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은 개혁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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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임명된 조국은 신속하게 검찰 개혁을 명분 삼아 비판 여론을 딴 데로 돌리려 한다. 법무부는 장관 임명 9일 만인 9월 17일 이렇게 밝혔다. “검찰 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장관 지시에 따라 [장관 직속 기구인] 검찰개혁추진지원단을 발족했다.”
그러나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 금지를 즉시 추진하려던 계획은 일단 중단됐다.
그동안 무소불위의 수사권을 쥔 검찰이 공식·비공식으로 피의사실을 언론에 공표하며, 재판도 하기 전에 피의자의 방어권을 흔히 무장해제시켰다. 이는 대표적인 검찰 권력 남용(또한 피의자 인권 침해)으로 지목돼 왔다. 좌파나 사회적 약자에게는 그나마 언론이 동등하게 반론권을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맥락도 중요하다. 지금 법무부장관의 처가 검찰에 의해 기소돼 피의자가 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법무장관이 피의사실 공표 금지를 추진하는 것은 권력기관을 견제하는 개혁이 아니라 그 반대일 수밖에 없다. 사소한 절차 개선조차 그나마 추진할 명분을 잃은 것이다.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검찰과 법원에서 법(수사와 재판, 판결, 행정조처 등)이 계급에 따라 차등 적용된다는 걸 잘 안다.
세종호텔 노조 간부 해고가 적법하다는 판결은 건드릴 수 없는 원칙처럼 통용되지만, 노동자에게 유리한 톨게이트, 현대차 비정규직 등에 대한 판결은 사용자가 무시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이런 계급 차별은 절차 개혁의 한계를 보여 줄 뿐 아니라, 법원과 검찰 같은 핵심 권력기관들의 진정한 성격을 보여 준다. 이 기관들은 기업인들의 경제 권력을 비롯해 지배계급의 권력을 보호하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핵심 기구이다.
체제 정당화
이런 기구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체제의 정상적 작동이 어렵다고 여겨질 때나 자기네 권력의 정당성을 대중에게 특별히 설득해야 할 때만 쓸 만한 내용이 일부 포함된 수사 결과와 판결을 내놓는다. 촛불 운동과 박근혜 일당 수사·재판(탄핵), 사법 농단으로 정당성 위기를 겪은 후에 나온 낙태죄 헌법불합치, 일본기업 강제징용 피해자 승소, 톨게이트 노동자 직접고용 판결 등이 그런 사례다.
모든 판결이 예외 없이 기득권층과 사용자 편향적이면 노동계급은 이런 기관들(나아가서는 국가 자체)을 결국 불신할 테고, 그런 정당성 위기는 안정적인 계급 지배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시작된 것은 1987년 6월 민중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파업을 분수령으로 해서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조직이 급성장한 몇 년을 거치면서였다. 지배계급이 더는 강권 통치에만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의 권력기관이 마치 개과천선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창출한 결과이다. 하지만 지배자들은 이런 마지못한 양보를 체제를 정당화하는 기회로 삼으려 해 왔다.
결국 국가 기관들을 개혁한다는 것은 그것의 성격을 진정으로,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등하고 착취적인 기존 사회 구조를 그대로 두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검찰 개혁을 명분으로 조국 임명을 지지한 정의당·민중당은 그렇게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자유한국당 vs. 민주당 식 진영논리와, 자본주의 국가를 진보적 사회 개혁을 위해 고쳐 쓸 수 있다는 개혁주의 정치의 결합을 보여 줄 뿐이다. 이것이 현실적인지 살펴 보자.
이너서클
자본주의 국가는 지배계급의 안정적 사회 지배를 위한 매우 효과적인(무장한) 정치조직이다. 그러므로 검찰·경찰은 물론이고 법원(사법부)도 노동계급에 이롭게 바꾸는 것(진보적 사회 개혁)이 불가능한 기관들이다.(국가정보원 같은 보안경찰과 군대 같은 기구들은 아예 말할 나위도 없다.) 자본주의 국가의 존재 이유가 곧 이 기관들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법원, 검찰 같은 기관들이 인원 규모가 작은데도 조 단위의 예산을 운용하는 것이나, 행정안전부 전체 예산 55조 원 중 경찰청 예산이 11조 원에 이르는 것(인원 15만 명)을 봐도 이 기관들의 정치적 비중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기구들을 통제하는 그 상부 구성원들은 매우 엄격하게 소수만 선발되며, 이들은 선발과 동시에 엘리트 취급을 받으며 지배계급으로 이어지는 인적 연결망(이너서클)으로 통합되기 시작한다.(물론 그 연결망 내부에서도 족벌, 학벌을 따지며 서열화가 생긴다.)
이런 질서 덕분에 각 권력기관들이 사회 전반을 관장하면서도, 정작 그 핵심 구성원들은 폐쇄적인 이너서클을 이루고 상명하복으로 권력을 공유하며 그들만의 경쟁을 펼치는 것이다. 검찰, 법원 등의 막강한 권력이 바로 이들의 “신성가족”을 묶어 주는 울타리이자 힘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기관들의 최고위 대표들은 선출되지 않는다.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보여 주기와 면피용일 뿐이다. 별 일 없다면 대중의 진정한 여론은 임명 여부에 반영되지 않는다. 자체 인사권이 보장된 이유이다. 미국에서 시행하는 지방검사장(D.A.) 선출제의 사례를 봐도, 검찰의 억압적 성격에 전혀 변화를 주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사법 농단에 대한 검찰 수사를 법원이 방해하고 반격한 것 등을 보아도 이 기관들의 권력을 합법적으로 약화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상적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 정부가 검찰 권력을 비난하는 것에 진보적 진지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권은 조국 일가에 대한 대검찰청 특수부의 수사가 검찰 중립을 벗어난 정치 행위라고 비난했는데, 만약에 수사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중립적 행위였을까?
2016년 말 당시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를 범죄 피의자라고 공표했던 것도 검찰 특수부였고(그 공표가 문제였다는 뜻은 아니다), 박근혜·최순실 특검을 주도한 것도 특수부 출신자들이었다. 이에 대한 문재인의 보은 인사가 바로 윤석열의 검찰총장 임명이었다. 그런데 그 칼끝이 자신들을 겨누자마자 민주당 인사들은 윤석열 헐뜯기에 나선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을 검찰 개혁의 상징처럼 내세우는데, 바로 그 공수처가 할 일이 바로 조국 일가 수사 같은 것이다. 그러니 여권의 반응은 그들 자신의 공수처 설립이 그저 민주당에게 유리한 ‘검찰2’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방증인 셈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도 같은 이유로 추진하는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소위 검찰 개혁을 정당화할 유일한 명분은 선출된 정부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검찰(경찰)에게서 체제 수호 기능을 뺏을 리는 없다.(이 기관들의 막강한 힘은 자신들 외부의 세력, 특히 체제 반대 세력을 범법자로 만들 수 있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검찰 권한을 공수처와 경찰에 나눠 주겠다는 민주당의 방안은 피억압 대중에게는 억압 기구의 수만 더 늘리는 셈이다.
이 점은 다음 사례들과 연결시켜 보면 더 뚜렷하게 보인다. 문재인 정부가 민주 개혁이라고 포장한 대검찰청의 공안수사부 폐지가 이름만 바꾼 채 노동계 수사부서는 남겨놓은 것, 경찰 보안수사대를 사실상 지휘하는 국정원이 민간인 사찰과 내사를 여전히 하고 있는 점 등 말이다.
따라서 권력기관들이 현 시스템 안에서 합법 수단을 통해 민주적으로 개혁되거나 통제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공상이다. 오히려 이 기관들의 형사·사법 기능은 민주적 통제로부터 의식적으로 보호된다.
이 기관들이 일시적으로나마 견제받는 것은 오로지 국가기구 밖에서 노동계급의 대중투쟁이 시스템의 작용을 위협할 때뿐이다. 진보파가 공상적 개혁을 추구하기보다 계급 권력에 도전하는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