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정권들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인들을 배신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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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아랍-이슬람 합동 특별 정상회의’가 열렸다. 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카타르·이란 등 57개국 정상들이 그 회의에 참석했다.
정상회의 결의문에서 그 정상들은 이스라엘이 가자 공격을 “자위권”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비판하고, 학살 중단과 인도적 지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번지르르한 말 뒤에 그들이 숨기려고 한 진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팔레스타인의 대의와 염원을 지금껏 배신해 왔다는 것이다.
아랍 정권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을 막기 위한 동원 수단이 얼마든지 있다. 이집트 정부가 수에즈 운하를 봉쇄한다고 치자.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 등이 이스라엘을 후원하는 국가와 기업들에 석유 공급을 중단한다고 치자.
중동 석유에 의존해 온 서방의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릴 것이다. 아시아-유럽 간 교역의 핵심 통로인 수에즈 운하가 막히면 더 많은 국가들이 애를 끓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랍 정부들은 그럴 의사가 전혀 없다. 오늘날 아랍 자본주의도 세계 자본주의에 통합돼 있고, 따라서 아랍 자본가 계급도 국제 자본가 계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지난 40년 사이에 중동, 특히 걸프 연안 국가들은 역동적인 자본 축적의 중심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면서 이 국가들과 서방 제국주의가 맺는 관계도 변했다.
아랍 자본주의의 성장은 현지 국가들의 적극적인 관여와 지원 속에 이뤄졌다. 예컨대 1980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자국에서 석유를 채굴해 온 아람코를 미국 기업들로부터 인수해 국유화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석유화학·알루미늄·철강·건설·금융 등 분야에서 자국 자본가들의 성장을 촉진했다.
이제 사우디아라비아는 고유의 이해관계가 있는 국제 무대의 주요 행위자가 돼, 전 세계를 상대로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다.
아랍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만큼 도시 인구가 급증했고 노동계급 인구도 대폭 늘었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이 계속 커져 왔고, 특히 신자유주의가 불평등을 가속시켰다.
오늘날 아랍 인구의 압도 다수가 불안정하고 낮은 임금을 받으며 근근이 살아간다. 2019년 현재 아랍 10개국 4억 명 중 2억 5000만 명이 빈곤층 또는 사회적 취약 계층으로 분류된다.
세계화
극소수 사람들이 차지한 부는 평범한 아랍인의 삶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해외 투자처를 찾아 움직인다. 카타르 투자청은 4500억 달러 넘는 돈을 굴리는 세계 금융과 부동산 시장의 큰손으로, 바클레이은행, 크레디스위스, 폭스바겐, 포르셰 같은 거대 기업들의 대주주다.
아랍에미리트는 무려 1조 8890억 달러의 해외 자산을 보유했는데, 그 투자 대상에는 지금 가자지구 공격에 쓰이는 무기들을 제작하는 군수 업체 시코르스키와 보잉이 있다.
이처럼 아랍 지배자들은 서방 자본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더욱 서방 제국주의와 대결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이해관계는 그저 서방과의 정치적·경제적 관계를 자신들의 이윤과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조율하는 데 있다.
2020년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은 미국의 주선으로 이스라엘과 아브라함 협정을 맺고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이란을 경계하며 이스라엘과 외교 협정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완전히 뒷전이었다. 실은 이런 수교 자체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배신이다.
9월에는 미국 바이든 정부와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인도·유럽연합 등이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MEC)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 야심 찬 경제 통합 구상에는 인도양과 동지중해까지를 항구와 철도 등으로 잇는 계획이 포함돼 있다. 아랍에미리트-요르단-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육지에서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관계 개선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의 이번 무장 저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외교 협상과 IMEC에 찬물을 끼얹었다.
반혁명
오늘날 중동에는 국제 자본가 계급의 일부인 현지 지배계급과 국제 노동계급의 일부인 아랍 대중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계급 적대가 자리잡고 있다.
아랍 정권들이 내뱉는 입발림 소리와 달리,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 지배자와 대중 사이를 더 첨예하게 갈라놓는 쟁점이다.
2011~13년 아랍 혁명을 겪으며 아랍 지배자들은 더욱더 보수적·반동적으로 변모한 듯하다. 그들은 혁명을 두려워하며 이에 맞서 서로 손잡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이집트 군부가 혁명을 제압하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사우디아라비아 군대는 직접 바레인으로 가서 혁명 운동을 진압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2011~13년 아랍 혁명의 핵심 쟁점이었다. 튀니지에서 독재자를 무너뜨린 사람들은 거리에서 팔레스타인 독립을 외쳤다. 이집트에서는 수만 명이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몰려가서 대사관이 문을 닫게 했고, (봉쇄된 가자지구의) 이집트 쪽 국경 개방을 요구했다.
반면 혁명의 패배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타격을 줬다. 아랍 지배자들은 혁명이 두렵고 증오스러울수록 팔레스타인 문제가 국내 대중의 불만과 만나지 않게 단단하게 단속하고자 했다.
이란은 다른가?
미국과 적대하는 이란 정권은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아랍 정권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친구가 아닌 건 마찬가지다. 이란은 자국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억압할 뿐 아니라, 2011년 시리아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전투기까지 동원해 공격한 아사드 정권을 후원하고 있다. 지역 내 영향력을 넓히는 데 아사드 정권의 지지가 필요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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