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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반대가 아니라 노동계급 문제에 집중하자?:
바겐크네히트 노선은 좌파가 지지할 정치가 아니다

최근 유럽의회 선거에서 독일의 자라 바겐크네히트의 신생 정당 BSW(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가 5.7퍼센트를 득표하며 유럽의회에 진입했다.

바겐크네히트는 오랫동안 좌파당 디링케의 원내대표로 활동해 온 인물로, 지난해 말 좌파당에서 분당해 BSW를 창당했다.

독일 정치인 바겐크네히트 ⓒ출처 Martin Heinlein

바겐크네히트의 정치는 흔히 “경제적으로는 진보적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보수적”이라고 일컬어지곤 한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노동자를 위한 정치를 표방하면서도 차별 문제 등 사회적으로는 보수적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뒤에서 서술하겠지만 경제적 쟁점에서도 바겐크네히트는 그다지 좌파적이지 못하다.) 바겐크네히트 자신도 BSW의 정치를 “보수적 좌파”라고 규정했다. 바겐크네히트는 이런 주장을 펴면서 종종 마르크스를 아전인수 격으로 끌어다 쓴다.

최근 저서 《독선자들》(2021, 국내 미출간)에서 바겐크네히트는 오늘날 좌파가 ‘워크’(차별 문제에 민감할 것)를 요구하고 “기괴한 소수자” 정체성 정치를 지지하는 데 골몰하느라 전통적 지지층을 저버렸다고 주장했다. “라이프스타일 좌파”는 진정한 좌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최근 국내에서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과 장석준 정의당 정책연구소 전 소장 등 중도좌파 자유주의자들이 워크를 비판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듯하다. 장석준 전 소장은 바겐크네히트의 저서 《풍요의 조건: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법》(제르미날, 2018)을 우호적으로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바겐크네히트의 주장은 차별 문제와 계급 문제를 양자택일로 대립시키고, 차별 반대 운동(서구에서는 특히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기피하는 것이다. 파시즘 반대 운동의 대전제인 인종차별 반대를 회피함으로써, 독일에서 파시스트 정당이 성장하는 것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효과를 낸다.

실제로 바겐크네히트의 정치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은 이주민에 대한 견해다. 바겐크네히트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여러 해 동안 극우를 막는다는 이유로 극우의 인종차별에 타협해 왔다. 부메랑 던지기인 줄 모르고 말이다.

바겐크네히트는 ‘과도한’ 이민자 수용이 ‘부족한’ 자원에 대한 치열한 경쟁을 낳아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파시즘을 중핵으로 품고 있는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를 강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주민들이 고국에서 교육받고 일하는 것이 이주민 자신과 그 나라에도 더 낫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토박이와 이주민으로 노동계급 내부를 이간할 뿐 아니라, 인종차별(과 극우의 성장)의 책임을 그 피해자인 이주민들에게 전가하는 고약한 주장에 문을 열어 준다.

헤인 데 하스는 이주민을 위해 이주민 유입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이렇게 일갈한다. “‘너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안다’라는 투로 거들먹거리는 태도[다.] ... 이주자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실제 스스로 판단한다.”(《이주, 국가를 선택하는 사람들》, 세종서적, 2024)

바겐크네히트의 타협은 인종차별을 좌파적으로 포장해 줌으로써 그럴듯한 주장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인종차별주의 극우와 파시스트를 더 기세등등하게 만든다.

또, 체제가 아니라 피해자 탓하기를 함으로써, 인종차별에 맞서는 투쟁을 약화시키고 결과적으로 극우와 파시즘을 (제약하긴커녕) 키워 주는 데 일조한다. 최근 유럽이 인종차별을 주요 무기로 삼는 극우와 파시즘이 크게 성장하는 위험한 상황임을 보자면 이것은 각별히 문제적이다.

오늘날 다른 곳에서도 좌파가 이주민·난민 문제를 놓고 나쁜 입장을 취하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그리스 시리자 정부는 긴축을 강요하고 난민을 박해했고, 프랑스의 신인민전선 안에서 멜랑숑은 공산당의 이슬람 혐오와 애국주의에 타협했다. 영국의 조지 갤러웨이도 바겐크네히트와 비슷한 주장을 편다. 한국에서도 지난 4월 총선에 울산 동구에서 출마한 민주노총 후보 이장우 후보(노동당 소속)는 조선업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주장하며 조선업 이주 노동자 확대에 반대했다.

포퓰리즘을 어느 정도 수용해야만 선거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제주의를 이상주의로 치부하니 토박이 노동자와 이주노동자가 단결해 조건을 개선하고 민족주의를 극복할 가능성은 보지 못한다.

계급 환원론

그러나 바겐크네히트처럼 노동계급의 문제가 중요하다며 인종차별을 용인하는 것은 소탐대실이고 결국 제 살 깎아 먹기이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1915)에서 “근시안적이고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장기적 이익을 희생시키는 짓”이 바로 기회주의라고 지적했다.

바켄크네히트는 독일에서 백인 노동계급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지만 인종차별은 노동계급의 상당한 소수가 겪는 문제이고(독일 노동계급의 4분의 1이 이주민 배경을 가지고 있다), 차별이 심해질수록 이주 노동자뿐 아니라 토박이 노동자의 조건도 악화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차별은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조건 개선을 위한 단결된 투쟁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미국에서] 흑인 노동자가 사슬에 매여 있는 한은 백인 노동자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강조했다.

레닌도 이렇게 강조했다. “억압과 차별이 어디서 나타나든, 어떤 계층이나 계급의 사람들이 억압과 차별에 시달리든 간에 그것에 맞서 싸워야 한다.”

차별은 착취를 강화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 단결을 위해 차별에 맞서 싸워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차별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계급투쟁임을 주장해 왔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계급 중심성은 바겐크네히트의 조잡한 경제주의(계급 환원론)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바겐크네히트가 “경제적” 문제에서 진정으로 좌파적인 것도 아니다. 좌파라면 자본주의에 반대해야만 한다.

그러나 바겐크네히트는 오늘날 자본주의를 (성과·책임·경쟁에 바탕을 두지 않고) 세습과 특권으로 운영되는 “경제 봉건주의”라고 규정한다. 주적은 콘체른(Konzern, 독일식 재벌)과 주식회사라는 것이다. 이를 해체하고 “소유권을 민주적으로 재구성”하자는 것이 그의 대안이다.

이는 한국의 재벌 해체(개혁)론과 매우 흡사한 주장이다. 그러나 재벌 해체는 자본의 집적·집중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공상일 뿐 아니라, 자본의 관계망(즉, 사회 시스템)이 아니라 자본의 특정 조직형태(소유·지배 구조)를 문제 삼는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 이런 주장은 흔히 도시와 농촌의 중간계급과 연대하기 위해 자본주의 자체와 대결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로 이끌린다.

그래서 바겐크네히트는 아예 이렇게 말한다. “독일에서 중요한 것은 대기업에 대항하는 중소기업의 강력한 블록인 미텔슈탄트(Mittelstand)다. 그것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양극성만큼이나 중요하다.”

요컨대, 바겐크네히트는 사회민주주의 방식으로 독일 자본주의를 개혁하려는 것이다. 이주민에 대한 인종차별에 타협하는 문제에서든 경제적 대안에서든 바겐크네히트의 정치는 좌파가 지지할 만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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