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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팔레스타인, 저항, 혁명 ─ 해방을 향한 투쟁 ⑥:
아랍 세계의 혁명과 반혁명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봉기는 아랍 세계의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불가능한 꿈이라는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했다.

튀니지이집트에서는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파업으로 경제의 주요 부문이 마비되면서 독재자가 몰락했다.

리비아의 벵가지에서 바레인의 마나마, 시리아의 홈스에서 예멘의 사나에 이르기까지 수십만 명이 ‘민중은 정권 퇴진을 요구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이러한 혁명적 위기로 인해 수백만 명이 처음으로 정치 활동에 참가하게 됐다. 그들은 인민위원회를 설립하고, 집권당의 꼭두각시들을 직장에서 쫓아내기 위한 파업을 조직하고, 독립 노조를 설립하고, 신문과 웹사이트를 개설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인들과 같은 소수 종교인들이 평등과 정의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고, 여성 차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운동이 성장했다.

서방의 평론가들은 처음에는 당혹했다. 언론인과 학자들이 앞다투어 설명에 나섰다. 페이스북이 원인이었을까? 대중의 봉기는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사람들이 새로운 이슬람주의적 질서를 요구한 것일까?

지역 전체에 걸쳐 폭발적으로 일어난 혁명적 위기의 배경에는 두 가지 주요 요인이 있다. 첫째는 지역 전체에 신자유주의 정책이 도입된 것이다. 국가 경제 정책이 변화하면서, 1945년 이후 식민 지배에 반대하는 반란을 통해 등장한 민족주의 정권들을 점차 불안정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이들 정권의 대부분은 완전한 정치적 침묵을 대가로 고용 안정과 기본적인 복지 국가를 제공했고 다양한 반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공식화했다.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가 위기에 빠지자, 지배계급은 지난 10여 년간의 빈약한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조차 자신들의 이익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각국 정부는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IMF 차관을 도입하고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

둘째 핵심 요인은 미국이 이라크에서 패배한 것이었다. 2003년 이라크 침공과 점령은 초강대국 미국의 치명적인 오판으로 판명났다.

미군은 수년간 이라크 반군과 싸우느라 수렁에 빠졌고, 혼란 속에서 등장한 이라크의 종파적 정권은 적어도 백악관의 통제를 받는 것만큼이나 이웃 나라 이란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2008년 이후 글로벌 경제 위기로 인해 미국은 비용이 많이 드는 점령을 유지하거나 동맹국의 쇠락하는 경제를 부양해 줄 수 있는 자금이 더욱 줄어들었다. 미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쇠퇴하자 미국의 동맹국과 적대국은 모두 각자의 의제를 추구할 운신의 폭을 더 많이 갖게 됐고, 역내 국가 간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졌다.

아랍 혁명에서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이 내놓은 정치적·사회적 요구가 서로 갈마들자, 이 지역의 기성 지배계급은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됐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바라는 반정부 운동의 요구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조직 노동자를 비롯해 신자유주의 개혁의 직격탄을 맞아 온 수백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당연하게도, 혁명의 승리로 가장 잃을 것이 많았던 자본 축적 중심지의 지배계급이 가장 먼저 반혁명에 나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배자들은 여러 걸프 국가 지배계급의 지원을 받아 대중 봉기를 격퇴시키려는 전략의 중심에 섰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무력 탄압에 나설 뿐만 아니라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종파 분쟁을 조장하여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분열시키는 방법도 결합시켰다.

이 전략이 가장 먼저 시험된 곳은 바레인이었다. 2011년 3월 16일 사우디 군대는 부패한 권위주의적 군주의 요청에 따라 대중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바레인을 침공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배계급은 이집트의 반혁명에도 뛰어들어 군부 정권에 막대한 재정을 지원했다. 그 군부 정권은 2013년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그해 8월 무슬림형제단 단원들과 그 지지자들을 끔찍하게 학살했다.

시리아에서는 아사드 정권 자신이 반혁명을 주도했지만, 또 다른 지역 강국인 이란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이란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을 통해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걸프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 패권을 위한 싸움에는 종파적 색채가 가미됐다. 아사드 정권은 종파적인 수니파 이슬람주의 단체들로부터 비(非)수니파 무슬림과 기타 소수 종교인들을 보호하겠다고 자처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사드 정권이 시리아 혁명을 가장 강력히 지지한 지역들을 잔인하게 공동 처벌하는 정책을 펼친 것이 혁명이 종파 간 내전으로 변질된 가장 큰 요인이 됐다.

그러나 걸프 국가들이 가장 반동적이고 종파적인 수니파 이슬람주의 단체들을 지원하며 시리아 내전에 개입한 것도 이러한 과정을 가속화했다.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한 투쟁은 이들 혁명의 정중앙을 관통했다. 튀니지의 시위대는 예루살렘 해방을 연호하며 벤 알리의 몰락을 기뻐했다. 이집트에서는 2011년 9월 수만 명이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행진해 대사관을 폐쇄시켰다.

팔레스타인 해방의 길은 카이로로 통한다 2011년 이집트 혁명 당시 카이로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고 있는 이집트인들 ⓒ출처 기기 에브라힘

시리아에서는 다마스쿠스 난민 캠프에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이 아사드 정권에 대항하는 혁명적 투쟁에 몸을 던졌지만, 아사드가 난민 캠프를 포위해 복수를 감행하면서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반혁명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독립의 적들이 주도권을 되찾았다. 엘시시가 이끄는 이집트 군부 정권은 이집트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박해하고 하마스를 악마화하면서, 물품 반입에 사용되는 터널을 무너뜨리고 이집트 국경 쪽에 사는 사람들의 집을 파괴하는 식으로 가자지구 포위망을 강화해 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떠오르는 차기 실권자로 널리 알려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이스라엘인들은 자기 땅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뉴욕 타임스〉가 설명하듯,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난 수십 년간 공식적으로는 비난해 온 이스라엘을 향해 새롭게 포용하는 태도를 보이는 이유에는 경제적·지정학적 측면이 모두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스라엘을 적으로 보지 않고, 이 지역의 매력적인 경제 및 기술 중심지이자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과 벌이는 냉전에서 잠재적 파트너로 여기게 됐다. 그런 관점 변화의 일환으로 이스라엘이 존재할 권리를 인정하고, 가급적이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과 평화협정을 맺어 그런 권리를 행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