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베르 아슈카르에 대한 재반박:
우크라이나와 반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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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장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자신의 글 ‘우크라이나 전쟁과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을 둘러싼 논쟁’(본지 410호)에 대한 레바논계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런던대 교수인 질베르 아슈카르의 반론을 재반박한 것이다.
[ ] 안의 내용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덧붙인 것이다.
제 글 ‘우크라이나 전쟁과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을 둘러싼 논쟁’에 반응해 줘서 기쁩니다. 제가 그 글을 쓴 주된 목적은 우크라이나에 관해 당신이 쓴 글들을 반박하는 데에 있지 않았고, 지금의 참상을 이해하는 데서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러면서 당신이 쓴 글의 일부를 인용하기는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절들은 급진 좌파들이 보이는 잘못된 경향, 즉 러시아 제국주의와 우크라이나의 쟁투에만 초점을 맞추고 미국과 나토의 구실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리는 친구이자 동지로서, 서로를 모욕하거나 서로의 주장을 잘못 전하지 않으면서 생산적인 의견 교환을 여러 차례 해 왔습니다. 이번 토론도 견해를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캘리니코스는 자신과 여러 해 동안 긴밀하게 협력해 온 영국 반전 운동 내에서 상당한 일부가 받아들이는 만연한 신(新) 진영논리”를 공유한다고 비판하신 것은 딱히 동지적이지도, 정확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좌파들이 받아들이는 ‘진영논리’는 계급투쟁을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경쟁에 사실상 종속시키는 입장을 뜻합니다. 이에 따르면 한쪽 강대국 블록은 ‘반동적’이고 그에 맞선 반대쪽 강대국 블록은 ‘진보적’이라는 것입니다. 진영논리는 냉전기에 생겨난 것이죠. 제가 진영론자라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비판입니다. 토니 클리프는 냉전의 양대 진영 모두를 착취적 제국주의 블록으로 보고, “워싱턴[미국]도 모스크바[소련]도 아닌 국제사회주의”라는 기치에 따라 우리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을 창립했습니다.
진영논리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실제로 부활했습니다. 특히, 시리아 아사드의 살인 정권을 지지하거나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을 옹호한 것이 이와 연관된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두 사례 모두에서 그런 입장에 반대했습니다. 당신이 말한 “신(新) 진영논리”에 대해 제가 발표한 비판들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따분한 지면 낭비일 것입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당신은 국제사회주의경향이 [아사드 정권에 맞선] 시리아 혁명을 굳게 지지했고 ‘시리아 혁명적좌파경향’의 우리 동지들이 그 혁명에 동참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영국 전쟁저지연합 지도부가 두 사례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우리는 전쟁저지연합을 계속 지지하면서, 이견도 분명히 밝혔습니다. 다행히도 현재 전쟁저지연합 지도부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부·동부 유럽에서 나토가 한 구실을 모두 규탄하고 있죠. 제가 “신(新) 진영논리”를 펴고 있다는 비판은 철회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견은 무엇일까요? 1970년대에 방영된 영국 시트콤 “폴티 타워스”의 한 유명한 에피소드는 독일인 관광객들에게 “‘전쟁’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것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요, 현재 상당수 좌파는 마치 ‘“나토’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신은 그런 입장에 정교한 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현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간 세계적 경쟁 체제라는 그것의 성격에 관해 당신도 다 아는 얘기를 제가 “박사모를 쓰고 가르치려는 듯이 설명한다”고 불평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로 답하고자 합니다.
첫째, 앞서 말했듯이 제 글은 당신을 향해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그럼요, 당신은 제국주의의 역사와 현 단계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냉전 종식 후 미국의 전략에 대해 1998년 《뉴 레프트 리뷰》에 기고한 훌륭한 글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전략적 삼각 관계 ─ 미국, 러시아, 중국”이었죠. 지금도 매우 유효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최근 우크라이나에 관해 쓴 글들에서는 거기에 담긴 분석이 거의 실종돼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우크라이나에 관해 당신이 최초로 쓴 글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급진적 반제국주의 입장에 관한 메모”입니다. 이 글은 나토 확장 문제에 딱 한 문장만을 할애합니다.
나머지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쟁투에서 좌파가 해야 할 일을 다룹니다. 제가 앞서 비판한 다른 글에서 당신은 이 전쟁이 국민 방위 전쟁이면서도 제국주의간 전쟁이라는 점을 부정함으로써 이러한 강조점을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그 논거는 매우 빈약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경쟁하는 제국주의가 전쟁하는 당사자를 각각 지원한다고 해서 그 전쟁을 제국주의간 전쟁이라 부른다면, 이 시대의 모든 전쟁이 제국주의간 전쟁일 것이다. 왜냐하면 경쟁하는 제국주의 중 한 쪽이 전쟁의 한 편을 지원하면 상대편 제국주의가 다른 편을 지원하리라는 것은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간 전쟁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두 강대국들이 대리전이 아니라 직접 전쟁을 벌이면서 상대의 영토와 (신)식민지를 침탈하려고 하는 것이다. 제1차세계대전이 정확히 그런 사례였다. 레닌이 즐겨 쓴 표현처럼, 제국주의 간 전쟁은 양측 모두의 ‘강탈전’이다.”
이런 정의, 즉 양측 모두가 상대의 영토를 점령하려 해야만 제국주의간 전쟁이라는 규정은 심지어 제2차세계대전에도 들어맞지 않습니다. 영국·프랑스 제국주의의 관심사는 독일 영토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버겁게 유지하고 있던 각자의 제국을 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도 영국·프랑스 영토에 딱히 관심이 없었습니다. 히틀러가 노렸던 것은 동유럽과 소련이었죠.
대리전을 제국주의 간 전쟁 개념에서 배제하려는 것 또한 근거가 부족합니다. 1950~1953년의 한국전쟁은 클리프가 당시에 주장했듯이 제국주의간 전쟁이었습니다. 소련이 중국·북한을 앞세워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상대로 벌인 대리전이었죠.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남한 침공과 한반도 재통일에 열의를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스탈린이 그런 김일성을 격려하고 지원했습니다. 이는 남한의 부동항을 확보하고, 머뭇거리던 마오쩌둥을 소련 블록 편으로 확실하게 묶어 두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이런 사례들과 완전히 다릅니다. 이 전쟁을 추동한 것은 [베트남] 공산당이 이끈 민족 해방 투쟁이었습니다. 이 투쟁은 프랑스·일본 제국주의와 잇달아 대결한 뒤 미국 제국주의와도 대결했죠. 소련의 상당한 군사적 지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은 어느 모로 보나 전쟁을 지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60년대 후반 ~ 1970년대 초에는 이 전쟁이 미국과의 ‘데탕트’에 지장을 줄까 봐 걱정했습니다.
지금 벌어지는 전쟁에 대해서도 이런 구체적 판단을 해야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민족의식은 분명 굳건하고, 침공 때문에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나토가 매우 능동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 상황은 당신 자신도 “무익한 가정”이라고 인정하면서 레닌에게서 인용한 가상의 상황, 즉 “국제사회”가 [다른 제국주의적 목적은 없이 오직]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되돌리려 전쟁에 나선다는 상황에도 들어맞지 않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당신이 말한 “전략적 삼각관계”를 이루는 나머지 두 국가, 즉 중국·러시아와의 장기적 투쟁을 벌이려는 목적에서 나머지 나토 회원국들과의 동맹을 다시 활성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당신은 애써 부정하지만, 많은 중요한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와 서방을 지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논평가 에드워드 루스에 따르면, 지난 3월 2일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 대한 유엔 총회 표결에서 “기권표를 던진 중국·인도·베트남·이라크·남아프리카공화국 등 35개국은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여기에 러시아를 더하면 절반을 넘는다.”
3월 24일 바이든이 나토 정상 회담에서 재확인시켜 줬듯이, 서방은 전쟁 전부터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군사훈련을 제공함으로써 전쟁에 가담해 왔고, 현재 보급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서방의 정보기관, 군사고문단이 현지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더구나 서방의 구실은 군사적 지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당신은 러시아 제재를 지지하지도 말고 제재 해제를 요구하지도 말자는 기이한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합니다. 이는 제재가 실제로 하는 구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당신이 말한 “치명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릴까 봐 직접 교전은 피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를 세계 무역에서 배제하고,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사용을 차단하고, 유럽의 러시아 석유·가스 의존도를 줄임으로써 러시아에 막대한 경제적 타격을 가하려 합니다.
니콜라스 멀더 뉴욕 코넬대학교 교수는 제재의 역사를 연구한 탁월한 신간 저서에서 제1차세계대전 동안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과 그 동맹국들에 가한 봉쇄를 살핀 후 이렇게 썼습니다. “경제 제재를 흔히들 전쟁보다 덜 유해한 대체 수단으로 여긴다. 하지만 전간기[제1차세계대전 종전 후 ~ 제2차세계대전 발발 전]를 살던 사람들에게 제재라는 경제적 무기는 전면전의 본질 그 자체였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도 서방의 금융 제재를 정확히 그렇게 인식하고 핵 전력 경계 태세를 높이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더구나, 미국이 자기에게 유리한 때 얼마든지 중국을 제재할 수 있다는 두려움은 분명 중국이 러시아를 지지하는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올바른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은, 현 상황이 제국주의간 대리전인 동시에 우크라이나 측에서 보면 국민 방위 전쟁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죠. 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적 권리를 지지하면서도, 제국주의간 확전의 “치명적 소용돌이”를 부채질할 조처 일체(제재와 나토의 무기 지원도 여기에 포함됩니다)에 반대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남긴 국제주의 전통은 독특한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전쟁을 일으키고 계속 심화시키는 세 갈래의 제국주의 경쟁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