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개혁, 허구다
〈노동자 연대〉 구독
문재인 정부는 “권력기관 개혁”이라는 구호 아래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등의 개편을 진행했다. 그런 개혁들로서 힘이 강화된 것은 경찰이다.
지난해 경찰법 등 여러 법안이 개정되면서 경찰 수사권이 강화됐다. 검찰의 경찰 지휘권이 약화됐고,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됐다. 경찰의 규모도 더 커질 예정이다.
문재인 정부는 자치경찰제를 ‘경찰개혁’으로 내놨다.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라서 정부는 홍보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자치경찰제는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경찰이라는 의미로, 경찰 본연의 성격과 기능의 관점에서 보면 의미있는 변화라고 볼 수 없다. 중앙정부가 관리하던 기존 경찰 조직을 쪼개서 자치경찰을 신설하고, 지자체 추천 인사가 참여하는 자치경찰위원회가 5급 이하 인사권 일부(승진, 전보)를 가진다는 것이다.
자치경찰제가 도입되면 경찰은 국가경찰과 자치경찰로 나뉘게 되는데, ‘자치’경찰이라는 말은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임을 표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을 국가로부터 독립시킨다는 구상은 모순이고 공상일 수밖에 없다. 경찰은 형태가 어떻든 간에 국가라는 중앙집권적 권력의 일부이자 그것을 수호하려고 존재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은 가장 지역분권화된 경찰 제도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역·기초 단위에 이르기까지, 시 정부 산하 위원회가 운영하는 지역경찰(자치경찰)이 2만여 곳에 도입돼 있다.
그러나 지난해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살해한 것도,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 시위를 일선에서 진압한 것도 모두 지역경찰이었다. 시위 참가자들은 경찰 예산 삭감 또는 경찰 폐지를 요구할 정도로 분노했다.
또, 자치경찰제가 발달했다고 알려진 프랑스에서도 노란조끼 시위가 분출했을 때 국가경찰과 함께 자치경찰이 ‘시위자들의 약탈 행위를 막는다’는 치안을 명분으로 폭력 진압에 동참했다.
영국에서는 “커뮤니티 폴리싱”(지역사회 친화적 경찰 만들기)이 일부 지역에 도입됐다. 그러나 2001년 요크 지역에서 이뤄진 한 연구는 이 정책이 도입된 이후 오히려 범죄 발생이 늘었고,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는 경찰에 대해 대중의 불만이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공권력 — 정말 모두를 위한 권력인가?
사람들은 경찰이 주민신고나 민원에 빠르고 유능하게 대처하면 ‘웬일이래?’ 하고, 무능하게 대처하면 ‘그럼 그렇지, 쯧쯧’ 한다. 또, 경찰은 범죄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범죄의 온상으로 악명 높다. 부패, 성범죄, 인종차별, 살인진압 등.
이런 불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입는 범죄 피해를 줄이려면 경찰이 필요하고, 오히려 경찰이 제 구실을 못하는 게 문제라는 상식도 공존한다.
그러나 경찰 행위의 패턴을 들여다보면 뚜렷한 계급적 편견과 편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기초생활수급자인 노인의 집에 강도가 들어 전 재산 500만 원을 훔쳐간다면 그 노인이 입은 피해는 부자들이 수억 원을 코인 투기로 날린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피해액이 적다고 우습게 보고, 수사를 제대로 안 해도 상급기관이나 언론에서 비난받을 일이 별로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경찰의 무능·무관심에도 보통 사람들이 당하는 일에 대한 무시가 반영돼 있었다.
경찰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지켜 줄 것이 더 많다고 여긴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자·권력자들의 사유재산과 그들의 권력 유지를 뒷받침하는 ‘법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이는 하층 계급에 대한 편견으로도 표현된다. 경찰은 2010년 부산 여대생 납치·강도 및 성폭행 용의자 수배전단에서 용의자 인상착의를 “노동자풍”이라고 썼다가 시정한 적도 있었다. “노동자풍”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경찰은 하나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범죄형 인간으로 지목한다. 대대적인 검문검색을 벌이는 곳도 거의 대부분 노동계급 또는 이주민 거주지다.
경찰의 하층 계급에 대한 적대성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때는 저항하는 사람들을 진압할 때다.
편견과 적대
경찰은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존재한다지만, 그 주민이 국가 권력에 도전하기 시작하면 인정사정없는 태도로 돌변해 범죄자로 취급한다. 폭력을 동원하고 때로는 ‘주민’을 죽이는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한다. 그런 식으로 2005년 농민 집회에서 두 명, 2009년 용산참사에서 다섯 명, 2015년에는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2005년 당시 경찰청장 허준영은 살인 진압에 정부가 형식상 사과한 것조차 못마땅해 하며 항의성 사표를 냈다.(그러고는 나중에 코레일 사장을 지냈다.) 2009년 용산참사 책임자인 서울경찰청장 김석기도 사퇴 후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지내고 당시 집권당의 국회의원이 됐다. 2015년 진압 책임자였던 서울경찰청장 구은수는 사퇴 후 재판에 기소됐는데도 경찰공제회 회장을 지냈다.
2009년 쌍용차 파업에 잔인하기 짝이 없는 진압 작전을 폈던 경기경찰청장 조현오는 얼마 뒤 경찰청장이 됐고, 3년 뒤 경찰청은 3년간 최고의 사건 5위로 쌍용차 파업 진압을 선정했다.
국가와 경찰 기구는 이런 식으로 개별 경찰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키고 계급 편향적 행동들을 지시한다.
경찰이 지배계급 편향적인 이유는 단지 사회 구조를 사후적으로 반영해서만은 아니다. 경찰은 태어날 때부터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지배 도구로서 고안됐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도 경찰 구실을 하는 기관들이 늘 존재했다.
자본주의 사회 초창기에 부르주아 계급과 국가는 노동계급을 통제하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대중의 큰 반감을 일으켰다. 근대 경찰은 그 대안으로서 등장했다.
가장 발달한 산업 사회였던 영국의 런던시 경찰은 19세기 중엽 차티스트 운동(영국에서 벌어진 최초의 노동계급 대중운동) 직전에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투쟁하기 시작했을 때 탄생했다. 당시 경찰은 특수 경찰관을 10만 명이나 충원해 대도시 곳곳에 근거지를 두고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한국 경찰의 기원은 일제 시대 경찰에 있다. 미군정은 일제 총독부가 물러난 자리에 새 국가기구를 세우면서 제일 먼저 경찰 기구를 재조직했다. 여기에 해방 직후 도망간 친일 경찰들을 불러들였다.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감시·통제할 수 있도록 고안됐던 일제의 경찰범처벌규칙은 해방 후 새로운 대한민국에서 경범죄처벌법으로 제정돼 경찰의 무기가 됐다.
강력범죄
그렇더라도, 경찰이 없는 사회는 범죄와 무질서로 물들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만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자들에게 이로운 관념이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이기적이고 서로 싸우며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위로부터 강하게 통제돼야 한다는 생각 또는 두려움은 국가나 경찰의 강제력이 꼭 필요하다는 믿음을 부추긴다.
경찰은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범죄 문제를 해결하지도, 줄이지도 못했다. 예컨대 2005년부터 한국 경찰 예산은 두 배 가까이, 인력은 3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국방부 전체가 52조 원 예산을 쓰는데, 경찰청이 12조 원에 육박하는 예산을 쓴다. 하지만 강력범죄 검거율은 늘 75퍼센트 안팎이다. 일반 절도 같은 민생 범죄 해결률은 더 낮아서 50퍼센트대다. 그러나 치안 유지를 빙자한 시위 대응에는 언제나 신속·정확하다.
범죄는 언제나 특정 사회 조건의 결과이다. 범죄의 수나 양상이 지역마다, 시기(시대)마다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컨대 올해 초 검찰청 발표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 이후부터 강력범죄는 준 반면 생활고형 범죄가 증가했다. IMF 직후인 2000년에도 전년 대비 절도 사건이 두 배 가까이 증가했었다.
오늘날의 범죄들은 압도적으로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조건에서 비롯된다. 주기적인 경제 위기로 실업과 빈곤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경제적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착취의 고통과 경쟁에서의 실패 등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그중 일부는 심각하게 좌절해 뒤틀린다. 모든 것을 돈을 잣대로 평가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소유 의식으로 축소시키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떨어뜨리고 인간 사이의 관계(와 성의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시킨다.
대중이 가장 두려워하는 범죄들은 대부분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벌이는 것들인데, 그런 범죄들의 배경에도 자본주의 사회가 구조적으로 양산하는 문제들이 있다.
인류 역사에서 국가의 강제력이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인류 역사의 더 많은 부분은 국가와 계급이 없는 사회였다.
마르크스는 국가의 존재는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본주의 사회처럼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고 통제해야 하는 사회에서 지배자들은 경찰 같은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국가 권력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불평등과 경제 위기, 차별과 억압 등 자본주의가 안겨 주는 고통들은 노동자·대중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투쟁에 나서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자들에게는 이를 제어할 강제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경찰은 범죄를 줄이려고 1퍼센트의 시간을 할애한다면, 나머지 99퍼센트의 시간은 그러한 범죄를 끊임없이 양산하는 체제를 보호하는 데 쓴다.
경찰은 지배계급이 휘두르는 ‘몽둥이’이고, 개혁해야 할 필요악이 아닌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