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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도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했다

누가 1947년에 이스라엘 건국을 지원했을까? 흔히 미국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소련도 이스라엘 건국을 지원했다.

1947년 유엔은 결의안 181호를 채택했다. 유엔 결의는 중동 통제를 둘러싼 열강 간 거래의 산물이었다. 그 거래 과정에서 스탈린이 통치하던 소련이 뜻밖에도 시온주의자들의 동맹으로 등장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소련 상임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한 연설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단일한 아랍-유대인 국가의 수립] 계획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나면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 악화를 고려해 … 한편에는 유대 국가가 다른 한편에는 아랍 국가가 있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국가로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것을 허용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이 결의안이 채택된 뒤 몇 달 동안 아랍 산유국 정부들과의 관계가 위태로워질까 봐 조심했다.

그러는 사이에 소련은 시온주의자들을 외교적‍·‍군사적으로 전폭 지지했다. 유엔 주재 초대 이스라엘 대사를 지낸 아바 에반은 그 시절의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소련이] 미국보다 더 한결같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지했다.”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인 인종 청소에 착수하자 소련은 그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스탈린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한 무기 공급을 명령했다. 그 무기들이 시온주의 무장 조직인 하가나를 무장시켰다. 하가나는 그 뒤 이스라엘 방위군(정규군)의 주력이 됐다.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구리온(이스라엘 초대 총리)이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자 소련은 그 사흘 뒤에 이스라엘 국가를 최초로 법적으로 승인했다.

1949년 5월 1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노동절 행사에 등장한 스탈린 초상화 ⓒ출처 이스라엘 정부

주변 아랍국들이 독자적인 유대인 국가의 수립을 반대해 군사적으로 개입하자,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한 무기 제공을 늘렸다. 심지어 제2차세계대전 말에 노획한 독일 비행기들을 시온주의자들에게 보냈다.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소련의 당시 위성국인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훈련을 받았다.

소련이 제공한 무기들은 이스라엘에 결정적 도움이 됐다. 벤구리온은 이렇게 말했다. “장담하건대 체코슬로바키아가 무기를 보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한 달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골다 메이어(1969~1974년 이스라엘 총리)도 이렇게 회상했다. “첫 여섯 주 동안 우리는 하가나가 동유럽에서 구매한 포탄‍·‍기관총‍·‍총알에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겪은 비극적 인종 청소도 스탈린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했다.

1948년 12월 소련은 동유럽 위성국들과 함께 유엔 결의안 194호에 반대표를 던졌다. “고향으로 돌아가 이웃들과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은 허용돼야 한다”는 결의안이었다.


스탈린은 왜 시온주의자들을 지원했나?

1947~1948년 미국‍·‍소련‍·‍시온주의자들은 각각의 이해관계에 얽혀 있어 이스라엘 건국 지지 동맹을 맺었다.

1947년 지중해‍·‍중동‍·‍그리스‍·‍터키‍·‍이란 등지에서 미‍·‍소 제국주의 양국의 전후 영향력 재편 투쟁(냉전)이 시작됐다.

미국은 석유 매장량이 풍부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중동에서 영국을 밀어내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다.(영국은 여전히 이라크‍·‍트랜스요르단‍·‍이집트의 군주들을 자국의 영향권하에 두고 있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이스라엘 ㅡ 소련 형제애 만세” (1949년 이스라엘의 한 시온주의 정당이 발행한 포스터)

소련은 유대인 국가가 영국을 팔레스타인 밖으로 쫓아낼 유용한 지렛대가 될 거라고 봤다.

스탈린은 요르단강 서안 지역과 시나이 반도를 포함하는 “대(大)이스라엘”을 원하는 유대인을 이용해 영국에 맞서는 한편, 소련의 중동 거점을 마련하고 싶어 했다.

당시 소련 외무장관(1차: 1939~1949년) 바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이 계획을 적극 대변했다. 몰로토프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에도 앞장섰던 자였다.

몰로토프는 소련이 아랍 공산당 지지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기력한 아랍 공산당이 아니라 시온주의자들을 지지해야 영국 제국의 옛 중동 식민지 중 큰 덩어리를 잘라먹을 수 있다고 봤다.

따라서 스탈린의 중동 정책은 마르크스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었다. 스탈린은 오로지 소련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현실 정치”(근시안적 의미의)에 충실했을 따름이다.

1920년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채택된 ‘식민지와 민족 문제’에 관한 결의안과 비교해 봐도 이 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피억압 민족의 노동계급 대중은 계속 희생돼야 한다는 거짓말, 연합국과 그 국가의 부르주아지에게 커다란 자산이 되는 거짓말을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자들이 독립적인 유대인 국가를 수립한다는 명목으로 영국의 멍에에 메어 있는 팔레스타인의 노동계급 사람들과 아랍인들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유대인은 여전히 소수다.”


스탈린과 시온주의자들의 밀월이 깨지다

스탈린의 팔레스타인 구상은 결국 헛된 꿈이 됐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냉전의 필요에 부합된다고 판단했다.

이제 미국의 중동‍·‍동지중해 정책은 이스라엘에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쏟아부어 이스라엘을 자국의 영향권하에 두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스라엘 국가도 이내 미국과의 경제적‍·‍군사적‍·‍정치적 관계를 발전시켰다.

골다 메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유대계 미국인에게서 받은 돈으로 소련제 무기를 구매할 수는 없다.”

사실, 차임 바이츠만과 벤구리온 등이 소련 지배 관료에 지원을 요청했던 제2차세계대전 동안에도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이미 서방에 친화감을 느꼈다.

런던 주재 소련 대사(1934~1943년)를 지낸 이반 마이스키가 1943년 귀국 도중에 팔레스타인을 방문해 시온주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마이스키는 몰로토프에게 이 만남을 보고했다.

“그들은 매우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러시아의 대학들이나 김나지움을 졸업했습니다. 우리는 고전 문학과 러시아어를 말했지만, 그들은 미국식 영어로 생각합니다.”

1차 중동 전쟁(1948~1949년)이 끝난 뒤 시온주의자들은 미국 중시 외교로 확실하게 선회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소련의 지원을 얻어 내기 위해 매우 계산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소련과 시온주의자들의 밀월은 끝났다. 그제서야 스탈린의 대(對)이스라엘 정책도 비판적으로 바뀌었다.


스탈린이 시온주의를 지지한 대가를 치른 아랍 공산당

1947~1949년 스탈린이 시온주의자들을 지원한 결과는 팔레스타인인 대량 학살과 강제 이주, 아랍 좌파의 위기였다.

당시 아랍 지역에는 제국주의와 억압적인 아랍 정권에 대항할 잠재력을 가진 세력이 있었다. 노동자‍·‍농민‍·‍청년이 투쟁했다.

가령 1948년 1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알 와트바(“도약”) 봉기가 일어났다. 이라크 국왕이 1930년에 체결한 영국-이라크 협약을 연장하려 하자 항의 운동이 분출한 것이다(이 협약에 따라 이라크는 영국의 피보호국이 됐다). 노동자‍·‍학생‍·‍도시빈민이 투쟁에 참가했다.

이라크 공산당은 (국왕에 맞서 민족 부르주아지와 전략적으로 동맹해야 한다는 인민전선 노선을 따르면서도) 대부분의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5월에 1차 중동 전쟁이 벌어지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알 와트바 봉기를 진압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스탈린은 1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스탈린은 ‘제국주의와의 투쟁’이 오직 위로부터만 올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랍 군주들이 영국 제국주의의 대리인이었다면 소련은 이스라엘 국가를 지원해 대항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이스라엘 국가가 팔레스타인인의 피로 건설될지라도 말이다.

그로미코는 유엔 연설에서 제2차세계대전 동안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를 들먹이며 이런 상황을 합리화했다.

“유대인은 많은 역사 기간에 팔레스타인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습니다.

“전쟁[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대인 인민은 다른 인민보다 훨씬 고통을 겪었습니다. 나치 사형집행인들에 의해 비명횡사한 유대인 수는 어림잡아 6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그 때문에 유대인은 자신의 국가를 수립하려고 힘쓰고 있고, 그런 권리를 부인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로미코의 연설은 역겨운 위선이다. 1930년대 스탈린이 지도한 소련 국가자본주의의 특징 하나는 유대인 혐오였다.

그로미코가 유엔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찬성하는 연설을 하자,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군중이 공산당 지구당사로 몰려가 항의했다.

팔레스타인 공산당은 그 안에 아랍계 당원과 유대계 당원이 함께 있었고 단일 국가 방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공산당이 친소 정당이었기 때문에 지지가 크게 줄었다.

전통적으로 대중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집트‍·‍레바논 등지의 공산당들도 영향력이 감소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보기에 아랍 공산당들의 위기쯤은 소련의 중동 존재감을 보장하는 비용으로 치를 만한 대가였다.

그런데 스탈린은 과거에 종종 그랬듯이 180도 입장을 바꿨다. 1949년 스탈린은 시온주의 지지 입장에서 노골적인 유대인 혐오 입장으로 선회했다.

1953년 죽을 때까지 스탈린은 유대인 혐오 히스테리를 부추겼다. 가령 1952년 7월 스탈린은 제2차세계대전 동안 정부가 지원해 창설된 반파시스트 유대인 위원회 위원 20명을 반정부 스파이 활동 혐의로 처형했다.

유대인을 차별하고 탄압하는 스탈린의 정책에 환멸을 느낀 소련의 많은 유대인들이 시온주의로 넘어갔다. 스탈린의 유대인 혐오 정책은 시온주의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강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