들은 민주당이 공화당에게서 상원까지 빼앗아 오고 우익 판사로 연방 법원을 채우는 것을 중단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11월 3일 밤에서 4일 아침으로 넘어가는 몇 시간 만에 그런 희망은 날아가 버렸다. 트럼프는 유권자들을 인종, 일자리 문제, “법질서 확립”으로 집요하게 양극화시키는 전략으로 대중적 지지 기반을 다지고 심지어 확대할 수 있었다. 트럼프는 라틴계 유권자들에게서도 적잖은 지지를 얻어 바이든이 플로리다주와 텍사스주를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공화당
이것이 트럼프를 재선시키기에는 모자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화당은 하원에서 민주당과 격차를 좁혔고, 상원에서 다수석을 지키고 주의회와 주정부에서 세를 굳힐 듯하다. 친민주당 성향 자유주의 경제학자이자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은 이렇게 한탄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선거인가. … 바이든이 통치를 할 수 있을까? … 바이든은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을 상대해야 할 것이고 연방대법원도 자신에게 불리하게 짜여질 것이다. 공화당은 바이든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무자비하게 훼방 놓을 것이 확실하다. … 갈수록 미국은 실패한 국가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공화당을 바꿔 놓았다. 〈뉴욕 타임스〉는 이를 마지못해 시인했다. “트럼프가 2021년 1월 20일[대통령 취임일]에 백악관에서 방을 빼게 되더라도, 트럼프는 예상보다 훨씬 더 질긴 사람임이 드러날 것이고, 이후에도 분명 미국인들의 삶에 강력하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트럼프는 적어도 6800만 표를 득표했다. 2016년 대선 때보다 500만 표 늘어난 것이다. 전체의 48퍼센트를 득표한 것이고 미국 대중 거의 절반의 지지를 모아낸 것이다. 추문과 온갖 난관, 탄핵, 23만 3000명 이상을 사망케 한 끔찍한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점철된 4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파이낸셜 타임스〉 컬럼니스트 에드워드 루스는 이렇게 썼다. “한동안 공화당은 트럼프주의적 정당일 것이다. 2024년 대선 출마를 노리는 미주리주(州) 상원의원 조쉬 홀리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공화당은 이제 노동계급 정당이다. 그것이 [공화당의] 미래다.’”
물론 공화당이 “노동계급 정당”이라는 것은 헛소리다. 보호무역주의와 양극화를 부추기는 트럼프의 언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서 득을 봐 온 대형 은행들과 다국적 기업들을 멀어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트럼프의 계급 기반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마이크 데이비스가 말한 “양아치 억만장자”(아웃사이더인 슈퍼 부자들)와 미국 소도시의 유산 계급들이다.
불만
트럼프는 자신의 유명세와 아웃사이더 지위를 이용해 대개는 백인인 사람들의 불만에 호소했다. 이들은 자신이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실패자가 됐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트럼프의 전략은 이번 대선에서도 먹혔다.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유권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쟁점은 민주당의 바람과 달리 코로나19 팬데믹이 아니라 경제였다.
바이든은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그랬던 것처럼 ‘연속성’을 상징하는 후보였다. 민주당은 힐러리와 빌 클린턴이 1990년대에 고안하고 버락 오바마가 이어 간 전략을 고수했다. 그 전략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효율적으로, 그러나 좀더 ‘인도적’인 것처럼 운영하는 것이었다. 버니 샌더스가 왼쪽에서 제기한 도전은 분쇄됐다.
2016년에 벌어진 두 충격적 사건, 즉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트럼프 당선과 마찬가지로 2020년 미국 대선은 1980년대에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구축한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헤게모니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또다시 보여 줬다. 2007~2009년 전 세계 금융 위기와 그 후폭풍 동안 그 헤게모니는 불만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했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당시 평범한 사람들이 일자리와 집을 잃고, 소득이 줄고, 공공 복지가 삭감되면서 거대한 분노가 고였다. 존슨의 브렉시트 추구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트럼프와 공화당의 성공은 정치 체제를 대자본의 이해관계에서 어긋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파탄난 국가”를 언급하는 크루그먼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바이다. 물론 그 두려움은 과장일 수 있다.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든 미국 제국주의는 중국의 부상을 억누르려 할 것이고, 군사·금융에서 미국이 가진 힘을 전 세계에서 뽐낼 것이다.
이득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이런 헤게모니 위기의 주된 수혜자는 극우였다. 그러나 물론 급진 좌파가 배워야 할 교훈도 있다. 키어 스타머가 이끄는 영국 노동당은 극단적 중도로 급격히 회귀했다. 즉,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하 신노동당 정치로 돌아갔다. 제러미 코빈의 당원 자격을 정지시킨 패악질이 그런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바이든의 선거 운동은 극단적 중도의 리틀빅혼 전투*일 뿐이다. 바이든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이는 공허한 승리일 뿐일 것이다. 민주당 안에서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로 대표되는 좌파적 여성 하원의원들 “스쿼드[분대]”가 재선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루스는 이렇게 경고한다. “바이든 정권은 단단히 또아리를 튼 트럼프주의 우파와 분노에 찬 민주당 좌파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세력 사이에 끼일 위험이 있다.”
스타머는 이런 난관에서 배울 능력이 없다. 하지만 노동당 좌파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노동당이 코빈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 그리고 이에 반발하면 누구든 징계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 보면 노동당 내 사회주의자들은 블레어 하에서 누렸던 만큼의 선전·선동의 여지도 얻지 못할 것이다.
“당의 단결”(사실은 생존)이라는 미명 하에 침묵할 것인가? 그러면 코빈 지도부 하의 노동당에 입당한 수십만 당원들을 배신하는 일일 것이다. 아니면 반항을 택할 것인가? 그러면 축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과거 노동당 좌파들은 이런 딜레마를 피할 수 있었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거대한 대중 운동이 보호막이 돼 줬기 때문이다. 지금 노동당 좌파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노동당 좌파는 노동당에서 우격다짐으로 재확립되고 있는 파산한 극단적 중도 정치와 결별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정당은 코빈 시절 노동당뿐 아니라 그리스의 시리자나 스페인의 포데모스 같은 최근 유럽의 “새로운 좌파” 정당들에서도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 “새로운 좌파” 정당들은 선거 승리를 우선시했고 결국 신자유주의 정치를 제 손으로 펼치게 됐다.
당 대표 시절 코빈은 노동당의 결속을 유지하고 선거에서 승리하려고 노동당 우파에 거듭 타협했다. 마찬가지로 상당수 미국 좌파들는 실속 없는 선거운동을 지지하며 트럼프를 꺾고 의회를 통해 개혁을 성취한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이는 공화당이 상원을 계속해서 장악하게 되면서 가망 없는 일이 돼 버렸다.
새로운 사회주의 정당은 선거 승리보다 투쟁 건설을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노동계급의 물적 조건을 개선하고 인종차별에 맞서는 대중 투쟁만이 극우의 부상을 저지하고 극우를 패퇴시킬 수 있다. 이는 미국, 영국뿐 아니라 유럽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광범한 좌파 내에는 더 탄탄히 조직된 혁명적 축이 있어야 한다. 미국과 영국에서 극우가 거둔 성공은 선거 승리로 사회를 바꾼다는 신기루를 좇는 개혁주의 정당의 한계를 드러냈다.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같은 정당을 영국과 다른 모든 곳에서 건설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투쟁만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그것들로 유지되는 모든 차별과 억압을 끝장낼 수 있음을 이해하는 당 말이다. 혁명적 조직에 가입하는 것은 좌파를 재건하는 데에서 중요한 첫걸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