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는 “무시당하던 사람들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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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저항하면, 너무 과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꼭 나온다.
이번 로스앤젤레스(LA)에서는 민주당 소속 시장 캐런 배스가 비폭력 시위를 촉구했다.
배스는 트럼프에게 이민자 단속을 중단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또한 “폭력과 파괴는 용납할 수 없고, 그런 일을 저지르면 책임을 묻겠다”고도 한다.
배스 같은 부류는 평화 행진이야말로 정상적인 방식이라고 본다.
그러나 ‘폭동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사람들은 지난 반란으로 쟁취한 성과에는 기꺼이 찬사를 보낸다.
1968년 스톤월 항쟁을 기리는 연례 행사는 오늘날 성소수자들의 삶을 축하하는 날이 됐다.
그날이 되면 LA는 물론 여러 곳에서 콘서트와 자긍심 행진, 교육 행사 등이 개최된다.
그러나 스톤월 항쟁은 경찰에 맞서 벽돌을 던진 소요였다.
그로부터 2년 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는, 흑인들이 많이 찾는 심야 술집을 경찰이 급습한 것에 항의해 소요가 일어났다.
백인 노동계급도 일부 포함된 수많은 사람들이 인종차별, 빈곤, 임대인의 탐욕에 분노해 들고일어났다.
이 소요는 미국 사회의 고질적 인종차별을 드러낸 ‘블랙 파워’ 운동을 촉발했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오늘날 비폭력 저항의 상징으로 칭송받는다. 그러나 킹 목사는 디트로이트 소요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폭동은 무시당하던 사람들의 언어다. 미국 사회는 무엇을 무시했는가? 약속된 자유와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무시했다.
“백인 사회의 상당 부분이 정의와 인류애가 아닌 안온함과 기존 질서를 중시한다는 것을 무시했다.”
킹 목사는 소요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심장부에 뿌리내린 소외를 드러낼 수 있음을 인식한 것이다. 소요는 평생 동안 ‘너희들이 저항할 방법은 없다’고 들어 온 사람들의 행동이다. 잘못을 묻는다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무력감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계급 적대가 문제인 것이다.
소요는 흔히 생각 없는 파괴 행위로 치부된다. 소요는 자생적이고 조율되지 않은 것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집이 파괴되고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요가 아무 생각 없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LA에서 소요를 일으킨 사람들은 웨이모 자율주행차를 불태웠다. 그 차에 달려 있는 카메라를 국가의 감시 도구로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고, 도로를 봉쇄하는 기발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 과정에서 운전자가 다치지는 않았다. 기후 활동가 엘리스 조쉬는 이렇게 말했다. “웨이모에는 인간이라는 요소가 전혀 없다. 그 차는 비싸고, 뇌물 먹은 정치인들은 웨이모를 대중교통 예산을 삭감할 구실로 이용한다. 웨이모의 몰락을 기원한다.”
배스가 LA 시위 참가자들을 상대로 경찰력 행사를 강화한다면 이는 배신일 것이다. 약탈과 폭력에 대한 탄압은 이민자 단속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정당하지 않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 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부추길 도덕적 공황은 소요 참가자들이 미국 사회의 일원이 아니라는 인종차별적 관념을 부추길 것이다. 그러나 스톤월 항쟁과 디트로이트 소요에 가담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소요에 가담한 사람들도 역사의 일부다.
좌파는 소요 가담자들을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인종차별, 빈곤, 불평등을 끝장내려면 우리에게는 소요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시스템을 산산조각내려면 혁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