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클리프,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출간 75년:
마르크스주의의 노동계급 자력해방 원칙을 수호하다
〈노동자 연대〉 구독
토니 클리프는 75년 전 이달에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본질〉(초판 제목)을 출간했다. 그 저작 덕분에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이라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스탈린주의의 왜곡에서 지켜낼 수 있었다고 조셉 추나라가 주장한다.
[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동자 연대〉 편집팀이 덧붙인 것이다.
1948년 6월, 무려 142페이지짜리 논문이 당시 영국 트로츠키주의 단체인 혁명적공산당(RCP) 내부 회보에 실렸다.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본질〉이라는 제목의 그 저술은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 이주민이자 당시 31살이던 이가엘 글룩슈타인이 쓴 것이었다.
글룩슈타인은 앞서 팔레스타인에서 소규모 유대계 아랍인 마르크스주의 조직을 만들어서 스탈린주의가 좌파를 주름잡는 현실에 도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을 강제로 내쫓고 수립된 이스라엘 국가의 권력을 꺾기에는 팔레스타인의 작은 노동계급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점차 깨달았다.
글룩슈타인은 해외 이주를 결심했다. 처음에는 이집트를 고려했는데, 그곳의 아랍 노동자 운동이 훨씬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네트워크가 너무 작아서 지하 활동을 뒷받침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차에 글룩슈타인은 영국으로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그의 동지 하니 로젠버그의 아버지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 자그마한 공장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글룩슈타인은 그 공장의 대표 신분으로 1947년 영국 땅을 밟았다.
영국에서 글룩슈타인은 당시에 회원이 400명이나 되는 혁명적공산당에 가입했고, 당원들 사이에서 생각이 깊고 예리한 마르크스주의자로 빠르게 인정받았다.
석 달 후 영국 당국이 그를 찾아내 강제 추방했다. 글룩슈타인은 우여곡절 끝에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트리니티칼리지 학생 신분으로 체류할 수 있었다. 1952년 영국 입국이 허용될 때까지 글룩슈타인은 아일랜드에서 거주했다.
거기서 클리프는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본질〉을 썼다. 글룩슈타인이 각 장의 원고를 바다 건너 영국으로 보내면, 영어와 히브리어가 뒤섞인 그 원고를 한데 모아 단일한 저술로 편집하는 고된 작업을 [이제 글룩슈타인의 배우자가 된] 하니 로젠버그가 맡았다.
글룩슈타인은 이후 필명인 토니 클리프로 더 잘 알려졌다. 당시 그가 쓴 저술(이후 책으로 출판됐다[국역: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책갈피, 2011])을 기초로 《사회주의 평론》 그룹이 결성됐다. 《사회주의 평론》 그룹은 혁명적공산당이 분열하는 과정에서 클리프와 그 동료들이 출당당하면서 만들어졌다.
이후 《사회주의 평론》 그룹은 ‘국제사회주의자들’을 거쳐 [1977년]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됐다. 클리프의 이론은 혁명적공산당 등이 옹호한 트로츠키주의 정설에 도전했다.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가 소련을 장악한 뒤에도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로서 레닌과 함께 엄청난 권위를 누린 인물이다. 러시아 혁명과 그 여파는 사회주의와 해방이 짧게나마 만개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신생 혁명 정부는 고립됐고, 1918년 독일에서 시작된 혁명 운동이 실패하면서 고립이 특히 더 악화됐다. 혁명 후 러시아는 혹독한 내전과 외세의 공격에 시달렸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갓 태어난 사회주의 국가를 분쇄하려 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볼셰비키당은 권력을 지킬 수 있었지만, 노동계급의 대다수가 죽고 경제가 파괴됐다. 이런 변화 탓에 소비에트(혁명을 통해 설립된 노동자 평의회와 병사 평의회) 같은 민주적 조직들이 쇠퇴했다.
원래 볼셰비키는 1917년 혁명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혁명이 확산되도록 하는 데에 집중했다. 혁명이 확산돼서 러시아가 훨씬 더 큰 해외[특히 독일] 노동계급의 지원을 받기를 바랐다.
피의 강물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러시아 국가를 관리하는 관료들은 아직 남아 있던 노동계급과는 분리된 집단을 형성했다. 볼셰비키(이제는 공산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로 신입 당원들이 밀려들어 왔는데, “선임 볼셰비키”와 달리 그들 중에는 사회주의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이 없는 자들이 허다했다.
이처럼 부상하던 국가 관료를 이오시프 스탈린이 지도했다. 1920년대 말 스탈린은 자신의 통치 기반을 굳건히 하며 트로츠키를 추방했고, 이후 [1936~1938년 모스크바재판을 통해] “선임 볼셰비키”를 거의 모두 무참히 살해했다.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도록 한다는 목표 대신에 “일국사회주의”[소련 한 나라에서만도 무계급 사회가 가능하다는 공상]가 채택됐다.
트로츠키는 계속해서 스탈린주의에 맞섰지만, 그의 분석에는 종종 결함이 있었다. 트로츠키는 소련이 “변질”됐지만 여전히 “노동자 국가”라고 봤다.
트로츠키가 그렇게 봤던 이유는 여전히 법적으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고, 공산당의 건강한 인자들이 노동계급과 동맹해서 관료들을 물리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이런 견해는 관료가 당시의 물자 부족 상황을 관리할 필요 때문에 부상했다는 견해와 관계있었다. 그는 관료를 실질적인 사회 기반이 없는 비교적 미약한 세력으로 봤다.
트로츠키는 1940년 스탈린이 보낸 킬러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계승자들은 더 큰 난제와 씨름해야 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동유럽에는 소련과 사회 형태가 비슷하고 소련처럼 관료 엘리트가 지배하는 정치체제가 들어섰다. 그런 정치체제는 노동자 혁명이 아니라 [소련 군대에 의해] 위로부터 세워졌다.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런 정치체제를 두고 “변질된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만약 국경 너머로 군대를 주둔시켜 노동자 국가를 세울 수 있다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말해 온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에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또, ‘노동자 국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경제도 국가도 통제하지 못한다면, 혁명가들이 그런 국가를 위해 투쟁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클리프의 이론은 이런 난제에 돌파구를 냈다. 클리프는 소련과 그 위성국들이 결코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오히려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국가라고 봤다.
소련에서 결정적 변화는 1920년대 말에 일어났다. 스탈린이 지도하는 관료층이 [1928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처음으로 강행했을 때였다.
소련은 집단농장을 통해 농민들을 억압하고, 노동자들을 강압적으로 착취하면서 급속히 산업화됐다. 이제 국가 관료층은 응집력 있는 하나의 계급으로서 행동했다.
산업화는 노동자들의 소비보다 자본 축적이 더 중시되는 것을 수반했고, 이 점에서 서방과 똑같았다. 바로 이를 위해 관료는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다시 말해, 무보수 잉여 노동을 노동자들에게서 뽑아내어 관료의 집단적 목표를 위해 사용했다.
국가 관료가 경제를 관리했고, 이는 마치 여러 부서로 나뉜 하나의 거대한 공장을 운영하는 것과 일견 비슷했다. 그러나 소련 경제는 자본주의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소련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일정한 입지를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열강과의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드는 것을 뜻했다.
국내적으로는 시장 경쟁이 사라졌지만, 국제적 군사 경쟁을 통해 자본주의의 논리가 소련에 관철됐다.
그렇다고 해서 소련 경제가 [형태상으로도] 서방과 똑같았다는 것은 아니다. 클리프는 자신의 저작에서 국가자본주의의 특징적 역학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역학은 착취와 축적이라는 똑같은 주제를 공유하는 변주곡이었을 뿐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사회주의”
냉전 시기에 SWP와 그 전신의 회원들은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라고 불렸는데, 그만큼 국가자본주의론이 핵심적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자본주의론 덕분에 그들은 스탈린주의 체제와 일절 타협하지 않고, 또 노동자 혁명이 아닌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과도 타협하지 않을 수 있었다.
동시에, 소련을 자본주의의 일종으로 봤기 때문에 그들은 소련이 특히 야만적인 사회 형태라는 견해도 거부했고, 그 덕분에 서방 지배계급을 지지하는 함정도 피할 수 있었다.
한때 〈소셜리스트 워커〉 [당 기관지] 제호 옆에 실리던 슬로건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사회주의”는 이런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국가자본주의론은 냉전이 끝났어도 유의미하다. 국가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는 온전히 관료적인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가지 않은 나라들에도 있다.
클리프의 이론은 국가가 자본주의 바깥에 있다거나 자본주의를 대체할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틀렸고, 국가가 자본주의의 본질적 요소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는 사회간접자본을 사영화하지 말고 정부가 운영하라는 요구를 지지할 수 있지만, 국유화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사회주의가 되려면 노동자들이 통제해야 하고, 이는 노동자들의 대중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자본주의 방식이 부분적으로 재도입되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취약해지면서 국가가 체제를 구하기 위해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부상도 영향을 끼쳤는데, 중국에서는 국가가 소유하거나 지도하는 기업들이 계속 핵심적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조 바이든이 이끄는 미국 등 다른 정부들은 국가가 더 분명한 경제적 구실을 하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
영국 노동당의 예비 재무장관 레이철 리브스가 최근 미국을 방문해 바이든을 만난 후 워싱턴에서 했던 연설을 들어 보면, “국가의 능동적 구실”을 통해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겠다는 언급으로 가득하다.
국가를 이용해 영국 자본주의를 강화하겠다는 노동당의 계획에 아무런 환상도 가져서는 안 된다. 또한 중국이 자본주의가 아닌 대안을 보여 준다는 환상 역시 조금도 품어서는 안 된다. 중국은 자본주의 열강,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로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클리프의 이론은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사상, 즉 노동자들의 자체 활동만이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사상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