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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들은 노동조건 개선과 공중보건을 위해 싸워야 한다

이 기사를 읽기 전에 “공공병원 확충 없이 의대 정원 확대한다?”를 읽으시오.

이 기사를 읽기 전에 “전공의 파업을 돌아보며: 노동계급의 일부다운 요구들을 제출했어야 했다”를 읽으시오.

문재인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 추진으로 촉발된 의사 파업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 정책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장호종의 ‘공공병원 확충 없이 의대 정원 확대한다?’를 보시오.)

정부는 의사들의 협조 없이 코로나 재확산을 막을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정책 추진을 일단 유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때문인지 의사협회가 벌인 8월 26∼28일 파업에 개원의(동네 병·의원)의 참여율은 10퍼센트 정도에 그쳤다.

반면, 전공의들은 정책 유보가 아닌 철회를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대형병원의 수술과 진료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

서울의 한 병원에 파업 중인 의사들의 요구가 담긴 팻말이 놓여 있다 ⓒ이미진

전공의들의 진정한 불만은 무엇인가? 의대생들은 대학 졸업 직전에 의사국가고시를 봐서 합격하면 의사 면허를 취득한다. 형식적으로는 이때부터 지도를 받지 않고도 환자 진료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련 제도를 갖춘 대학병원에 취직해 수련의(인턴) 1년, 전공의(레지던트) 3~4년 일을 하며 추가 교육을 받는다. 그 뒤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면 전문의 자격을 획득한다. 의학이 갈수록 세분화하면서 세부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기도 하고, 전공의 과정에서 충분히 훈련을 받지 못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몇 년 더 전임의(“펠로우”) 생활을 하기도 한다. 즉, 4~7년가량 병원 ‘노동자’로 살아간다.

이 기간에 그들이 노동자인 것은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자신과 자신의 피부양자들을 부양할 수 있고, 노동(자신의 노동과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노동자를 정의했다.

물론 전공의의 경우 그 내부 위계가 강해 선·후배 사이에 지시나 명령이 횡행한다. 하지만 노동에 대한 궁극적 통제권은 결국 병원 관리자들이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전공의들(과 간호사 등 다른 노동자들)의 노동으로부터 이윤을 얻는다.

전공의들의 노동조건은 사실 심각하다. 병원들의 비용 절감 노력 때문에 전공의들은 인력 부족으로 인한 과로에 시달려 왔다. 특히, 지난 20여 년 사이에 대형 병원들은 병상 수를 크게 늘리면서도 인력을 충분히 늘리지 않아 병원 노동자들의 노동강도가 지속적으로 높아져 왔다. 전공의도 그 일부였다. 인력 부족은 교육과 수련의 질도 떨어뜨렸고 임금도 의사들의 평균 소득에 비춰 매우 낮은 편이다.

또, 전공의는 근로기준법상에 정해진 각종 권리가 제약된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시간인데, 전공의법에 따르면, 병원 사용자는 전공의에게 주당 80시간까지 일을 시킬 수 있다. 심지어 연속 36시간 노동을 시킬 수 있다. 이 법은 그나마 과로사하는 전공의들이 생겨나면서 2016년에 처음 시행된 것으로, 그 전에는 기준조차 없었다.

수련 과정을 마친 전문의들을 마땅히 많이 고용해야 하는데도 대형 병원들은 비용을 아끼려고 간호사들에게 의사 업무 일부를 떠넘기거나(PA 간호사 등), 법을 어겨가며 전공의들을 (주당 80시간 이상) 계속 혹사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전공의들의 반발에는 이런 사용자에 대한 반감도 깔려 있다. 정부가 처음 의대 정원 확대 방침을 발표했을 때 병원협회는 환영 입장을 냈다. 반면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즉각 병원협회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전공의로서의 처지가 의사로서의 인생 전체로 보면 일시적 상태라거나, 그들의 소득이 평균 이상이라는 점은 전공의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는 데서 중요하지 않다. 예컨대 사무직 노동자가 훗날 관리자로 승진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현재 그가 노동계급의 일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

전공의의 ‘성공’ 지향이나 소속 직업 집단과의 동일시 같은 의식 문제도 계급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계급은 생산과 착취의 관계들 속에 자리 잡은 객관적 위치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적절한 요구들

위에서 봤듯이, 전공의는 병원 측과 계급(노동력 착취)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번 투쟁에서는 이들의 불만은 적절한 계급적 요구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원격진료를 옳게 반대하지만) 주로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을 반대한다. 한약 보험도 반대한다. 이런 요구들은 전공의의 계급 이익에 반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노동강도를 낮추고, “제대로 된 진료”를 할 수 있으려면 정부의 투자가 크게 늘어야 한다.

정부가 투자를 늘려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책임 지고 의료 체계를 운영해야 한다.

코로나19 위기가 보여 주듯이, 공공병원, 공공의료기관은 반드시 필요할 뿐 아니라 지금보다 대폭 확대돼야 한다. 올해 수련의와 전공의 과정을 거친 의사들은 이런 대규모 공공보건 조처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도 직접 겪었을 것이다. 한 소아과 전문의는 전 국민 마스크 착용, 손 소독으로 소아 감염병 환자가 크게 줄어드는 두드러진 경험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물론 한국의 공공의료가 의료적 필요보다는 행정 절차를 앞세우는 데다 정부 투자 부족 때문에 공공의료기관들이 대체로 낙후하다. 그래서 젊은 의사들이 큰맘 먹고 거기로 가 봐야 제대로 능력을 펼칠 기회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전공의들이 현재의 공공병원을 불신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의사협회의 주장처럼 이런 공공의료 기관과 기능을 축소하는 것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투자를 늘려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 대안이다. 정부가 공공병원을 대폭 늘리고 인력과 시설에 넉넉한 재정 지원을 한다면, 대중의 건강과 보건에 기여하며 제대로 된 공공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의대 정원 확대는 현재의 핵심 불만사항인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그 뒤로도 제대로 된 진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한편,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도 맞서 싸워야 하지만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직접 통제하는 민간·공공 병원 사용자들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 그래야 임금과 노동시간 등 전공의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병원 사용자들이 더 많은 전문의를 고용해 전공의들에게 충분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라고도 요구해야 한다.

한약의 보험 적용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정부의 한약 건강보험 급여화(보험 적용) 정책에도 반대하고 있다. 적잖은 전공의들은 한의학의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한약의 건강보험 적용을 반대한다. 그럴 돈으로 항암제 보험 적용이나 확대하라고 한다.

한약 보험 적용(급여화)은 단순히 무엇이 더 과학적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부담해야 할 비용 문제다.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는 것은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볼 때 오만한 견해다. 한의학도 경험 과학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서양에서 유래한 현대 의학과 본질적 차이는 없다. 후자가 자본주의 사회의 급증하는 생산력 덕분에 훨씬 많은 투자가 이뤄져, 실험으로 검증된 가설이 많고 분석이 조밀할 뿐이다.

이런 관점은 세계보건기구(WHO)조차 받아들이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한약뿐 아니라 침술과 세계 각지의 민속의학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 기초 원리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을지라도, 효과가 있으면 사용할 수 있다는 게 WHO의 입장이다.

한약이 효과가 있는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입증을 위해 정부의 한약 지원을 요구해야 한다. 어쨌든 많은 대중이 양약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 한약에 의존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경험 자체를 다 진리로 여길 수는 없지만 대중의 오랜 일상 경험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도 과학적 자세가 아니다.

한약이 건강을 오히려 해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입증돼야 할 문제다. 사실 현대 의학은 한약의 효과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수행한 바가 없다. 단순히 무관심할 뿐인데, 이는 갈수록 이윤 획득에 매몰되는 현대 의료체계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 약들의 효과와 원리를 일일이 점검하느니 돈 되는 연구에 투자하겠다는 게 자본주의 의학의 필연적 경향이다.

의사들은 돈벌이를 위해 엉터리 처방을 해서도 안 되지만,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해 겸손할 필요도 있다. 이것이 과학적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