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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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3월 20일 같은 제목으로 노동자연대TV가 연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에서 탈라트 아흐메드가 한 발제와 정리 발언을 글로 옮긴 것이다. 인도계 영국인 마르크스주의자인 탈라트 아흐메드는 에든버러대학교 남아시아역사 부교수이자 ‘인종차별에 맞서자’ 스코틀랜드지부 소집자이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다. [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팀이 덧붙인 것이다.
오늘의 주제 ‘여성과 이슬람’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굉장히 중요한 쟁점입니다. 한국에서도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슬림 여성은 순종적이고, 이등 시민으로 취급받고, 집 안에 갇혀 살고, 베일 착용을 강요당하는 신세라는 담론이 팽배합니다.
무슬림 여성에 대한 서구의 편견
영국에서는 이슬람이 여성차별적 종교이고 여성을 사회에서 분리시키며, 이는 무슬림이 서구 사회로 통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주장이 많습니다. 무슬림 남성 깡패들이 백인 여성을 납치해서 성폭행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독일의 극우·파시스트들은 독일로 온 아랍계·튀르키예계 무슬림 남성들이 백인 여성을 성폭행할 것이라면서 무슬림 이민자 유입을 막아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몇몇 유럽 국가들은 여성의 베일 착용을 금지합니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부상하자 서구 언론들은 이를 ‘무슬림이 유럽을 정복하려 한다’는 식의 이슬람 혐오적 악선동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몇몇 영국 보수당 정치인들은 버밍엄, 이스트런던, 브래드퍼드 같은 [이민자가 많거나 비교적 낙후한] 영국 도시들이 샤리아(이슬람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백인들이 갈 수 없는 곳이 됐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모두 터무니없는 거짓말입니다.
영국에는 무슬림 여성인 유명 인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예컨대 BBC TV·라디오 뉴스에는 무슬림 여성 앵커들도 있습니다. ‘베이크 오프’라는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벵골 지방 출신의 한 무슬림 여성은 일약 전국적 스타가 됐습니다. 유명 코미디언 중에도 무슬림 여성이 있습니다.
무슬림 여성이 집 안에 갇혀 살고 베일 착용을 강요당하는 신세라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도 마치 이슬람이 특별히 후진적이고 여성차별적이라는 주장과 담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특성이 이슬람 발생 때부터 그 종교와 문화에 내재돼 있었다는 겁니다.
특히,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여러 아내를 둔 것을 두고 무함마드가 여성차별적이었다는 비난이 있습니다.
무함마드가 여러 아내를 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아라비아반도에는 아랍인과 비아랍인, 그리스도교, 토착 종교, 유대교를 불문하고 모두 일부다처제 풍습이 있었습니다. 일부다처제는 이슬람이 창시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전근대의 많은 왕실들도 일부다처제였습니다. 고대 중국·일본·한반도, 마야 문명, 아즈텍 문명, 고대 아일랜드, 고대 아이슬란드도 모두 그랬습니다.
연하남 무함마드에 청혼한 하디자
오히려 초기 이슬람 역사에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습니다. 최초의 이슬람 개종자는 하디자라는 여성이었습니다. 하디자는 무함마드의 첫째 아내이기도 했습니다.
이 결혼에서 먼저 청혼한 쪽은 하디자였습니다. 이때가 서기 595년입니다. 당시는 개화된 시대가 결코 아니었죠. 오늘날에도 여성이 먼저 청혼하는 사회는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디자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걸까요?
하디자는 매우 부유한 여성이었고, 무함마드를 만나기 전에도 두 차례 결혼을 하고 배우자와 사별했습니다.
40세가 된 하디자는 자신의 상단(대상(隊商), 캐러밴)을 이끌 관리자로 25세의 무함마드를 고용했습니다. 인망 있고 믿음직하기로 유명했던 무함마드는 하디자의 상단 교역에서 굉장한 수완을 발휘했고, 상단의 수익을 곱절로 늘렸습니다. 이에 매우 흡족한 하디자는 무함마드에게 청혼했고 무함마드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오늘날 꽤 연하의 남성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성이 얼마나 될까요?
하디자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메카의 유력한 부족 가문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디자의 아버지는 부유한 거상이었습니다. “전근대 자본가”였다고 할 수 있죠. 하디자는 아버지의 재력과 사업 수완을 물려받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디자가 사회적 지위와 재력 덕분에 먼저 청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집안 여성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는 이슬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지위를 이해하는 데서 핵심적인 사실입니다.
전근대 세계 어느 곳이든 결혼이라는 것은 권력층 가문 사이의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즉, 결혼은 다른 가문과 정치적 동맹을 맺는 수단이었습니다.
영국의 헨리 8세(1509~1547년 재위)는 왕비가 6명 있었고, 모두 지배계급 가문 소속이었습니다. 농노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아라비아반도에서 무함마드는 하디자와의 결혼으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연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의 결혼은 당시 아랍 세계와 비아랍 세계 모두에서 행해진 관습이었습니다.
사회 변동과 이슬람, 여성의 지위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지위는 일정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여성이 결혼 상대를 정하는 데서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슬람이 최대 네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을 남성에게 허용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따릅니다. 네 아내를 모두 먹여 살릴 수 있고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율법은 결혼을 남녀 사이의 계약, 또는 남성 대 여성의 보호자 사이의 계약으로 규정합니다.
여러분은 결혼 지참금 제도라는 것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어떤 사회에서는 신부 측 가족이 신랑에게 지참금을 줬습니다. 하지만 초기 이슬람 교리에 따르면 신랑이 신부에게 직접 지참금을 줘야 했습니다.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따르면 여성은 가족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고, 결혼한 여성은 자신의 재산을 보유·처분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은 여성의 이혼권도 인정합니다. 남성의 이혼권과 동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성의 이혼권 자체는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다른 유일신교 사회나 토착 종교 사회에 견주면 진일보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 사회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점들은 여성의 지위가 계급 사회에 의해, 또 그 사회와 기존 전통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7세기 아라비아반도는 대상(캐러밴)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아라비아반도의 상인들은 사막을 오가며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일강, 티그리스강, 페르시아만을 잇는 농업 지대]와 지중해 지역을 잇는 구실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메카, 메디나 같은 도시들이 교역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그 사회는 심각한 모순에 휩싸인 사회이기도 했습니다. 부족 간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법 집행이 굉장히 자의적이었습니다. 사회·경제 권력자들이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뚜렷하고 엄격한 법률 같은 게 없었죠.
개인들은 때때로 벼락 부자가 될 수 있었지만 삽시간에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복지 국가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 사회는 대부업자들과 상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함마드는 기존 사상들을 종합했습니다. 다신교가 아닌 유일신교를 받아들였고, 내키는 대로 베푸는 자비를 체계적인 자선으로 대체했습니다. [구빈 활동에 쓰도록] ‘자카트‘라는 세금을 걷었죠. 또, 복수는 신이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사적 복수를 금지했습니다.
이슬람이 태동할 무렵 아라비아반도는 비잔틴 제국과 사산 제국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였습니다. 두 제국의 붕괴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가 파편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기존 질서의 혼란과 붕괴가 뒤따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함마드는 자신의 사상과 설교를 통해 옛 사상들을 종합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혼돈에 빠진 세계에 모종의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죠.
이는 여성의 지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슬람 이전의 많은 문화권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맡겨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여성은 원치 않는 상대와도 결혼해야 했습니다. 형편이 나빠 많은 자녀를 먹여 살릴 수 없는 가족들은 여자 신생아들을 살해했습니다. 남성은 언제든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성과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버려진 부인은 먹고살 길이 막막한 처지가 됐고, 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모종의 질서와 안정을 가져다 줬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 사회가 완벽한 사회였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슬람 사회는 굉장히 복잡하고 모순이 가득한 사회였습니다.
종교 사상과 교리가 새로운 사회 질서를 세우는 데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려면 계급 분단을 봐야 합니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상인들과 부족 지도자들 같은 부유한 계급의 이해관계에 부합했습니다. 그들도 번영을 누리려면 안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이슬람 교리를 통해 가정의 안정, 가문들 사이의 권리와 의무, 재산의 보호 등을 정당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은 유일신 아래 모든 무슬림이 평등하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천대받고 멸시당하던 하층민들에게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 초기에 부족 지도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동안, 평등을 갈구한 노예 출신자들도 기꺼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입니다. 그런다고 진정으로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종교적 평등주의 사상]이 이데올로기였던 것이죠.
이런 점이 중요한 이유는 종교 사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결국 사회라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계급에 따라 천차만별인 무슬림 여성의 삶
오늘날 무슬림 여성은 흔히 동질적인 집단으로 취급됩니다.
하지만 전 세계 무슬림 여성이 사는 방식은 극도로 다양합니다.
예컨대 히잡의 사례를 봅시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지에서는 여성들이 히잡을 착용합니다. 런던과 에든버러에도 히잡을 착용하는 여성들이 있죠.
하지만 히잡을 착용하지 않는 무슬림 여성도 많습니다. 인구 대다수가 무슬림인 나라들, 예컨대 저희 부모님이 살던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서는 히잡이 아니라 사리와 샬와르카미즈를 입습니다.
히잡은 무함마드가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여성의 베일 착용은 사회적 지위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높은 신분의 여성이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베일을 착용한 것이죠. 이런 관습은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 고대 유대인 공동체, 고대 아시리아 사회에도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가난한 여성이 얼굴을 드러내건 말건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여성은 하찮은 존재로 취급됐으니까요.
요컨대 이슬람은 기존 사회의 관습을 차용한 것이었습니다.
일부다처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 무슬림의 다수가 사는 인도네시아와 인도에서는 남녀 간 결혼의 99.9퍼센트가 일부일처 결혼입니다.
이렇듯 무슬림들이 사는 방식은 매우 다양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를, 그저 그 구성원들이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동질적인 집단으로 뭉뚱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더 중요한 점은 무슬림 여성도 무슬림 사회와 마찬가지로 계급과 계급 이해관계에 따라 나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에는 보수당 의원이자 일대(一代) 귀족인 사이드 바르시라는 무슬림 여성이 있습니다. 크리켓 선수 출신이자 전 파키스탄 총리 임란 칸의 전 부인인 제마이마 칸이라는 무슬림 여성도 있습니다.
이 무슬림 여성들은 런던의 에지웨어 로드, 벨그라비아, 사우스켄싱턴 같은 부촌에 삽니다. 미용실에서 한 번 머리를 하고 매니큐어를 칠하는 데 2000파운드[약 350만 원]씩 쓰는 동네입니다. 이런 여성들은 값비싼 대저택에 살면서 보모, 요리사, 청소부를 고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경험과 계급 이해관계는 허름한 집에 사는 수많은 무슬림 여성들과 사뭇 다릅니다. 단지 히잡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침을 맞고 욕설을 듣고 괴롭힘 당하는 젊은 무슬림 여성들과도 사뭇 다르죠. 출입국 단속 공무원에게 괴롭힘 당하는 이민자·난민 무슬림 여성들과도 사뭇 다릅니다.
이런 계급 이해관계와 계급 분단을 인식해야 합니다. 단일한 ‘무슬림 여성의 경험’ 같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성과 이슬람을 볼 때는 역사적 변화 속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두 가지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첫째, 무슬림 여성을 동질적 집단으로 뭉뚱그리게 됩니다. 둘째, 자본주의와 계급 사회가 아니라 이슬람이 문제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종교 사상은 계급 사회라는 사회의 성격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그리스도교든 불교든 유대교든 힌두교든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이 여성차별적이라 해도 그것이 이슬람 고유의 특성인 것은 아닙니다.
여성 차별과 불평등의 근원은 계급 사회와 자본주의입니다.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은 바로 그 근원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발제자의 토론 정리
유익한 질문과 토론 감사합니다. 질문이 워낙 많아서 모두 답하지 못하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서방 지도자들의 위선에 맞서기
먼저, 사회주의자이거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서방 지도자들의 위선과 거짓말에 맞서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예컨대, 서방 지도자들이 “무슬림 남성이 무슬림 여성과 백인 여성에게 성폭행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거기에 반대해야 합니다.
영국에서는 ‘성 착취 무슬림 집단’에 대한 언론 보도가 굉장히 많습니다. 무슬림 남성 패거리가 십대 백인 여성을 그루밍해 그들을 성적으로 착취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영국 언론들은 훨씬 악랄한 성폭력 범죄자에 대해서는 말을 아낍니다. 예컨대 유명 TV 스타 지미 새빌을 비롯한 1970~80년대의 TV·라디오 저명 인사들이 지속적으로 소년·소녀들을 성 착취한 사건은 결코 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성폭력이 주되게 무슬림 남성의 행위인 양 묘사하죠.
그런 언론들이 말하지 않는 또 다른 진실은, 대부분 사회에서 무슬림은 인종차별의 대상이기 때문에 폭력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런던 경찰청의 집계에 따르면 무슬림 대상 범죄 건수는 지난 10년 새 174퍼센트가 증가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히잡 착용뿐 아니라 해변가와 휴양지에서 부르키니(무슬림 여성들이 입는 수영복)를 착용하는 것도 금지합니다. 몇 년 전에는 프랑스 경찰이 총을 들고 해변가에 나타나 무슬림 여성에게 부르키니를 벗으라고 강요하는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무슬림 사회가 히잡 착용을 강요한다는 서방의 비난에 대해, 우리는 서방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적하며 그런 비난의 위선을 들춰내야 합니다.
서구에서 히잡 착용이 늘어나는 이유
한 시청자가 지적했듯이, 세계 어떤 곳에서는 무슬림 여성이 히잡 착용을 강요당하지만, 무슬림 여성이 히잡 착용을 스스로 선택하는 경우도 그에 못지 않게 많습니다.
제가 십대이던 1970년대 런던에서는 아시아계 무슬림 여성들이 히잡을 거의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30년쯤 지난 때 런던에서는 많은 아시아계·아랍계 젊은 여성들이 히잡을 착용합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요즘 젊은 여성들이 ‘노는 물이 달라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요즘 젊은 여성들이 히잡 착용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슬림을 상징하는 것이 모두 공격받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이름이 무슬림식이면 그것도 놀림거리가 됩니다.
지금은 무슬림들이 금식을 하는 라마단 기간인데요, 오늘날 영국에서는 많은 무슬림이 그 기간에 금식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어릴 적에는 어린이나 청소년은 금식에 동참하지 않았죠.
오늘날 무슬림들은 이슬람 사원에 가는 것만으로도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무슬림 어린이가 꾸란을 읽기 위해 아랍어를 배운다고 하면 뒤떨어진 아이 취급을 당합니다.
이처럼 서구 사회에서는 무슬림임을 나타내는 모든 징표가 끊임없이 인종차별적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젊은 무슬림 여성들은 저항과 자긍심의 표현으로서 히잡을 착용합니다.
이런 현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는 안타깝게도 좌파들조차도 인종차별과 제국주의가 아니라 이슬람이 문제라고 끈질기게 주장해 왔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는 급기야 파시스트 마린 르펜이 떠올라 다음 대선의 유력한 주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르펜이 당선되면 노골적인 파시스트가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첫 사례가 될 것입니다.
이슬람 페미니즘과 여성 해방
이슬람 페미니즘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여성 차별의 근원에 대한 질문도 있었고요.
어떤 면에서 이슬람 페미니즘은 이슬람 혐오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온갖 거짓말과 편견에 맞서는 시도죠.
이슬람이 여성의 이혼권을 인정하고, 원치 않는 상대와 결혼하지 않을 권리를 인정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이슬람은 가톨릭 교회와 달리 피임과 임신중절을 금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에 충실하면 여성 해방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무슬림 사회도 계급 분단을 토대로 구축돼 있기 때문입니다.
파키스탄에서 무슬림 여성인 베나지르 부토가 총리가 됐을 때[1988~1990년과 1993~1996년], 부토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슬림인 평범한 파키스탄 여성들의 삶을 전혀 개선하지 않았습니다.
부토는 공식 석상에서 히잡을 착용하고 꾸란의 첫 장인 개경장을 암송하며 회의를 시작하곤 했지만, 파키스탄 기업주들과 나란히 앉아 파키스탄 기업의 이윤을 늘릴 정책들에 합의했습니다.
또 다른 무슬림 나라인 방글라데시에도 여성 총리가 있습니다. 그녀[칼레다 지아, 1991~1996년과 2001~2006년 재임]는 선거 운동에서 이슬람이 방글라데시 사회에서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성 총리는 의류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휴식 시간과 점심 시간도 없이 하루 12시간 동안 혹사당하는 상황을 전혀 개선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성 총리가 방글라데시 여성들을 보모와 청소부로 고용할 수 있는 처지인 반면, 이 여성 노동자들은 턱없이 적은 임금을 받고 매우 위험한 조건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슬람 페미니즘이 여성 해방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슬람 내부의 이질성
한 시청자는 이슬람이 유일신교인데도 무슬림의 종교 생활이 지극히 다양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예컨대 살라프파나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브파는 금욕적이고 사회적으로 매우 보수적입니다.
그런데 이슬람에는 수피즘이라는 전통도 있습니다. 수피즘에는 성인들과 이들을 기리는 제단이 있습니다. 이런 제단에 수많은 무슬림들이 예배를 하러 다녀갑니다. 수피즘은 노래나 춤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알레비파는 음주를 허용합니다. 가족에 대한 관념은 보수적이지만요.
1947년 인도가 독립할 때 파키스탄은 인도의 무슬림이 이주해 와서 살 나라라는 명분으로 건국됐는데요, 당시 이를 주도한 세력의 하나가 아흐마디야파였습니다. 그런데 1960~70년대를 거치며 아흐마디야파는 이단으로 규정됐죠.
이는 이슬람 내의 이질성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적 요인이 무슬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슬람 혐오와 차별에 맞선 공동전선
마지막으로, 저항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슬람 혐오에 대한 영국 좌파들의 태도를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영국에도 이슬람이 보수적이고 여성차별적이라는 주장을 고수하는 좌파가 있습니다.
TV의 많은 자유주의적 논평가들이 이슬람 사회가 후진적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그들은 무슬림 여성이 세계에서 가장 차별받는 여성이라고 줄곧 묘사하죠.
그런데 그 똑같은 논평가들이 서방의 아프가니스탄·이라크·예멘 폭격을 옹호합니다. 서방이 무슬림 여성을 구원할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서방은 그곳을 폭격해 무슬림 여성들을 살해하고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난민이 돼 유럽으로 들어오려 하면, 그 논평가들은 “너무 많은 난민을 감당할 수는 없다”거나 “이 난민들은 이슬람 종교와 문화 때문에 영국 문화에 좀처럼 동화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안타깝게도 좌파 일부도 이런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인종차별이 핵심 문제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재 영국 보수당 정부는 난민들을 호텔이나 병영에 수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호텔”이라 함은 무슨 5성급 호텔이 아니라 낡고 허름하고 곰팡이 투성이인 시설을 뜻합니다. 현재 이런 곳들은 인종차별적 극우 단체들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그 난민들을 두고 “저들은 난민이 아니다. 저 젊은 남성들은 우리의 딸들과 아내들을 겁탈하러 온 짐승들이다”는 식의 공격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공격에 맞서야 합니다.
영국에서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노동조합 활동가들, 지역사회 활동가들과 협력하여, 대개 무슬림 나라 출신인 난민들의 권리를 방어하는 광범한 공동전선을 구축했고, 작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영국에서 저희는 ‘인종차별에 맞서자’라는 광범한 인종차별 반대 공동전선을 건설했습니다. 여기에는 몇몇 노동당 의원들이 포함돼 있고, 혁명가들도 있고, 아나키스트들, 지역사회 활동가들, 노동조합 활동가들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이 아니라 인종차별이 문제이고, 이에 맞서려면 자본주의와도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 인종차별을 이용해 우리 편을 분열시키려 하는 지배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인식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시청자 토론 시간에 한 팔레스타인인 유학생 분은 팔레스타인에서 투쟁이 단결의 기반이 되고 있다고 옳게 지적했습니다.
투쟁 속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단결시킬 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투쟁 속에서 우리는 여성과 남성, 유색인과 백인, 이민자·난민과 정주민,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단결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단결해서 우리 편을 지배하는 자들에 맞서 공동으로 투쟁해야 합니다.
함께 투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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