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를! 12월 8일 집중 행동의 날:
제1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를 기리며 저항과 연대의 지속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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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티파다 인티파다! 알란나하 인티파다!”(우리는 인티파다(항쟁)를 선포한다!)
12월 8일(일) 오후 2시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맞은편에서 구호가 울려 퍼졌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팔연사)이 주최한 집중 행동의 날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이날 집회는 윤석열의 계엄 시도가 미수에 그친 후에 열린 팔연사의 첫 집회로, 불안정한 한국 상황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인·아랍인들을 비롯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700여 명이 참가했다.
전날 여의도에서 열린 윤석열 퇴진 100만 집회에 장시간 참가했던 사람들도 높은 기세로 참가했다. 수도권뿐 아니라 부산·울산·대구·강원·충청 등지에서 온 이들에게서 거대한 항쟁의 일부라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참가자들은 1987년 12월 9일 시작된 팔레스타인 대중 항쟁 제1차 인티파다를 기리고 투지를 다졌다.
첫 발언자인 재한 팔레스타인인 나심 씨는 “요즘 한국의 상황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투쟁에 … 한마음으로 연대하는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인티파다의 의미를 되새겼다.
“제1차 인티파다 때 팔레스타인인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 살아서 저항하고 있음을 시온주의 점령군과 전 세계에 보여 주기 위해 거리에 나섰습니다. 민중은 점령군의 온갖 무기에 맞서 불굴의 정신으로 가슴을 펴고 돌멩이를 들고 … 3년을 내리 투쟁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 급진적 변화의 순간이었던 이 항쟁[에] … 제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 대부분이 참가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인티파다의 정신은 오늘날 시온주의 지배자와 전 세계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해방의 정의, 귀환의 권리를 믿는 저항의 정신입니다.
“팔레스타인인인들은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모든 땅이 우리의 것임을 분명히 할 때까지 끝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김인식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은 윤석열의 쿠데타 시도에 노동자·시민들이 맨몸으로 맞서고 토요일에 100만 명 규모의 집회를 연 소식을 전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그가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지지하며 싸우는 사람들에게 윤석열은 적입니다” 하고 외치자 대열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김인식 운영위원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과 글로벌 연대 운동이 이스라엘을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고 있다고 지적했다. “레바논 휴전은 이스라엘의 패배입니다. … 이스라엘 군대는 단 하나의 레바논 마을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레바논 휴전은 네타냐후가 가자 공격에 다시 집중하려고 책략을 부린 것이 아닙니다. 레바논인들의 저항에 밀리고 글로벌 연대 운동의 압력을 받아 휴전한 것입니다.
“현재 가자지구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가자 협상은 레바논 협상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고향에서 쫓겨나 텐트촌 생활을 하면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도 계속돼야 합니다.”
이정표
집회에서는 지난 1년 2개월 동안 전국 각지와 대학 캠퍼스에서 연대를 건설해 온 저항의 주역들도 연설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파리하 영남대 교수는 대구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건설해 온 주역이다. 그녀는 방글라데시 독립 투쟁의 역사를 소개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옹호했다.
“2024년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국가들이 힘을 합쳐 한 민족을 말살하려 드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저항에 나선 사람들을 테러리스트, 음모꾼이라고 비방합니다. 그러나 저는 자유를 사랑하는 방글라데시인으로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편에 섭니다.”
파리하 교수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수출한 한국 정부를 비판하며 저항과 연대를 호소했다. “한국은 엄혹한 시기를 견디며 고된 투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한 영광스런 역사가 있는 나라입니다. 권력에 굶주린 소수가 탐욕으로 그 역사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포기하지 맙시다. 계속 시위를 벌이고, 기도하고, 이스라엘을 보이콧합시다. 진정한 역사를 지키고 우리 투쟁을 이어 갑시다. 팔레스타인이 해방될 때까지 운동을 지속합시다.”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 사람은 1년 동안 대학가에서 운동을 건설해 온 대학생들이었다. 팻말을 들고 나란히 선 대학생들 가운데에서 모로코에서 온 유학생 사미아 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많은 아랍인들이 그렇듯 팔레스타인 연대가 인간의, 또 종교인의 의무라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모로코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벌여 온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도 매주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매우 감동했습니다. 여러 대학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동아리가 건설돼 활동을 지속해 온 것이 너무도 놀랍고 자랑스럽습니니다.
“이 운동을 위해 노력한 여러분 모두에게, 특히 대학에서 청춘을 바쳐 이 운동에 헌신하는 대학생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알라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갈 길
집회 참가자들은 이스라엘 대사관 맞은편에서 출발해 종로 거리와 미국 대사관 앞을 지나 도심을 누볐다.
한국인 대학생, 히잡을 쓴 알제리인 유학생, 이집트인 청년이 구호를 선창하며 대열을 이끌었다. 감동한 참가자 몇몇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미국 대사관 앞을 지나며 한껏 야유를 퍼부은 대열이 광화문을 거쳐 인사동거리로 접어들자 시민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행진을 마치고 이스라엘 대사관 맞은편으로 돌아온 대열은 기세 좋게 구호를 외쳤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외치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점령과 인종 학살에 맞서 76년간 저항해 온 팔레스타인인들이야말로 우리에게 갈 길을 보여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가자들은 앞으로도 주말마다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 올 것을 결의하며 집회와 행진을 마무리했다.
재한 팔레스타인인이 인티파다를 말하다: “인티파다가 아니었다면 저희는 스스로를 팔레스타인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리만 루미, 인터뷰·정리 양선경
“제1차 인티파다는 일터로 가던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스라엘이 살해한 것을 계기로 시작됐습니다. 그저 가족을 먹여 살리려던 아버지들을 이스라엘이 살해한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처한 상황을 보여 줍니다. 팔레스타인인의 생존 그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저항인 것이죠.
“그러나 감사하게도, 팔레스타인인들은 땅을 포기하길 거부하고 저항에 나섰습니다. 무장하고 저항하기도 했어요. 물론 여성과 어린이와 남성 모두가 그 저항의 일부였습니다.
“‘돌멩이 인티파다’라고 불리는 이 항쟁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저항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삶을 이어 갈 것임을 이스라엘에 보여 줬습니다.
“인티파다가 대중 저항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팔레스타인인들과 타협[오슬로협정]하라고 이스라엘을 압박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이 평화를 원했던 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슬로협정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만족스런 내용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이는 저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두려워했음을 보여 줍니다.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을 영원히 바꿔놨습니다. 인티파다 덕에 저는 ‘팔레스타인’에 살 수 있게 됐고 제가 팔레스타인인이라고 적혀 있는 여권도 생겼지요. 물론 팔레스타인인들은 그 정부가 하는 일 99.9퍼센트를 나쁜 일로 보고 지지하지 않지만요.“
“그 전까지 우리는 이스라엘 군정 치하에 있었습니다. 집 한 채 지으려 해도 군정의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그래서 제게는 인티파다가 매우 뜻깊습니다.
“인티파다가 아니었다면 저희는 스스로를 팔레스타인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살라흐엘딘 한국외대 교수가 인티파다를 말하다: “인티파다로 모든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게 됐습니다”
인터뷰·정리 오수민
“바로 전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은 1973년에 있었습니다. 1973년은 제가 태어난 해이기도 합니다.
“제가 여섯 살 때인 1979년에 이집트 정부가 이스라엘과 협정을 맺게 됩니다. 그러면서 저희 세대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서서히 잊어 가기 시작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은 1987년 제1차 인티파다가 시작되면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이 아랍인들에게로 돌아왔어요. 모든 아랍 사람들이 다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제 세대가 특히 그랬지만, 새로운 세대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은 SNS가 있어서 참 좋아요. 인터넷을 통하면 모두가 어디를 가든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를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정말이지 팔레스타인은 인티파다를 경험한 제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미가 남다릅니다. 오늘날 새 세대에게도 그럴 것입니다.
“앞으로 매해 우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과, 오늘처럼 인티파다를 기리는 집회를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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