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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 중동 질서의 변화

이 글은 2024년 4월 7일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포럼 ‘마르크스주의와 팔레스타인’에서 한 발제를 글로 옮긴 것이다. 가자 전쟁과 이스라엘이 확전을 꾀하는 배경이 되는 중동 제국주의의 최근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6개월째 진행되면서 장기화되고 있다. 그에 따라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중동 전반에 불안정이 번지고 있다.

이런 불안정은 제국주의가 겪고 있는 더 광범한 위기의 일부다. 미국 패권이 장기간에 걸쳐 약화되고 중국이 부상하면서 세계 체제 전반에 위험이 커져 왔다. 2001년 9·11 공격 이후 서방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 때문에 중동에서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추세는 심화됐다.

오늘 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배경이 된 2000년대 이후 중동 질서의 변화를 살펴보고, 그것이 팔레스타인 해방 전망과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주는 함의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고 한다.

중동과 제국주의

그에 앞서, 2000년대 이전에 제국주의가 중동을 지배한 과정을 개략적으로 짚어 보겠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들은 중동을 분할해 각자의 제국주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유럽 강대국들은 기존 지배자인 오스만 제국을 밀어내고 중동에서 원료, 영토, 시장을 장악했던 것이다. 이로써 중동 사람들은 유럽 제국들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게 됐다.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질 무렵 석유는 자본주의에 중요한 자원이 됐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자본주의의 석유 의존도는 더 높아져 갔다. 그래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중동의 전략적 가치는 훨씬 더 중요해졌다.

제1차세계대전 종전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 오늘날의 이라크와 요르단 등 중동의 주요 지역들을 차지했다. 그리고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서 시온주의자들의 정착을 지원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반식민 저항을 제압하는 데에 시온주의 운동이 도움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중동을 식민 지배하던 유럽 제국들의 힘은 쇠퇴했고, 미국이 중동에서 유력한 제국주의적 강대국으로서 입지를 세우게 됐다.

미국은 직접적인 식민 지배에 의존하지 않았고, 현지 국가들과의 군사 동맹 체결, 미군 기지 건설 등을 통해 중동에 비공식 제국을 건설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려 했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중동에서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던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제압해야 했다. 그리고 제국주의 경쟁자인 소련이 중동 지역과 그 석유에 접근하는 것도 막아야 했다.

미국은 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등 현지 친미 정권들을 후원하는 형태로 중동에 개입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불안한 점이 있었다.

현지 아랍 동맹국들은 미국의 이해관계에 중요했지만, 가령 1979년 이란 혁명처럼 이 친미 정권들은 대중 저항에 흔들리거나 무너져 버려서 미국 지배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미국 전략가들은 중동 석유를 보호하려면 강력한 지역 동맹이 필수적이라고 봤는데,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존재는 미국에 특별했다. 식민 정착자 국가로서 이스라엘 국가는 적대적인 아랍 세계 한복판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를 지켜 줄 결정적인 요새였다.

이스라엘은 1967년 중동 전쟁에서 이집트 나세르 정권을 패퇴시키며, 아랍 민족주의 등 서방에 대한 도전을 제압하는 능력을 입증했다. 그래서 미국은 “경비견”을 자처한 이스라엘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서방 제국주의의 전략에 중요한 일부가 돼 경제·군사·정치 등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것이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됐다.

그렇다고 미국이 현지 아랍국들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가령 1970년대 미국은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고,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맺도록 주선했다. 이후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배신한 대가로 미국의 많은 원조를 받았다. 미국은 이런 투 트랙으로 중동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테러와의 전쟁’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은 냉전 제국주의 경쟁의 승자가 됐다. 그래서 당시 많은 관찰자들은 앞으로 미국이 유일무이한 패권국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누릴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냉전 해체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은 더 유동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미국의 경제적 지위가 점차 약화되고 경쟁자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서방에서는 독일과 일본 경제가 성장해 미국의 경제적 경쟁자가 됐고, 중국도 잠재적 라이벌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의 하나로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이용해 전보다 더 적극적인 군사 개입으로 중동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군사 개입을 통해 중동 석유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접근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지 W 부시 정부는 2001년 9·11 공격을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점령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대적인 전쟁 몰이는 대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현지 저항에 부딪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안정화’하는 데 실패했고, 이 나라들에 미국의 역량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면서 다른 지역에 개입할 능력도 약화됐다.

그래서 ‘테러와의 전쟁’은 중동 상황을 미국이 의도했던 바와는 다르게 바꿔 놨다.

첫째, 이란이 전쟁의 의도치 않은 수혜자가 됐다. 이란은 유력한 지역 경쟁자인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위협에서 벗어나 영향력을 증대할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후세인 몰락 이후 시아파가 이라크에서 정치적으로 부상한 덕분에 시아파에 기반을 둔 이란 정권이 이라크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 영향력을 레바논, 시리아 등지로 확대해 갔다.

둘째,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스라엘 같은 다른 지역 강국들은 이란의 부상을 우려의 눈길로 바라봤다. 그래서 중동에서 지역 강국들 간의 각축전이 본격화됐다.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두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라는 대립 축의 갈등이 점증했다. 이스라엘도 이란의 부상이 중동에서 자국의 입지를 위협한다고 보고 적극적으로 맞섰다.

셋째, 미국이 조장한 종파·부족 간 이간질 등 혼돈 속에 이라크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매우 약해졌다. 그리고 이 틈을 비집고 반동적인 세력인 아이시스가 이라크 내에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요컨대 미국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테러와의 전쟁’을 거치며 중동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은 약화됐다.

2011년 아랍 혁명

이런 상황 속에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혁명이 분출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졌고, 노동자들의 파업은 경제의 주요 부문을 마비시키면서 독재자들을 몰락시켰다. 혁명은 리비아, 바레인, 시리아, 예멘 등지로 빠르게 번졌다.

중동에서 혁명적 위기가 벌어진 배경에는 지정학적 불안정과 함께 신자유주의 문제가 있었다.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가 위기에 빠지자, 중동 정부들은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IMF(국제통화기금) 차관을 적극 받아들이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쳤다.

경제 자유화는 중동 사회에서 극심한 경제·사회 양극화를 초래했고, 대중의 경제·사회적 불만들은 정권 맨 꼭대기를 향하게 됐다.

아랍 혁명의 분출은 중동에서 제국주의와 독재에 맞서 해방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 아랍 지역의 지배계급들은 심각한 위협을 받았고, 그들의 협력에 의존하는 미국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은 중동의 지정학적 구도를 바꿀 잠재력을 보여 줬다. 가령 2012년 11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격했을 때 이집트 새 대통령 무르시는 이전 독재 정권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협조하지 않고 휴전을 중재하려 했다. 미국 오바마 정부도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이 아랍 혁명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 이스라엘이 물러나도록 종용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8일 만에 휴전에 동의해야 했다.

아랍 혁명은 팔레스타인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바라크가 퇴진하자, 가자 주민들은 기뻐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혁명의 구호를 따라 외쳤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랍의 혁명적 대중과 단결해 시온주의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보였던 것이다.

미국은 아랍 혁명에 곤혹스러워하며 혁명이 더 확대되고 심화되지 않도록 동분서주했다. 그래서 당시 대통령 오바마는 이집트 독재자 무바라크의 퇴진을 뒤늦게 지지한다며 위선을 떠는 한편, 이집트 군부와 소통하며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노렸다.

혁명을 패퇴시키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 반혁명 국면은 군사적 모험주의, 지역 강대국들과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의 지정학적 대립과 대리전 양상과도 결합됐다.

2011년 미국은 나토를 앞세워 리비아를 폭격했다. 그래서 리비아에서 혁명이 내전으로 뒤틀리게 만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연안국 지배자들도 반혁명에 앞장섰다. 이들은 바레인 등 일부 나라에 무력 개입하는 한편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종파 분쟁을 조장해 대중 운동을 분열시키는 방법도 결합시켰다.

가장 중요한 곳인 이집트에서는 2013년에 군부가 반혁명 쿠데타에 성공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연안국 지배자들은 이집트 군부를 적극 후원하며 반혁명을 도왔다. 그 덕분에 군부는 무르시의 지지자들을 학살하며 권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정된 결과가 아니었다. 무슬림형제단의 개혁주의가 약점을 드러냈다. 무르시 정부는 IMF와 국제 투자자들에게 믿을 만한 파트너로 보이려고 애썼고, 국가 권력의 핵심인 군부와 타협했고, 이스라엘과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도 파기하지 않았다. 대중의 개혁 염원이 실행되지 않자 무르시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급속히 일어났다. 군부는 이 틈을 이용해 쿠데타에 나섰는데, 혁명 진영은 이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는 지배자들이 조장한 종파주의와 제국주의와 지역 강국들이 뛰어든 대리전으로 인해 혁명은 좌절되고 그 나라들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 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난민이 됐다.

가령 시리아에서는 아사드 정권이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혁명을 종파 간 내전으로 뒤틀어 버렸다. 걸프 연안국들도 자신들 입맛에 맞는 반동적인 수니파 이슬람주의 단체들을 지원하며 시리아 내전에 개입했다. 이 때문에 2018년까지 시리아인 50만 명이 살해됐고, 1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국내외로 떠나야 했다.

결국 2013년 이후 아랍 지역에서 혁명 물결은 한동안 잠잠해졌다. 현지 지배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은 잠시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중동 질서의 안정이나 서방 제국주의의 통제력 회복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역 갈등의 증대

지금까지 얘기한 2000년대 이후의 변화로 중동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각축장이 됐는지와 그 함의를 살펴보겠다.

제국주의적 전쟁과 반혁명 내전으로 시리아, 이라크 같은 아랍 세계의 핵심 국가들이 사실상 해체 지경이 됐다. 나토가 개입한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군사 개입한 예멘도 대리전으로 엉망진창이 됐다.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이란, 이스라엘 등 중동의 지역 강국들은 미국과 중국·러시아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충돌하는 와중에 나름대로 책략을 부리며 이익을 차지하려 해 왔다. 그러면서 지역 강국들 사이의 쟁투가 치열해졌다.

이런 혼란 증대는 중동을 관리하는 미국의 능력을 더 저하시켰다. 가령 미국은 중동에서 또 다른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꺼려, 시리아 내전에 깊이 관여하는 데 내내 신중했다. 반면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이스라엘 등은 미국이 약화된 공백을 경쟁적으로 메우려는 과정에서 시리아 내전에 관여했다. 헤즈볼라도 시리아에서 아사드 정권을 지원했는데, 사실 2006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앞장섰던 헤즈볼라가 시리아의 반혁명을 도운 것은 비극적인 일이었다.

반면 제국주의 강대국인 러시아와 중국의 중동 영향력이 커졌다. 러시아는 미국이 관여를 꺼리는 틈에 시리아에 뛰어들었고, 이를 통해 중동에서 옛 소련이 가졌던 영향력을 일부 회복했다.

중국의 입김이 중동 내에서 커지고 있다는 것은 지난해 중국이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 개선을 중재한 일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두 지역 강국들의 앙숙 관계는 미국도 어찌하지 못하는 일인데, 중국이 중재에 성공하면서 중동의 유력한 지정학적 행위자가 됐음을 보여 준 것이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가 중국과 거리를 좁힌 것은 미국에 큰 충격인데, 여기에는 아랍 혁명 당시 미국 오바마 정부가 아랍 독재자들을 끝까지 지켜주지 않았다는 사우디아라비아 권력자들의 불만도 반영돼 있다.

중국은 오늘날 중동 경제의 중심지인 페르시아만 국가들에 가장 큰 투자자이자, 가스·석유의 최대 수출 시장이며, 5G 등 첨단 기술 제공자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 등 중동 산유국들을 브릭스(BRICS)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그만큼 중동에서 중국의 영향력과 이해관계가 커져 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중동 질서를 안정시키려고 크게 두 가지 수단을 동원해 왔다.

우선, 미국은 중동을 통제하는 데 이스라엘의 구실을 더 중시하게 됐다. ‘테러와의 전쟁’ 패배로 그 자신의 힘이 약화된 데다가 현지 정권들이 뒤흔들리는 2011년 아랍 혁명을 경험하면서 미국에게 “경비견” 이스라엘의 존재는 더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미국 트럼프 정부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지지하는 등 시온주의 프로젝트를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그다음으로, 미국은 아랍 동맹국들과 이스라엘의 관계 개선을 촉진해 중동 통제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래서 트럼프 정부의 주선하에 2020년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이 이스라엘과 아브라함 협정을 체결했다.

트럼프에 이어 집권한 미국 대통령 바이든도 아브라함 협정의 전략을 더한층 발전시키려 했다.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수교하도록 적극 관여했다. 바이든 정부는 이를 통해 이란을 견제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자기 쪽으로 더 견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이스라엘을 이란의 위협에 함께 대응하는 파트너이자 기술·경제 협력 대상으로 여기며 수교 협상에 적극 임하고 있었다.

지난해 9월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등은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MEC) 양해각서’도 체결했다. 이 ‘경제회랑’은 중국의 일대일로를 견제하면서, 인도양에서 중동과 유럽까지 항구와 철도 등으로 연결하는 구상이다. 중동에서는 아랍에미리트-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이스라엘 하이파 항구까지 육로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협력을 증진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의 대의는 뒷전으로 밀렸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 빈살만은 “이스라엘인은 자신의 땅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걸프 연안국 지배자들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자국 대중의 불만과 연결되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하길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이 갖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즉,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수교 협상이 중단되고 ‘경제회랑’의 건설 여부가 불투명해지는 등 미국의 중동 안정화 전략을 망쳐 놓은 것이다.

장기화된 전쟁과 그에 맞서기

한편, 중동 질서의 변화에 대응해 이스라엘은 최근 몇 년 동안 더 공세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이스라엘도 지역 강국으로서 역내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유착은 여전히 굳건하지만, 과거와는 조금 달라진 점도 있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원조는 이스라엘의 경제 성장에 큰 구실을 했지만, 2020년 현재 미국의 직접적인 원조가 이스라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퍼센트에 불과하다. 오늘날 이스라엘 경제는 더는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협력은 꾸준히 강화돼 왔다. 미국의 군사 지원은 이스라엘의 군국주의를 키웠고, 경제 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제 이스라엘은 중동 최고의 군사 강국이자 세계 12위의 무기 수출국이고, 군사 부문에 결합된 첨단 산업은 지난 20년간 이스라엘 경제의 엔진 구실을 해 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사이버 보안 분야에서 전 세계 벤처 캐피털 투자의 15퍼센트나 유치하는 등 세계 디지털 시장의 강자로 발돋음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경제의 위상 변화는 미국 제국주의의 약화, 이스라엘 국내 정치의 우경화와 맞물려 이스라엘이 더 공세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내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과 타협하지 말고 모두 쫓아내 1948년 나크바의 못다 한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극우의 목소리가 커져 왔다.

지난해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 며칠 전에,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유엔 총회장에 가자지구와 서안지구가 표시되지 않은 “대이스라엘” 지도를 갖고 나왔다. 이는 삼척동자도 눈치챌 수 있는 노골적인 인종청소 의지 표명이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중동에서 제국주의의 위기와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6개월째 장기화된 전쟁은 불안정과 모순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 이스라엘군의 공격이 장기화되면서 중동 전반에 전쟁이 확대될지도 모를 위험이 커져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의 모순과 긴장도 드러나고 있다.

물론 미국 바이든 정부는 이스라엘을 계속 지원하고 있다. 이들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 같은 중동의 대중 반란을 제압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동 전체의 제국주의 질서를 지키려 하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시온주의 프로젝트 완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선을 넘는’ 행동이 아랍 대중의 반란을 촉발해 미국이 중동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또 다른 축인 아랍 정권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쟁 수행 방식 등을 두고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에 긴장이 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은 민간인 보호 대책을 촉구하면서도 무기 공급 중단 등 이를 이스라엘에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은 동원하지 않고 있다. 중동에서 대체 불가능한 자국 제국주의의 요새인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미국한테도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되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이스라엘의 학살을 지원하는 것이 사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음을 알면서도 다른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중동에서 서방 제국주의가 처한 위기와 모순을 잘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막강하지만은 않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장기 전쟁은 앞으로 더 큰 재앙을 낳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랍 민중의 반란은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있다. 이는 미국 지배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를 현실화시킬 것이다.

중동에서 그런 반란이 일어날 조건이 형성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물가 인상으로 인한 생계비 위기로 인해 민중의 불만이 증대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문제는 바로 2011년에 아랍 혁명이 폭발한 중요한 배경의 하나였다.

지금 요르단에서는 정권의 탄압을 무릅쓰고 전투적인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운동이 이집트 같은 곳까지 번진다면 상황은 정말 달라질 수 있다.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이런 상황 전개를 자극하는 촉매 구실을 할 수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각국 정부들을 압박해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을 어그러뜨리는 데 효과를 낼 수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바로 그런 글로벌 운동의 일부이다. 그런 의미를 인식하면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성장시키기 위해 뚜벅뚜벅 전진해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