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팔레스타인, 저항, 혁명 ─ 해방을 향한 투쟁 ③:
오슬로 협정 이후: 신자유주의 팔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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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의 비밀 회담 결과 1993년 공식 평화 협정이 체결됐다.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이 미국 백악관 잔디밭에서 오슬로 협정에 조인했다.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환호하거나, 적어도 안도했다. 오랜 투쟁과 희생 끝에 마침내 독립국 수립을 향한 실질적 진전이 있는 듯 보여서였다. 이스라엘 당국이 금지했던 팔레스타인 깃발이 가자지구·서안지구 거리를 수놓았다.
곧 팔레스타인 경찰을 비롯한 정부 기구들이 세워졌고, 수십 년간 망명지에서 운동을 이끌었던 야세르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지도부가 귀국했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으로 평화가 오지는 않았다. 1993년에 ‘평화 프로세스’를 지지했던 이스라엘 역사가 아비 슐라임은 협정 체결 20년 후 이스라엘 리쿠드당 지도부의 주도면밀한 “불성실”을 이렇게 비판했다.
“이 때문에 찬사가 자자하던 ‘평화 프로세스’는 속 빈 강정이 됐다. 사실 속 빈 강정만도 못했다. ‘평화 프로세스’는 서안지구에서 불법적·공격적 식민 프로젝트를 방해받지 않고 추진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바라 마지않던 위장막이 돼 줬다.”
팔레스타인인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이 더 정곡을 찔렀다. 사이드는 오슬로 협정이 “팔레스타인의 항복 문서”라고 꼬집으며, PLO 지도자들이 ‘인티파다’를 포함한 대중 투쟁으로 얻은 기회를 허비해 버리고서는 이 협정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오슬로 협정의 조문은 이것이 엄청나게 세력 차가 나는 양측 간에 맺어진 협정이었음을 뚜렷이 보여 줬다. PLO는 이스라엘이 존재할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 대부분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해 준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팔레스타인 당국(PA)이 된 PLO를 “인정”해 줬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사상 최대로 확장된 군기지-정착촌-“자연보호구역” 네트워크를 이용해 팔레스타인 영토의 국경선과 그 국경선 안의 땅 대부분을 계속 통제했다.
오슬로 협정으로 점령지의 경제가 이스라엘의 이익에 맞게 개조됐다. 서안·가자지구를 이스라엘 경제로 편입시키는 데에 팔레스타인 당국의 기구들이 적극 협조하는 메커니즘이 만들어졌다.
그런 메커니즘 중에는 팔레스타인인 노동력을 “쓰고 버리는 노동예비군”, “경제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틀거나 잠글 수 있는 수도꼭지”(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대학 산하 팔레스타인연구소를 창립한 아담 하니에의 표현)로 바꿔 놓은 것도 포함된다.
오슬로 협정 이전에는 서안·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 중 3분의 1이 이스라엘에서 일했다. 1996년이 되면 이 비율은 15퍼센트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이스라엘에서 일해서 얻은 소득이 팔레스타인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퍼센트에서 6퍼센트로 감소했다.
경제학자 사라 로이는 팔레스타인이 “개발”로 어떻게 고통받았는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독자적인 제조업·농업을 파괴하려고 어떤 전략을 취했는지를 설명했다.
1990년대 동안 이스라엘이 관리하는 국경이 줄줄이 폐쇄돼, 팔레스타인산 재화가 국내외 시장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혔다.
2008~09년과 2014년에 가자지구를 공격할 당시 이스라엘군은 젖소와 낙타의 머리를 쏴 죽였고, 올리브나무를 뽑아 버렸으며, 식료품 공장에 로켓포를 쏴 파괴했다.
알아와다 공장을 운영하던 무함마드 알텔바니는 2014년 8월 〈가디언〉에 이렇게 전했다. “이것은 우리 경제에 대한 전쟁입니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해 45년 만에 이 공장을 세웠는데, 이제 다 없어졌어요.”
“파야드주의”
이스라엘의 경제 전략의 마지막 요소는 전직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살람 파야드가 점령지에서 한 일과 관련이 있다. 파야드는 2007년 이후 팔레스타인 당국의 재무장관과 총리를 지냈다.(2007년은 하마스의 민족 단결 정부에 맞서 가자지구에서 미국의 후원하에 쿠데타가 벌어진 해다.)
“파야드주의”는 소비자 지출 증대 및 개인 부채 급증을 동력 삼은 경제 호황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는 빈곤과 불평등을 전혀 완화하지 못했다. 2011년이 되면 일부 지역에서는 팔레스타인인 가구 절반이 충분한 영양소를 섭취하기가 힘들게 됐다.
팔레스타인인 활동가·저술가 알리 아부니마는 평화 프로세스로 어떻게 신흥 팔레스타인인 엘리트층이 부상했는지, 이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점령과의 공생 관계” 덕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지도자였던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당국을 수립했을 때,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난민 출신 자본가들을 측근으로 데려왔다. 그중 다수는 걸프 연안 아랍 국가들에서 부를 축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금세 팔레스타인 경제를 쥐락펴락하게 됐다.”
예컨대 신경제의 성공 사례로 널리 회자된 서안지구 신도시 라와비는 사실 C구역 이스라엘 정착촌을 모델로 삼아 만들어졌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라와비 건설 과정에서 마을에 사는 팔레스타인인 농부들을 쫓아냈고, 이스라엘에서 건설 자재를 들여왔다.
마침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당국은 함께 공단을 만들고, 규제 없이 쓸 수 있는 팔레스타인인 노동력을 미끼 삼아 걸프 연안국들을 비롯한 타국에 투자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세계은행은 이렇게 지적했다. “이스라엘 기업들은 저가 노동력을 쓸 수 있도록 팔레스타인 국가 내에 공장을 만들어, 거기서 만든 상품을 나머지 아랍 세계로 수출했다.” 아랍 시장에 쉽게 접근하려고 여기서 제조한 상품들에는 ‘메이드 인 팔레스타인’ 딱지가 붙었다.
오슬로 협정은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인 자본가들의 정치적 지도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역내의 으뜸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과 그 충실한 대리인인 이스라엘의 요구에 굴종하기로 결정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때 아라파트는, 아랍 국가들 중 최초로 1979년에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를 전범 삼은 것이었다.
이집트에서처럼 팔레스타인에서도 군사적·외교적 타협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시행과 긴밀히 결부됐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극소수 사람들의 배를 불리는 기구가 됐다.
세계 다른 곳의 패턴을 따라 팔레스타인 당국 역시 미국이 만든 엄청나게 비대한 보안 기구들로 특권층을 비호했고, 아라파트의 고분고분한 후계자 마흐무드 압바스와 그 일파를 지키는 데에 주력했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점차 억압을 강화했고, 팔레스타인 당국의 보안군은 이스라엘군과 종종 한 몸처럼 행동했으며,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전략적 바람을 현실로 만들었다.
팔레스타인판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계급 문제라는 것은 PLO 부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더 분명하다.
PLO가 부상하던 당시 걸프 연안의 팔레스타인인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난민촌의 팔레스타인인 청년들을 동원해 운동을 일으켰고, 이후에는 그 운동을 통제하려 애썼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날 서안지구의 자본가들은 금융·교역·언론을 통해 다국적 자본과 훨씬 긴밀하게 연결돼 있고, 대다수 팔레스타인인들에 맞서 이스라엘과 대놓고 협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