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한미워킹그룹 논란:
'숭미' 관료만 아니면 남북 관계가 훨씬 더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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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북관계는 북한이 내년 헌법에 “적대적 두 국가”를 명시하겠다고 할 정도로 위기다. 남북 간의 공식 대화 채널은 물론, 비공식 채널도 모두 끊긴 상황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작은 오해가 큰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남북관계에 대처할 방안을 놓고 이재명 정부 내에서 엇박자가 계속돼 왔다.
내년 4월 트럼프의 중국 방문 즈음에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한미군사훈련을 ‘조정’하자는 일각의 제안에 대해 국가안보실장 위성락은 ‘한미군사훈련을 남북대화 재개 카드로 고려 안 한다’고 잘라 말했다. 또 그는 이재명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이 거부할 것이 뻔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강조하도록 조언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반면 통일부 장관 정동영은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기존의 북한 비핵화 요구를 자제하고 한미군사훈련을 ‘조정’해야 한다고 제기한다. 위성락이 상임위원장으로 있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구조를 문제 삼기도 한다.
그러던 중 외교부가 한미군사훈련 조정이나 비핵화 요구 자제를 공공연하게 반대해 온 주한 미국대사대리 케빈 김 등과 대북정책을 협의할 기구를 꾸린다고 발표했다. 이에 통일부가 대북정책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다면서 사실상 협의기구를 보이콧했다.
결국 12월 19일 이재명이 남북 간 적대 완화 노력은 “통일부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말하며 봉합에 나섰다. 그러나 동시에 평화와 안보에 있어서는 “외교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도 말하며 모호함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전 통일부 장관 6명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외교부가 미국과의 협의를 주도하면 “제2의 한미워킹그룹”이 될 것이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한미워킹그룹은 무엇이고, 외교부가 아닌 통일부가 대북정책과 미국 협의를 주도하면 그 폐해를 막을 수 있을까?
한미워킹그룹
한미워킹그룹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우호정책을 번번이 좌초시킨 한미 협의체다.
2018년 6월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으로 들뜬 분위기 속에서, 그해 9월 문재인 정부는 개성공단 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북한과 합의했다. 이에 미국은 “북한 비핵화가 남북관계 진전에 뒤처지지 않도록 보장하기를 원한다”고 요구했고, 11월 한미워킹그룹이 설치됐다.
문재인 정부는 한미워킹그룹을 통해서 대북제재 면제를 인정받고자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남북이 합의한 개성공단 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 그리고 문재인이 2020년 신년사에서 밝힌 북한 개별 관광 추진 모두 미국 측의 반대로 무산됐고 한미워킹그룹이 그 창구였다.
특히 악명이 높은 것은 2019년 1월 북한에 대한 독감 치료제 타미플루 지원을 무산시킨 것이다. 거진 10년 만에 정부 차원의 지원이 추진됐지만, 한미워킹그룹은 바로 몇 주 전 타미플루 지원을 승인했으면서도 출발 직전에 돌연 약을 실은 트럭이 대북제재에 저촉될 수 있다며 생트집을 잡았다.
이 사건은 2차 북미정상회담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강력한 결정권을 과시하는 효과가 있었다. 동시에 기존의 대북제재를 존중하면서 대북 우호 정책을 추진한다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무망한지 보여 줬다.
문재인 정부가 이런 좌절을 겪으면서도 한미동맹을 우선한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한미워킹그룹에 참여한 외교부의 구실과 미국의 압력만 강조한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이 크게 작용한다고 해서 한국이 일말의 자율성도 없는 ‘식민지’인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 남북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며 긴장이 고조된 데에는 문재인 정부 자신이 크게 일조했다. ‘김정은 참수부대’ 예산을 30배 증액하고 F-35 전투기, 글로벌 호크 같은 첨단 무기 도입 등 대규모 군비 증강에 나선 것은 한국 국가의 선택이었다.
문재인은 한미동맹을 통해 미국 주도 세계 질서에 편승하고, 미국을 등에 업고 세계적인 군사력 경쟁에 뛰어드는 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위상 제고와 경제적 이익 확보에 득이 된다고 본 것이다. 이는 역대 정부들의 연속된 선택을 이어 받은 것이기도 한데, 이를 계승하는 것이 남북관계 개선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숭미파” 관료들이 그 선택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인적 요소였다 할지라도 그들이 대통령과 청와대를 속여서 그런 선택으로 끌고 갔다거나 하는 식의 서사로는 이런 결과들을 온전히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한국이] 몰래몰래 끌어다 놓는 첨단 전투기들이 어느 때든 우리를 치자는 데 목적이 있겠지, 그것들로 농약이나 뿌리자고 끌어들여 왔겠는가”, “[문재인이 말하는 남북평화경제는] 삶은 소 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며 배신감을 격하게 토로했던 것이다.
남북관계는 윤석열 정부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악화되고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의 상황
지금 제2의 한미워킹그룹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사들 중에도 최근의 불확실한 지정학적 상황을 이유로 국방력 강화를 강조하는 이들도 있다. 예컨대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이 전략적 유연성에 반대하기 위해서 “‘동맹국들은 자국 방어에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를 따[라야 한다]”고 제안한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는 자주국방 강화뿐 아니라, “재래식 전력만으로 북학 핵을 감당하기는 어렵다”며 한반도에 미국 핵무기를 더 자주 들여오기로 합의한 윤석열 정부의 ‘워싱턴 선언’ 이행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실천과 별반 다르지 않거나 그보다도 후퇴한 것이다.
이재명은 남북관계에 “바늘구멍이라도 뚫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정부의 실제 행보다. 대북 확성기 방송을 먼저 중단한 것을 제외하면 남북 긴장 완화를 위해 이뤄진 조치는 거의 없다.
오히려 북한의 반발에도 한미 전쟁 연습인 ‘을지 자유의 방패’ 훈련을 진행했고, 문재인 정부 이래 최대폭으로 국방비를 인상했고, ‘위안부’·강제동원 합의를 인정하면서까지 한미일 군사 협력을 추구했고, 핵잠수함 건조를 추진하고 있다.
한미동맹과 미국 주도 국제 질서 안에서 대북 유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의 한계는 이처럼 분명하다. 그런 우선순위는 한미동맹을 계속해서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삼는 것이고, 이 점에서는 통일부와 외교부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없다. 실제로 정동영은 “자주적 동맹파”를 표방하며 자신도 ‘동맹파’ 못지않게 한미동맹을 중시한다는 것을 내세운다.
결국 정부 관료 중 누가 주도권을 쥐든 그것으로 이룰 수 있는 남북관계 개선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일 것이다.
더욱이 제국주의 간 경쟁이 심화되는 지금의 지정학적 현실을 보건대, 트럼프의 노벨평화상 욕심 등으로 설령 내년 초에 북미 대화가 성사되더라도 지속적인 안정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여전히 미국에게 북한이 ‘불량국가’로 남아 있는 것은 일본과 한국을 대중국 포위 전략에 동원하는 데(국내 반대를 잠재우는 명분) 유리하다. 그 탓에 미국은 적어도 30년이 넘도록 북한에 일부 양보를 약속한 뒤에도 뒤집는 역사를 반복해 왔다.(관련 기사 ‘정상회담과 제국주의’의 표 참조)
일각에서는 트럼프 정부의 국가안보전략(NSS)을 보며 미국의 전략 변화에 기대를 걸기도 한다. 그러나 트럼프가 중국 견제에서 한국 등 동맹에게 더 큰 구실을 맡긴다는 구상에 따르면, 한국의 군사력 강화와 한미연합훈련의 필요는 더 커지지 그 반대가 아니다. 한국의 미국산 무기 구입도 마찬가지다. 대북 제재의 역사는 해제나 완화는 까다로워도 다시 강화하기는 쉽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게다가 북한은 중·러와의 협력 강화 속에 국제적 고립에서 오는 고통이 상당히 경감됐다. 지난해 중국 열병식에 김정은이 시진핑, 푸틴과 나란히 서기도 했다. 북한이 전만큼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지 않다는 관측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문정인 명예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딜 메이킹’ 방식을 통해 파격적 해법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여전히 기대하는 듯하다. 그러나 진정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한계가 드러난 ‘자주파’ 관료들의 영향력 확대를 응원하며 기다릴 게 아니라 아래로부터 반전·반제국주의 운동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