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제정 70년:
국가보안법 철폐 — 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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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는 국가보안법(보안법) 폐지 법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종전 선언과 함께”라는 말을 붙여 둘을 연동시킨다는 인상을 주지만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국내 진보·좌파들뿐 아니라 유엔인권이사회, 국제앰네스티, 휴먼라이츠워치 등도 보안법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악법임을 지적하고 폐지할 것을 권고해 왔다. 진보적 법학자들과 변호사들은 보안법의 법리적 허구성 등을 들춰내고 비판해 왔다.
보안법이 제정된 이래 70년 동안 수천 명의 노동자, 언론인, 작가, 학생들이 구속되고 고통받았다. 보안법 수감자들 중 일부는 1998~1999년 석방될 때까지 30~40년 징역을 살아 세계 최장기수로 기록되기도 했다. 1948년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이 고문당했다(국제앰네스티, 2012년). 법무부에 따르면 1948년에서 1986년 사이 보안법으로 정치수 230명이 사형당했다.
보안법에 따르면 구체적 폭력 행위가 전혀 없어도 “찬양·고무”, “선전·선동”을 이유로 처벌할 수 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일체의 행위가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보안법은 완전히 폐지돼야 한다.
자유 못 지키는 자유주의
역대 민주당 정부들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이런 가치들과 배치되는 국가보안법은 끈질기게 유지했다.
김대중은 그 자신이 보안법 피해자로 한때 보안법 폐지를 주장했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보안법을 폐지할 수 없다고 태도를 싹 바꿨다. 노무현은 “낡은 유물[보안법]을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고 폐지를 주장하더니, 어느 순간엔가 흐지부지 없던 일로 했다. 김대중 정부 5년(1998~2002년) 동안 1164명이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그 수는 179명에 이른다(통계청, 대검찰청).
문재인 정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의당이 보안법 폐지 주장을 한 날, 청와대는 보안법 문제는 청와대에서 논의된 적이 없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문재인은 대선 후보 시절 “찬양, 고무죄에 대한 개정이 필요하다”면서도 “남북관계가 엄중”하다는 이유로 당장의 폐지는 어렵다고 단서를 달았다. 지난달 초 남북관계 개선으로 보안법 재논의 가능성을 흘렸던 민주당 대표 이해찬도 폐지나 개정을 얘기한 것은 아니라고 발을 뺐다.
이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대북사업가 2명이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증거 조작까지 드러났다. 민가협에 따르면 11월 19일 현재 양심수 11명 중 7명이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있다. 여기에는 평화적 정치 활동인 토론을 했다는 이유로 9년형을 받은 이석기 전 의원도 포함돼 있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문재인이 5·18 항쟁 기념사에서 “민주주의를 온전히 복원할 것”이라고 한 것은 위선이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조국 민정수석 등 한때 보안법 폐지 견해를 강력히 폈던 인물들도 자본주의 국가기구로 들어가면서 후퇴했다. 박원순 시장은 인권 변호사 시절에 《국가보안법 연구 1·2·3》(역사비평사)을 펴내며 보안법 문제를 신랄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서울시장에 당선되고서 “과거처럼 국가보안법이 반드시 폐지되거나 개정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며 후퇴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책세상, 2001)의 저자인 조국 민정수석도 청와대 입성 이후 보안법 문제에 침묵하고 있다.
억압 구조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은 세계 자본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노동자들을 초착취·초억압해야 했다. 이 나라 지배자들은 30년간 군사독재를 통해 세계 시장을 향한 자본 축적을 촉진하고, 자본의 노동 착취를 증대하려고 정치적 억압을 수행했던 것이다. 북한과의 냉전적 대결에 바탕을 둔 반공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억압에 도움을 줬다.
한국 국가에 아로새겨진 이런 억압 구조와 관행은 지금도 살아 있다. 1987년 항쟁을 기점으로 국가형태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점차 변경되고 지배전략도 부분적으로 변경해야 했지만, 그 뒤에도 권위주의적인 제도 일부를 존속시켰다.
1997년 IMF 공황 속에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전통적인 억압 구조를 이용해 아래로부터 치솟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제압하고자 했다. 김대중은 “경제 위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고 말해 보안법의 진정한 용도를 드러냈다. 당시 국제 앰네스티 사무총장 피에르 사네는 이렇게 지적했었다. “국가보안법과 경제 위기를 굳이 연관 짓는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경제 위기로 인한 사회적 불만을 억누르는 데 국가보안법을 이용하겠다는 의도뿐이다.”
노무현 정부 역시 집권 5년 중 첫 해에 가장 많은 사람들을 보안법으로 구속시켰다. 이때는 노무현이 미국 방문 후 광주에서 한총련 학생들의 항의를 받고,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된 때다.
문재인 정부도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우경화가 본격화되고 이에 맞선 저항이 커지면 보안법을 통한 통치에 유혹을 느낄 것이다.
진정한 표적은 무엇인가
국가보안법은 제정 이래 70년 동안 헌법에 우선하는 “실질적 의미의 헌법”의 위치에 있다. 헌법에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제19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제21조), ‘학문과 예술의 자유’(제22조) 등의 시민적·정치적 권리가 언급돼 있지만, 보안법은 이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보안법이 아직까지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체제를 유지하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은 정부가 수립된 지 4개월도 지나지 않은 1948년 12월 1일 국가 비상사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법인 형법이 만들어지기 5년 전, 민법이 만들어지기 10년 전이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잇따른 민중봉기 — 4·3 제주항쟁, 10월 여순항쟁 등 — 에 위기 의식을 느껴 민중항쟁 참가자와 남로당원들을 탄압하려 했다. 보안법으로 132개 정당과 사회 단체가 해산되고 관련 인사들이 체포·투옥됐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만든 ‘치안유지법’과 비스마르크 시절 독일의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보안법의 모델이 됐다.
지배자들은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 보안법의 반노동자·반민주적 본질을 감추려 했다.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사설에서 보안법이 “대남 적화 시도 같은 북한의 안보 위협 때문에 존재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7년 이후 보안법으로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 ‘간첩죄’에 해당하는 3조(‘반국가단체 구성’)로 구속된 사람은 전체의 1퍼센트 남짓이다.
더군다나 탈북민 유우성 씨의 사례에서 보듯이 대다수 간첩 사건은 온갖 협박과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다. 민가협은 1989년 12월 당시 복역 중인 ‘간첩’ 200여 명 가운데 최소한 100여 명이 조작 사건 피해자라고 발표했었다.
오히려 최근 정부의 남북 협력 시도는 북한 위협을 앞세운 보안법 옹호 논리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있다.
남한 지배자들에게 보안법이 꼭 필요한 이유는 ‘북한 위협’을 핑계로 내부의 적 — 즉 노동자 운동, 민중운동, 노동자 정치조직 — 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서다.
2013년 새누리당 강기윤은 이렇게 말했다.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부의 적 ...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세력들이 활보할 수 없도록 공안당국이 엄정하게 대응해야 한다.”
계급 차별적
지배자들은 보안법을 이용해 북한과 아무 연계도 없는 체제 비판도 봉쇄하려 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 운동이 반체제적 사상과 이론을 가지고 조직으로 스스로 표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실제로 많은 국가보안법 구속자들은 의견을 표현하거나 시위·집회를 개최하거나 정치 조직을 건설하거나 하려 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아 왔다. 1990년대 북한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분석·비판해 왔던 국제사회주의자들이 대대적 마녀사냥을 당한 것이 대표적이다.
‘노동자의 책’ 운영자 이진영 씨는 북한 사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게다가 그가 판매하거나 게시한 서적은 거의 다 도서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2016년 말 구속됐다. 그는 철도노조 조합원이기도 했는데, 검찰은 “국가 변란 목적 선전·선동”의 근거로 그가 철도노조의 전면적 파업을 주장한 것을 들었다.
〈조선일보〉는 “민주화 이후 정권 차원에서 국보법을 악용하는 일은 사라졌다. … 일반 국민 중에 국보법 때문에 불편을 느끼거나 억울한 피해를 당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012년 박정근 씨가 북한 계정 트위터의 글을 재미로 리트윗해 패러디 했다는 이유로 구속기소된 일이나 2007년 대학원생 김명수 씨가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북한 관련 서적 — 국회도서관에도 비치된 책들인데도 — 을 온라인에서 팔았다는 이유로 기소된 일은 이 주장이 전혀 사실이 아님을 보여 준다.(후자의 건은 무려 6년이 걸려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반면에 김정일에게 금송아지와 승용차를 선물했던 현대 정주영이나, 김정일과 직접 만난 김대중·노무현·박근혜, 김정은과 만난 문재인, 북한과의 교류를 주장한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1990년 8월 노태우 정부는 ‘남북교류협력법’을 만들어 지배자들의 북한 접촉을 허용했다. 그러나 남한 노동자들과 북한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접촉은 여전히 허용되지 않는다.
1989년 8월 평양 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 씨는 오랫동안 차가운 감옥에 갇혔지만,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있었던 박철언(당시 대통령 정책보좌관)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이런 계급 차별적 법 적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신념단속법이란] ... 분리의 법률이며, 분리의 법률은 죄다 반동적이다. 그것은 결코 법률이 아니며 하나의 특권이다. 어떤 사람이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을 다른 사람은 행해도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선량한 생각과 그의 신념이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최근의 프로이센 검열 훈령에 대한 논평〉, 1842년)
이와 동시에, 보안법은 노동자 운동과 노동자 정치조직 건설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이다. 실제로 지배자들은 보안법을 이용해 심지어 노동조합 권리까지 억압하기도 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건설 당시 수많은 교사 노동자들이 보안법으로 탄압을 받았다.
또한 전투적인 노동자들과 관련 맺으려는 좌파를 반국가단체, 이적행위 등의 명목으로 공격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겁주고 좌파를 분리시키는 효과도 낸다.
노동계급이 싸워야 한다
민주당 정부는 피억압자 운동 지도부의 지지를 확보하려고 보안법 폐지 카드를 들곤 하지만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이를 실천한 적은 없다. 좌파에 대한 탄압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공안·수구세력은 완전히 한 몸이다. 즉, 이 나라 지배자들 일반이 좌파를 탄압함으로써 노동자 운동이 반체제적 정치로 조직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자유주의자들은 극도로 소심하다고 지적했다. 남한의 자유주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1991년 5월 31일 노태우 정권은 국가보안법 제 7조를 개악해 “국외 공산 계열의 활동을 동조하는”이라는 구절을 없애는 대신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하는 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때 김대중의 민주당은 그 개정안이 통과되는 자리를 슬쩍 피해 줌으로써 개악을 방조했다. 김대중은 집권 시절 7조를 정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민주질서수호법을 보안법의 대체법으로 꺼냈다. 이미 김대중이 이끌던 평민당은 1989년에 같은 이름의 법안을 내놓아 1987년 항쟁 이후 거세진 보안법 철폐 요구에 찬물을 끼얹었다.
2004년 노무현은 이라크 (전투병) 파병 등을 추진하면서 보안법 폐지 제스처를 취해 운동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국회에서 다수를 차지했지만 보안법에는 손도 못 댔다. 여당의 일부는 대체입법을 주장했다. 이것은 내용은 그대로 두고서 법명만 바꾸는 기만적 방법일 뿐이다. 당시 민변과 민주주의법학연구회는 “보안법 3조의 반국가단체 규정을 유지하는 한 그 어떤 조문 개정도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이런 주장을 일축했다.
한편,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던 현 대통령 비서실장 임종석은 보안법의 요소를 형법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근혜가 이석기 전 의원을 내란죄 조항(토론만으로도 처벌 가능한 내란선동죄로 유죄 판결)을 무기로 탄압한 것에서 보듯이 보안법의 형법 대체·보완 주장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전혀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보안법은 조건 없이 완전히 폐지돼야 한다.
노동자 운동이 정부의 탄압으로부터 정치 좌파를 분명히 방어하고 보안법 같은 중요한 정치 쟁점들에 기권하지 않는다면, 보안법을 날려버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우리 나라 노동운동은 투쟁의 성과로 민주노총 합법화를 쟁취해 냈다.
똑같은 힘이 보안법을 완전히 폐지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현장 노동자들이 작업장과 거리에서 발휘하는 힘은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는 운동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노동자들은 10여 년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마침내 1990년 초에 정치적 자유 — 만델라 석방과 아프리카민족회의 (ANC)합법화 그리고 공산당 합법화 — 를 쟁취했다.
1989년 폴란드 정권이 무너지면서 폴란드 연대노조 노동자들도 보안법을 없애 버렸다. 1974~1975년 포르투갈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포르투갈 노동자들은 방송국을 점거해 자신들이 운영할 정도로 혁명적인 투쟁을 통해 파시스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좌파 운동의 합법성을 쟁취했다.
1974년 그리스에서도 아테네 노동자 200만 명이 실질적 총파업에 돌입해 군부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민주적 권리들을 쟁취해 냈다.
여기서 남아프리카공화국, 포르투갈, 그리스, 폴란드 노동자들의 대중 투쟁이 자유민주주의적 정권을 세우려는 노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투쟁들은 자유민주적 요구들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획득하려는 투쟁이었다.
이것은 자본가 계급의 그 어떤 부분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본가 계급 전체에 반대해 싸우는 과정 속에서 완전한 시민적·정치적 권리들을 쟁취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세계 노동계급 투쟁의 교훈은 문재인 정부 하 노동운동에도 적용돼야 한다.
이 글은 1999년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공동토론회”에서 발표한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노동자들의 참여가 핵심이다’를 상당 부분 참고하거나 일부 원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