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본 입장 해설 18: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사회다 ⑴: 형성
〈노동자 연대〉 구독
북한 사회를 두고 남한이나 미국 같은 서방 자본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로 여기는 것이 상식이다. 국유·국영 경제를 사회주의로 여기기 때문이다.
3대 세습이나 공개 처형, ‘한류’ 단속 같은 일들이 보도되며 북한은 오늘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로 묘사되기도 한다.
아래에서 보겠지만 북한은 사회주의와는 아무 관계없는 사회다. 대중의 필요를 우선순위가 아니라 뒷전으로 두는 사회 체제는 남한 및 서방 사회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고 했다. 북한에서는 그런 과정이 없었다. 북한 사회 체제의 기원은 1945년 소련군의 38선 이북 점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2차세계대전의 전리품 분배의 맥락에서, 미국이 남한에서 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도 자국의 사회 체제와 유사한 사회 체제를 북한에서 세우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소련 점령 당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아래로부터의 활동은 모두 억제됐다. 가령 일제 패망 후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를 세우고 기업과 공장들을 자체 운영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이런 자주 관리는 소련군에 의해 중단됐다.
소련이 북한에 친소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지원한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었다. 소련 입장에서는 소련군 대위인 김일성이 조선 국내 공산당 지도자들보다 훨씬 미더웠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증대하면서, 38선 이남과 이북에서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는 추세가 힘을 얻어 갔다. 1946년 북한에서 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됐고, 이듬해 2월에는 ‘임시’ 자도 떼게 됐다.
1946년 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 개혁과 중요 산업 국유화 조처를 단행했다. 이로써 소련과 흡사한 사회·경제 구조가 북한에서 만들어졌다. 이는 노동계급의 자발적 움직임을 억누른 채 그저 위로부터 수행된 개조였다.
농민들은 토지 개혁으로 땅을 소유하게 됐지만, 도시에 대한 안정적 식량 공급을 위해 수확량 중 4분의 1을 현물세로 납부하는 부담을 졌다.
특히, 국유화 조처로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했지만 노동계급이 아니라 관료가 그 국가를 통제했다.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했다.
북한 관료의 우선순위는 처음부터 대중의 필요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북한 관료가 급속한 공업화 등 경제 계획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서 지정학적 경쟁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은 미국과 경쟁하는 소련의 필요에 부응해야 했고, 또한 미국이 보호하는 남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소련 모델을 따라, 국가를 통해 자원을 집중해 급속한 공업화를 이룩하고자 했다.
이처럼, 북한 관료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경제 성장(즉, 자본 축적)의 속도를 높이고자 했다.
이렇게 북한은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국가 주도의 급속한 공업화 전략은 소련과 북한뿐 아니라 20세기 중반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서 두드러진 추세였다.
특히 이제 막 등장한 신생국들(남한도 마찬가지)은 선행 주자들을 따라잡으려고 국가의 강제력을 이용해 산업 발전의 기초를 세워야 했다.
북한에서도 대중의 소비는 자본 축적에 종속됐다. 생산수단 생산이 소비재 생산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할 권리도 부정되고, 그저 생산 증대에 협조하라는 요구만이 강요됐다. 북한 관료들은 노동 규율을 확립할 강제적 조처들을 잇달아 도입했다.
1948년 남·북한에서 각각 분단 정부가 공식 수립된 이후, 북한 정부는 “국토 완정(통일)”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같은 시기 이승만 정부는 “북진 통일”을 외쳤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중공업 중심의 경제 전략은 전쟁 준비와 밀접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1950~53년 한국전쟁으로 북한은 폐허가 됐다. 이후 북한 정부에 경제 재건은 사활적인 과제였고, 이를 위해 김일성 등 지배 관료들은 대중의 희생을 강요하며 중공업 중심의 발전을 더 가차없이 밀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