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시스트 장마리 르펜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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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남긴 파시즘 운동은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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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시스트 지도자 장마리 르펜이 죽은 1월 7일 밤 파리 거리에서는 춤판이 벌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환호했다.
권세 있는 정치인들은 기뻐하는 시위대가
제정신인가? 국민전선
나치의 가스실 학살을 부인할 때 르펜은 자신의 적을
유대계 프랑스인 7만 6000명을 살인 공장으로 보낸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점령이
1988년 르펜은 유대계 장관 미셸 뒤라푸르의 이름으로
프랑스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르펜이 허구한 날 공격한 무슬림들은 어떤가? 르펜은 무슬림을 향한 인종차별적 증오 발언으로 2003년, 2005년, 2008년, 2011년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물론 오늘날 정치인들에게 이슬람을 악마화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건 거의 소용이 없다. 그들에게 이슬람 악마화는 일종의 국기
르펜은 생전에 어떤 존중도 표한 적이 없고, 죽어서 존중받을 자격이 조금치도 없다.
주류 언론들은 조사에서 르펜을
나치
르펜은 투철한 나치였다. 그는 대학 시절 좌파를 상대로 거리 전투를 벌이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국민전선을 창당하기 전 르펜은 음반 기획사를 운영하며 나치 군가를 알리고 점령기에 나치에 부역한 프랑스 지식인들을 찬양하는 음반을 제작했다.
르펜은 프랑스가 갈리아 문화와 로마 가톨릭이라는 뿌리와
르펜은 자신이 갈구하는 프랑스를 만들려면 국가를 장악하고 국가를 자신의 비전대로 변화시킬 운동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다. 바로 파시즘 운동 말이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특히 나치가 운영하던 강제 수용소의 실상이 폭로되고 난 후, 파시즘은 지지를 얻기 힘들었다. 나치 점령의 대가를 몸소 치른 수많은 사람들은, 인종적 순수성을 추구하고 민주주의를 증오하는 파시즘 사상을 역겨워했다.
극우 정치를 고수한 극소수 활동가들은 1930년대의 전략을 그대로 되풀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1970년대 초 국민전선이 창당됐을 때, 그 당의 지도자들은 주류 정치 진출이 차단당하지 않으려면
동시에 그들은 권력 장악으로 가는 길이 평화적이지 않을 것임을 이해하는 확고한 중핵이 파시즘 운동에 필요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이래로 르펜을 비롯한 국민전선 지도자들은 당국이 용인하는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는 화법을 발전시켰다. 이를 두고 짐 울프리스와 피터 피시는 저서에서
울프리스와 피시가 설명하기를, 그 담론의 한 부분은
국민전선의 강경한 발언은
르펜의 공격적 발언은 말실수가 아니라, 국민전선의 파시스트 중핵을 확장
그러나 그런 발언들에는 또 다른 목적도 있다. 1990년대에 국민전선은 이민 문제에 관한 독자적 슬로건을 고안해 내 당의 대변자들과 활동가들이 끝없이 되풀이하게 했다. 이민을
1990년대 당시 파리 시장이자 훗날 대통령이 되는 주류 우파 정치인 자크 시라크가 이민자들을 두고 시끄럽고 냄새난다고 했을 때 국민전선 지도부는 쾌재를 불렀다.
주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발언에 파시스트들의 표현과 논점을 차용하기 시작하자, 국민전선 지도자들은 이렇게 우쭐거릴 수 있었다.
파시스트들은 중도 정치인들의 이민자 정책과 담론 모두를 자신의 지향으로 기울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덕분에 국민전선은 프랑스 정치의 중심 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 대선에 도전한 것이다.
인종차별에 더해 르펜은 프랑스 정치권 중심부의 정치인들이 좌우를 불문하고
르펜이 2002년 대선 결선 투표에 진출해 시라크의 유일한 대항마가 돼 경악을 자아냈다. 르펜은 결국 큰 표차로 떨어졌지만, 강경하고 인종차별적인 공약으로 500만 표 가까이 득표했다.
이미지 세탁
그러나 정치적 야망이 있는 국민전선 인사들 대부분이 보기에 그 정도 득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들은 르펜에게 당권을 맡기지 않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국민전선이 이미지 세탁을 더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02년 대선 이후 르펜의 딸 마린 르펜이 당권을 잡고 숙정을 시작했다. 주류 우파에 더 가까운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고 주류 우파 정당들과 협력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린 르펜은 아버지 르펜의 유대인 혐오와 거리를 두고, 나치 수용소를
2015년에 마린 르펜은 당의 명예 총재로 남아 있던 아버지 르펜을 출당시켰다. 아버지 르펜의 거듭된 홀로코스트 부인은
그러나 포장을 바꿨을지언정 국민연합의 목표는 국민전선과 같다. 파시스트의 지도하에 극우를 결집시키는 것이다. 국민연합의 후보들이 노골적인 나치 단체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고 근래에도 인종차별적이고 유대인 혐오적인 발언을 한 것이 폭로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국민연합은 국민전선의 이중 담론 전략을 계승했다. 다만 그 표적은 거의 전적으로 무슬림이 됐다.
마린 르펜은
국민연합의 핵심 공약은 헌법을 고쳐서 이민자들의 권리를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보다 줄이겠다는 것이다. 이런
국민연합 당원 다수는 강경하면서도 주류 정치를 지향하는 이런 노선 변경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많은 수의 기층 당원은 장마리 르펜이 20대 시절 깨달은 바, 즉 자신들이 원하는 프랑스는
1996년에 장마리 르펜은 다가올 일에 대해 국민전선의 청년 조직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르펜의 말은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그런 상황을 르펜의 세력과는 완전히 다른 세력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