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식민 정착자 지배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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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자 식민주의에 대한 두 번째 분석 글에서 찰리 킴버는 이스라엘이 이 통상적 ‘정착자 식민주의’ 정의에 들어맞는지, 그리고 어떻게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이 시온주의의 목표를 일부 좌절시켰는지 살펴본다. 킴버의 첫 번째 분석 글은 본지 495호(‘정착자 식민 지배의 잔혹한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시온주의의 창시자 중 하나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이렇게 썼다. “낡은 건물을 새것으로 대체하길 바란다면, 새 것을 건설하기 전에 낡은 것을 부숴야 한다.”
이 말에서 요약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한 지역의 사람들 전부 또는 거의 전부를 죽여 없애려는 말살주의의 논리이고, 정착자 식민주의는 이런 말살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이 때문에 정착자 식민주의는 영국의 인도 지배 같은 다른 형태의 식민 체제와 구별된다.
영국의 인도 지배는 끔찍한 참상을 불러왔다. 그러나 정복지에서 토착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제국주의 모국에서 커다란 무리의 사람들을 이주시켜 새로운 식민지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정착자 식민주의 세력들은 사람들을 대규모로 이주시켜 원주민의 땅을 영구적으로 차지하려 든다.
확실히 대부분의 시온주의 선구자들은 이스라엘을 건국하려면 팔레스타인인들을 단지 하층민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가 되는 다비드 벤구리온은 1937년에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우리는 아랍인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위력을 써야만 한다면(이는 아랍인들에게서 네게브나 트랜스요르단을 빼앗기 위한 것보다는 그곳에 정착할 우리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위력으로 이를 이룰 수 있다.”
그러한 사명은 살인적일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목숨이 위협받지 않는 한 떠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1948년 나크바가 본질적으로 대규모 폭력과 살육이었던 이유다.
작가 패트릭 울프는 이것이 “원주민 말살주의의 논리”였다고 설명했다.
원주민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과 함께 그들의 존재를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지우기 위한 작업이 수반됐다. 팔레스타인 강탈은 팔레스타인이 “땅 없는 사람들을 위한 임자 없는 땅”이라는 신화를 기초로 자행됐다.
1901년에 이스라엘 쟁윌이라는 이가 처음 말했다고 전해지는 이 문구는 여전히 시온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이룬다.
팔레스타인인들을 제거한다는 목표는 시온주의 내부 오랜 논쟁의 산물이었다.
에드몽 드 로스차일드 남작 같은 시온주의의 일부 지도적 인물들이 바란 것은 비교적 소수의 유대인 지주들이 팔레스타인인 아랍 노동자 대다수를 착취하는 나라였다.
이스라엘이 이 모델을 따랐다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알제리와 유사할 것이었다.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는 시온주의 노동자 운동에서 나왔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아랍 노동자들이 유대인 노동자들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라 주장했다. 아랍 노동자를 고용한 유대인 자본가는 누구나 시온주의 대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이 20세기 초부터 보여 주고 있었던 것처럼, 착취당하는 식민지 사람들은 경제와 국가를 불안정하게 하는 강력한 잠재 요소일 수도 있었다.
만약 식민지 주민들이 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면 파업을 벌이고 분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온주의 운동 내 노동당 시온주의 경향에 따르면 “청소된” 땅 위에 유대인만의 단독 경제를 꾸려 아랍인들과 경쟁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1920년에 설립된 ‘이스라엘 히브리 노동자 총연맹’(히스타드루트)이라는 “노동조합”이 이 프로젝트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 히스타드루트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아랍인을 몰아냈다. 히스타드루트는 창립 대회에서 유대인의 국가에 “유대인 노동자 사회”를 만드는 데 헌신하겠다고 결정했다.
벤구리온에 이어 주요 시온주의 “좌파” 정당을 이끌었던 다비드 하코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유대인 사회주의 문제를 놓고 내 친구들과 싸워야 했다.
“나는 노동조합에서 아랍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옹호해야 했고, 아랍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게 하고, 아랍인이 재배한 토마토에 등유를 들이붓고, ‘유대 민족 기금’이 부재 지주들에게서 땅을 사들이고 농민들을 땅에서 내쫓는 것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야 했다.”
이들도 노동자-사장 간의 투쟁을 운운했지만 그 투쟁은 통상적인 것과 사뭇 달랐다. 그 투쟁은 식민지 전리품의 분배를 둘러싼 것이었고, 따라서 계속해서 전리품을 얻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하고 강탈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다.
이들 노동당 시온주의자는 아랍인들에게서 강탈한 지역에서 군사 기지 구실을 하는 자영 농장 키부츠들을 설립했다.
역시 히스타드루트가 지휘했던 시온주의 무장 민병대 하가나는 강탈하고 들어선 정착자들을 지켜주는 구실을 했다. 나아가 하가나는 1947년과 1948년에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대부분 지역에서 자행한 인종 청소에서 중심적 구실을 했다. 당시 최대 10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쫓겨났다.
이스라엘은 알제리와 다르다. 알제리에서 알제리 저항군은 프랑스 정착자들에 맞서 싸워 그들을 유럽 본토로 되돌려 보낼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정착자들에 대해 알제리와 똑같이 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정착자들은 본국에서 식민지로 파견한 요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착자 식민주의는 일방적 과정이 아닐뿐더러 한 번의 사건으로 완결되지도 않는다. 토착 원주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마련이고 설령 그러기까지 시일이 걸리더라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배제되고 버려지기를 거부하는 그들의 의지, 감옥·폭탄·굶주림에 굴하지 않는 그들의 용기로 인해 정착자 식민 지배 프로젝트는 약화돼 왔다.
이는 시온주의자들이 기대했던 것이 아니다. 시온주의자들이 기대했던 바는 벤구리온의 말로 자주 인용되지만 그가 실제로 말한 것 같지는 않은 다음 문구에 잘 드러난다. “늙은이들은 죽고 젊은이들은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 난민의 후손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자신들의 권리를 결코 잊지 않았다. 그리고 1949년 당시 인구의 13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16만 명의 대규모 팔레스타인인 소수 집단이 새 이스라엘 국가 안에 살아남았다.
이스라엘의 확장 정책은 이 문제를 더 키웠다. 1949년 요르단의 압둘라 1세 왕이 동의한 가운데 이스라엘이 몇몇 아랍 마을을 병합하면서 더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국가에 편입됐다.
그 다음 1967년 전쟁이 벌어졌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살던 팔레스타인인 약 100만 명 가운데 28만 명에서 38만 명이 이스라엘의 폭력에 의해 살던 집을 떠나야 했다. 나머지 70만 명은 점령지의 주민으로 남았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제거하기는커녕 흡수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어떠한 권리도 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끔찍한 딜레마를 낳았다. 그토록 원했던 승리의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국가와 불가피하게 더 많이 충돌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해결책”은 정착자들을 앞세운 서안지구 침략과 같은 점령 계획을 더 많이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이은 잔학 행위와 추방으로는 저항을 꺾지 못했다.
딜레마를 벗어날 또 다른 방법은 피억압 주민 중에서 협력자들을 모집해 팔레스타인인들을 물리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정치적으로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효과가 없었다.
오늘날 서안지구의 하급 관리자 구실을 하는 ─ 이스라엘인들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한에서만 그런 구실을 할 수 있다 ─ 팔레스타인 당국(PA)은 불신과 모욕의 대상이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범죄가 낳은 결과들에서 벗어나려 시도한 모든 것이 아파르트헤이트 국가를 없애야 할 더 큰 이유가 돼 돌아온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역사학자 라시드 할리디는 이렇게 썼다.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대체하고 그곳의 아랍 주민 대부분을 몰아내면서 시온주의의 꿈이 실현된 것 같았다.
“인종 청소로 엄청난 인구학적 변화가 생겼고 모든 ‘부재’ 아랍인의 땅이 무단 점유될 수 있었다.
“시온주의자들이 바라고 기대한 것은 난민들이 홀연히 사라지고, 이 땅이 천 년 넘는 기간 동안 아랍인이 다수인 나라였다는 기억까지 지워지리라는 것이었다. 골다 메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팔레스타인인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고 2018년 할리디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군대와 살인적인 보안 기관, 이스라엘 민족주의라는 공격적 위력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러모로 실패한 식민 정착 프로젝트였다.
“요르단 강에서 지중해까지 들어선 나라, 1967년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점령과 식민지화로 통합된 나라 전체 인구의 최소 절반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인이다. 그리고 그 비율은 증가하고 있다. 원주민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고 그들은 잠자코 있지 않는다.”
지금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인종학살은 말살주의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속히 승리해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주민들을 일시적으로 제압한다는 베냐민 네타냐후의 꿈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또다시 산산조각났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제2의 나크바를 거부하고 그들의 조부모에게 했던 식으로 자신들을 이집트나 요르단으로 몰아내려는 시도에 맞서 들고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수만 명을 죽였고 더 많이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악랄한 계획은 장차 일어날 저항의 씨앗을 뿌렸다. 이로 인해 전 세계 수억 명이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하게 됐고, 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투쟁을 영웅적으로 대표한다고 여긴다.
정착자 식민주의의 토대에 내재하는 이런 취약성 때문에 저항 운동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생겨난다.
정착자 식민주의라는 이스라엘의 토대를 이해한다면, 비록 이스라엘이 정착자 식민주의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단편적 개혁으로는 해방을 이룰 수 없고 “두 국가” 방안은 더더욱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공존을 거부하는] 유일 국가라는 전제 위에 구상되고 또 건국됐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런 유일 국가로 남으려 할 것이다.
제국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두 국가라는 그들의 환상을 퍼뜨리려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확실히 보여 준 것은, 단지 이스라엘 국가의 75년과, 100년이 넘는 시온주의 식민 동맹이 낳은 증상들만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진정한 문제는 그런 증상을 낳은 원인, 즉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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