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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저지른 ‘나크바(재앙)’ 75년:
“불의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건국 직후 고향에서 쫓겨나 피난길에 나선 팔레스타인 난민들

“저는 난민촌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검문소와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매일같이 봐야 했죠. 이것이 제가 경험한 유일한 삶의 방식입니다.”

요르단강 서안 팔레스타인 자치구에서 구호 활동을 하는 마야르 씨가 〈소셜리스트 워커〉에 말했다.

이스라엘 점령하의 마야르 씨와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들의 고향을 앗아간 ‘나크바(재앙)’는 오래된 기억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현실이다.

마야르 씨의 직장이 있는 도시 헤브론시(市)에서는 이스라엘 국가의 인종차별적 법률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견디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헤브론시의 텔루베이다 주거 지구에 사는 니스린 하솀 앗제 씨는 팔레스타인인 예술가다. 앗제 씨는 이스라엘의 인종차별적 법과 국경 장벽, 검문소가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을 지옥도로 만들기 위한 것임을 뼈에 사무치게 경험한다.

앗제 씨는 인종차별적 법과 이스라엘군의 폭력으로 2015년 남편 하솀 씨를 잃었다.

이스라엘군이 시위대에 발사한 최루탄이 하솀 씨에게 심장 마비를 일으켰다.

인종차별적 법 때문에 특정 팔레스타인인 거주 구역에는 구급차가 드나들지 못한다. 그래서 하솀 씨는 생사가 달린 응급 조치를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도심의 가장 가까운 병원에 가려고 검문소로 서둘러 하솀 씨를 날랐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이 검문소에서 그들을 가로막았다. 사람들은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하솀 씨는 병원에 도착한 후 곧 숨졌다.

죽음

앗제 씨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간 그 인종차별적 법들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이 견딜 수 없는 지경이라고 전했다.

“저희 동네는 분리 장벽과 군 검문소 천지에요. 분리 장벽 때문에 친척들이 서로 만나지도 못해요. 지금 다른 팔레스타인 도시로 가려면 험한 길로 빙 돌아가야 해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큰 도로에서 차를 타는 것이 금지돼 있습니다. 걸어다닐 수만 있어요. 심지어 구급차도 이 동네에 못 와요.

“수확철이 되면 수확 작업을 못하게 합니다. 올리브 수확철에 특히 그래요.

“이스라엘 군인들은 정착민들이 수확을 막도록 내버려 둬요. 우리를 때리기도 하고요.”

마얀 씨 역시 헤브론으로 출근하려면 걸어서 검문소를 세 개나 통과해야 한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겁 주려고 소지품을 뒤진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런 인종차별을 당하는 동안 유대인 정착민들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 이 도시의 일상적 풍경이라고 마얀 씨는 전했다.

“출근해서 보면 유대인 정착민들은 도시를 활보하고 있어요. 무기를 가지고 다녀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죠.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은 길을 가다 공격당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털끝 하나라도 손대면 체포되거나 심지어 두들겨 맞을 수도 있습니다.”

마얀 씨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멀지도 않은 곳을 방문하기 위해 점령지 여기저기를 거쳐야 하는 고초에 대해 알려 줬다.

그리고 이것은 팔레스타인 전역에 흩어진 팔레스타인인들을 서로 협력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스라엘 국가의 수법이라고 지적했다.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려 한 적이 있어요. 그러려면 허가증을 신청해야 하죠.

“허가증 신청은 거부되기 십상입니다. 성씨(姓氏) 때문에 거부당할 수도 있어요. 특정 정당에 가입했거나 구속당한 적이 있어도 거부당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도 거듭 불심 검문을 받고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았죠.

“외국인들과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제 옆을 지나다녔지만 그들은 검문을 받지 않았어요. 아랍계와 무슬림만 검문을 받았죠.”

헤브론은 1997년에 두 구역으로 분할됐다. H1구역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관할이고, H2 구역은 이스라엘군 관할이다.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조인한 헤브론 협정에 따르면, 유대인 정착민에게 헤브론의 20퍼센트가 할애되고, 나머지 80퍼센트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관할하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가는 헤브론에 대한 통제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통제

헤브론시에는 아랍계 주민 약 30만 명이 살고 있고 도심에 극소수 이스라엘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그곳에 배치된 군인 패거리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

헤브론 외곽 지역에는 유대인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삶의 터전에서 쫓아내는 데 더 극성이다. 꾸준히 우경화해 온 이스라엘 정부의 비호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학교 교장인 림 알샤리프 씨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는 도시 전체가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있습니다.

“H2 구역은 포위되어 검문소로 에워싸여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이 거기에 가면 어떤 길목에는 발도 들이지 못합니다.

“이스라엘군 약 2000명이 헤브론 도심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약 500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줌의 정착민을 그토록 많은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거죠.

“팔레스타인인들은 안심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유대인 정착민이나 점령군이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앗제 씨와 알샤리프 씨는 헤브론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폭력과 억압이 더 심해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인종차별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계획적으로 살해당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일하고 기도할 권리가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저희 땅을 계속 훔쳐 가고 있습니다.” 앗제의 말이다.

알샤리프도 끄덕이며 이렇게 덧붙였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은 팔레스타인의 절반이 안 됐습니다.

“이제 팔레스타인 전체가 점령하에 있어요.

“우리는 그들의 허락 없이는 떠날 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살던 곳에서 쫓겨나 전 세계로 흩어졌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거죠.

“점령은 계속 악화되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안 좋은 상황에다 실업률까지 높아진 가운데, 주로 청년들이 다른 방식의 저항을 모색하고 있다고 마얀 씨는 전했다.

“나이 든 세대의 일부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신뢰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청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평화 회담에 참가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을 경험했습니다.

“현재 나블루스·제닌 같은 곳들에서 몇몇 청년들은 무장 저항을 해법으로 여깁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점령군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양쪽 모두의 공격을 받고 있어요.

“자치정부는 심지어 그런 청년들을 보호하려 한다면서 체포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페이스북에 쓴 글 때문에 자치정부나 점령군에 체포된 친구들도 있어요.

“청년들은 자치정부가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습니다.”

마야르·앗제·알샤리프 세 여성 모두 평화 협정이나, 이스라엘 국가나 제국주의 열강에 굴종하는 세력은 팔레스타인인의 고통을 끝낼 수 없다고 말했다.

희망은 팔레스타인 안팎 모두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다.

앗제 씨는 2021년 대중 시위와 파업을 상기시키며, 그런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이 여전히 이스라엘 국가를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불의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칠흑같은 밤이 끝날 거에요.”

재앙으로 탄생한 이스라엘 국가

1948년 5월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건국 선언문에 서명했다. 시오니즘 운동은 환호작약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이것이 ‘나크바’, 즉 재앙에 다름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건국으로 팔레스타인인 약 100만 명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이는 팔레스타인인 억압에 기초한 [인종 분리 체제] 아파르트헤이트의 기틀을 닦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여기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스라엘 건국 몇 달 전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 절반 이상을 식민지 점령자들에 넘기는 계획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건국자들은 그 계획을 따를 의사가 없었다.

1949년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침공해 팔레스타인 전체가 자신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래로 역대 이스라엘 지도자들 모두 이스라엘의 지배력을 확장하고 강화하려 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왔다.

그에 발맞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협하고, 박해하고, 삶의 터전에서 내쫓기 위한 인종차별적 수법들을 개발해 왔다. 이런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