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법 거부권 후폭풍:
시장화된 보건의료 시스템의 난맥상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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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거부권 행사로 국회에서 재표결 절차를 밟은 간호법이 결국 부결됐다.
윤석열은 대선 공약을 파기하면서도 사과는커녕 간호법을 의료체계 붕괴의 주범으로 비난했다. 많은 간호사가 이에 분노했다.
거부권 행사 직후 5월 19일에는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가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대한간호협회 주최로 열렸다. 의료기관 안팎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대거 연가를 내고 참가했고, 간호대 학생들도 많이 참가했다.
간호협회는 내년 총선에서 간호법 부결에 동의한 국회의원 낙선운동을 벌이고 간호법 제정을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간호사들이 현행 의료법상 간호사에게 허용되지 않는 업무(‘불법 의료행위’)를 거부하는 준법 투쟁도 지속할 예정이다.
간호사들이 준법 투쟁을 선언한 이후 ‘불법 의료행위’ 신고가 닷새 만에 1만 2000건을 넘어섰다.
의료기관에 만연한 불법 의료행위는 시장화된 보건의료 시스템의 난맥상을 잘 보여 준다. 의사 부족과 의료기관의 이윤 추구 때문에 피고용자인 간호사들은 온갖 불법 의료행위를 하도록 내몰리고, 어떤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의료 상업화와 의료기관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 의료기관은 노동자들에게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하고, 이는 의료서비스 악화로 이어지게 된다. 역대 정부들은 복지에 충분한 재정을 투여하지 않고 시장화된 보건의료 시스템을 유지하며 의료기관의 불법 의료 관행을 묵인해 왔다.
현재 간호사들의 준법 투쟁은 신고와 언론 발표를 통해 인력 부족, 특히 의사 부족에 따른 간호사들의 업무 과중과 진료보조(PA) 간호사의 모호한 법적 지위 문제를 부각하는 정치적 효과를 내고 있다. PA 업무가 별도 면허로 인정되는 해외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의료기관이 의사 부족을 값싸게 메우는 방편으로 간호사에게 임의로 의사 업무의 일부를 떠넘겨 왔고, 정부도 이를 묵인해 왔다.
간호사들의 준법 투쟁으로 정부가 의사 부족, 특히 필수의료 의사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최근 응급실 뺑뺑이 사건으로 환자가 사망하는 일이 잇따른 것도 이런 여론을 키우고 있다.
5월 25일 보건의료노조는 간호법 쟁점이 던진 3대 핵심 과제로 ‘직종간 업무범위 명확화, PA 간호사 불법의료 근절, 간호사당 환자비율 1:5 등 간호사 처우 개선’을 꼽으며 정부에 해결을 요구했다. 의사인력 확충, 간호사 처우 개선책 실행을 촉구하고, 직종별 적정인력 기준 마련도 요구했다.
보건의료노조는 현장에서 불법의료 관련 부당한 업무 지시를 금지시키는 활동을 전개하고, 6월 8일 서울 도심에서 5000여 명이 참가하는 집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정부가 6월 말까지 구체적 계획을 내놓지 않으면 7월에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불법 의료행위 거부
윤석열의 간호법 거부권 행사 뒤 보건복지부 장관 조규홍은 “간호사 처우 개선은 국가가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는 재정 긴축의 일환으로 공공기관의 인력 감축과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국립대병원의 정원을 동결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국립대병원 의료인력은 단 한 명도 증원되지 못했다. 5월 23일 공공운수노조와 보건의료노조 소속의 전국 13개 국립대병원 노조는 기자회견을 열어 국립대병원 정원 동결을 규탄했다.
“새로운 의료, 요양, 돌봄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보건복지부의 약속도 사기에 가깝다. 이미 공공의료와 노인 복지 예산이 대폭 삭감된 상황이고, 부자 감세와 경기 침체로 세수가 크게 부족해지면서 더한층의 복지 삭감이 예고되고 있다. 며칠 전 윤석열이 사회보장 전략회의에서 현금 복지 축소, 사회서비스 시장화를 강조한 것은 이를 나타낸다.
간호법이 정치적 쟁점이 되면서 간호사 처우 개선과 함께 고령화에 대응하는 의료·돌봄 서비스를 확충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물론, 민주당도 서민층을 위한 대책을 별로 내놓지 않았다. 실질적인 간호사 처우 개선책은 거의 들어 있지 않은 간호법을 통과시키면서 생색을 냈을 뿐이다.
노동운동이 복지 삭감에 반대하며 공공서비스 확대, 인력 충원 등의 요구를 내걸고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를 건설하는 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