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단어》,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사회진보연대의 ‘정치적 올바름 비판’: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중도좌파 측 비판, 무엇이 문제인가
〈노동자 연대〉 구독
최근 진보(중도좌파) 측에서 ‘워크’*와 정치적 올바름(PC)*을 비판하는 책이 두 권 나왔다.
독일의 중도좌파 주간지 〈슈피겔〉의 기자 르네 피스터가 쓴 《잘못된 단어 –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와 미국의 철학자 수전 니먼이 쓴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이하 《워크》)이다. 《워크》는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이 옮기고 장석준 정의당 정책연구소 전 소장이 추천했다.
중도좌파로 우경화한 사회진보연대도 올해 계간지 봄호에 ‘정치적 올바름 비판’을 특집으로 실었다.
구체적 쟁점에서는 논자마다 약간 차이가 있지만, 이들은 공통으로 자유주의를 옹호하며, 자유주의적 가치와 현 질서를 존중하지 않는 워크를 우익과 다름없다고 본다. 홍기빈 소장은 북토크에서 워크가 심지어 파시즘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이 대중의 반발을 사서 우익을 강화하고 양극화를 심화시킨다고 주장한다.
대체로 이런 흐름은 최근 유럽에서 일부 중도좌파 정치인들, 대표적으로 독일의 자라 바겐크네히트와 영국의 조지 갤러웨이가 워크를 비판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듯하다.
그러나 바겐크네히트나 갤레워이의 워크 비판은 차별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럼으로써 파시스트 성장의 위험성을 간과하는 나쁜 효과도 냈다. (관련 기사: 본지 511호, ‘바겐크네히트 노선은 좌파가 지지할 정치가 아니다’)
세계적으로, 파시즘을 포함한 극우의 부상이 일반화되는 지금 인종차별 반대와 팔레스타인 연대는 모종의 시금석이 되는 중요한 쟁점이다. 아래에서 상술하겠지만, 《잘못된 단어》와 《워크》, 사회진보연대도 인종차별 반대와 (시온주의가 극단적 인종차별 국가 체제라는 점에서 인종차별 반대를 함의하는) 팔레스타인 연대 문제에서 약점을 보인다.
즉, 오늘날 중도좌파의 정치적 올바름(이하 PC) 비판은, 역효과를 일으키는 일부 PC 정치(가령 도덕주의적 단속, 음모론과 확증편향, 같은 좌파를 캔슬하기, 연대에 대한 열의 부족 등)에 대한 필요한 비판을 넘어선 것이다.
지금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중도좌파 측의 PC 비판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하는 이유다(이점에서 중도좌파 측의 PC 비판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이전에 비해 훨씬 비판적이 됐다).
물론 중도좌파 측이 혐오표현 규제 주장이나 캔슬 컬처에 반대해 표현의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데에는 귀담아들을 부분이 있다. 차별 반대 운동의 성장과 급진화를 위해서는 토론과 논쟁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중도좌파는 표현의 자유가 누구의, 무엇을 말할 자유인지, 캔슬 컬처의 대상이 누구인지 묻지 않는 정치적 오류를 범한다.
가령 르네 피스터가 《잘못된 단어》에서 캔슬 컬처를 비판하기 위해 든 사례 하나는 미국 러트거스대학에서 전 국무부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강연이 학생들에게 ‘캔슬’당한 일이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의 주범 콘돌리자 라이스의 강연을 학생들이 반대한 것은 표현의 자유 억압이 아니라 완전히 정당한 항의다.
우파의 공격
애초에 PC나 워크를 둘러싼 논쟁은 우파가 시작했음을 주목할 만하다.
1980년대에 우파는 1970년대 초에 있었던 급진적 운동(반전 운동, 반인종차별 운동, 여성운동)의 유산을 청소하기 위해 PC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또, 2010년대 이후 ‘흑인목숨도소중하다’(BLM) 시위자들이 흑인 대통령(오바마) 취임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인종적 불의에 대한 정치적 의식을 촉구하며 ‘워크’라는 용어를 대중적으로 사용하자 우파는 이 용어를 재빠르게 공격하는 일에 나섰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비판적 인종 이론’이 주요 타깃이 됐다. 미국 공화당이 우세한 십수 개 주에서 소위 “워크 방지법”이라고도 불리는 법안이 제정돼 학교에서 비판적 인종 이론 수업을 금지시켰다. 이는 사실상 학교에서 인종차별 문제 자체를 논의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냈다.
르네 피스터도 《잘못된 단어》에서 비판적 인종 이론을 맹비난한다. 그가 보기에 비판적 인종 이론은 “매우 비관적 아이디어”인데, 마틴 루서 킹과 달리 “미국 민주주의가 흑인 억압을 종식하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사회를 “백인우월주의”로 특징짓는 것은,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이 “탈 인종차별 사회”가 됐다는 것만큼이나 단순하다. 그러나 르네 피스터는 비판적 인종 이론이 가장 급진적으로(논리적으로 일관되게) 나아갈 수 있는 방향, 즉 인종차별을 없애려면 자본주의 시스템을 없애야 한다는 결론을 반대한다.
실제로 르네 피스터는 2015년의 메르켈의 난민 정책이 ‘너무 포용적’이라 생각하며 유럽연합이 난민을 적정 수준에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이 보호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인다면 경제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공동체에 과도한 부담을 지울 것”(2017년 8월 〈슈피겔〉 사설)이라는 이유에서 말이다.
이런 주장은 극우가 설파하는 ‘대전환(인종 대교체) 이론’(유럽이 무슬림 등 이주민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음모론)에 문을 열어 준다. 중도좌파의 이런 타협은 인종차별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혼란을 일으키며 우파를 기세등등하게 하게 할 뿐이다.
오늘날 우파의 워크 공격은 1980년대 시작된 PC에 대한 공격보다 더 위험한 함의를 갖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파가 차별 반대 운동을 공격하고 보수적 가치를 강화해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것은 공통점이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파시즘 운동을 고무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파시즘은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을 모조리 분쇄하려 한다는 점에서 각별히 위험한 극우다.
바로 이 점에서 중도좌파의 워크 비판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중도좌파는 파시즘이 자양분으로 삼는 인종차별 문제에서 구멍이 숭숭 나 있다. 더 큰 문제는, 때로 워크 비판이라는 명분으로 잘못된 입장을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잘못된 단어》와 《워크》의 저자는 모두 문제적 워크의 사례로서 BLM 운동이 내놓은 경찰 예산 삭감 요구를 든다. 이 요구는 빈곤층과 흑인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며 잔혹한 폭력을 일삼는 경찰의 예산을 삭감해 독소를 제약해야 한다는 정당한 취지에서 나왔다.
그러나 두 저자는 경찰 자체가 인종차별적 기구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찰이 ‘제구실’을 하려면 예산이 확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보수주의는 어떤 국면에서는 운동에 족쇄로 작용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
워크와 PC 비판자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도 입장이 좋지 못하다. 팔레스타인 연대는 인종차별 반대와 제국주의 반대를 함축하고, 따라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반파시즘 운동과 긴밀하게 관련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대한 문제다.
수전 니먼은 《워크》에서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탈식민주의 워크”라며 비난한다. 그가 보기에 이스라엘의 폭력과 하마스의 폭력은 모두 “보편주의” 관점에 따라 똑같은 악이다. 이런 관점에서의 하마스 비난은 홍기빈 소장과 장석준 씨, 그리고 사회진보연대도 같다.
지난해 런던 집회에서 한 팔레스타인인이 든 팻말은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우리의 시체에만 연대하고 우리의 로켓포와 연대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위선자다.” 하마스의 무장 투쟁은 시온주의 식민 정착자 지배 체제를 물리치는 데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닐지라도)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최근의 중도좌파의 PC/워크 비판은 우익의 부상을 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오히려 현재 정세의 시금석이 되는 쟁점(인종차별과 극우의 부상)을 회피하거나, 우파적 주장과 타협의 여지를 둠으로써 결과적으로 우익(특히 극우)의 부상에 일조하는 효과를 낸다.
한국에서 PC/워크와 관련된 논쟁의 양상이 서구와 똑같진 않지만, 극우의 위협이 국제적 현상이 되고 있는 만큼 머지 않아 이런 문제가 한국적 버전으로 재현될 수 있다. 게다가 한국에서도 이주민 문제가 날로 중요해지고, 이미 적지 않은 좌파가 가사 노동자나 조선업 등에서 이주민 유입에 대해 반대하거나 분명히 환영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