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친미는 자본을 위해 노동자·서민을 내치는 계급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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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방부의 기밀문서 유출 파장이 크다. 미국 언론들은 윤석열 대통령실 도청, 한국 정부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방식과 일정에 대한 문서들을 보도했다.
주목되는 것은 미국이 한국에 우크라이나 전쟁 무기 지원을 강하게 요구한 정황이다. 이후 한국 정부가 이 요구에 부응하려고 노력한 정황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아마 미국은 미·중 경쟁의 심화와 패권 질서 유지 맥락에서 한미일 협력을 복원하는 것과 함께, 한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본 듯하다.
윤석열은 미국의 이런 요구를 먼저 이행하고 나서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에 ‘청구서’를 내밀 생각이었던 듯하다.
윤석열은 4월 5일 ‘제2차 국정과제점검회의’에서 “외교의 중심은 경제”라고 강조했다. 이 회의에서 윤석열은 “앞으로 글로벌 협력을 확대해서 원전, 반도체,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고 수출 성과와 해외시장 개척을 이뤄내는 데 역량을 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석열이 언급한 “원전, 반도체, 공급망 협력” 모두 미국 정부와의 협력에 의존해 풀어야 할 경제 문제들이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의제 목록에 올려야 할 쟁점들인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심지어 일본마저) 한국 정부와 대기업들이 바라는 명시적 보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불공정해 보이는 이 거래에도 윤석열 정부가 미국 정부에 항의를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저자세 외교,” “굴욕 외교”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내치면서까지 한일 군사 협력을 복원한 것도 한미일 동맹 강화를 위해 한 일이기 때문에 한미관계의 불평등에 대한 비판은 늘고 있다. 미국에 도청을 당했는데도 윤석열이 미국에 항의하지 않는 것이 더욱 그런 견해에 힘을 싣는 듯하다.
상호 이익 동맹
그러나 이런 양상은 한국이 미국에 종속돼 있기 때문은 아니다. 미국은 일방적 수혜자도, 일방적 수탈자도 아니다. 미국이 자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우선하듯이, 한국 지배계급도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와 한국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판단·선택하는 것이다.
한미동맹은 협력만 한 게 아니라 상호 무역 분쟁을 겪었고, 북한·중국·일본 등 주변국과의 관계 문제로 불신과 갈등도 겪어 왔다.
지금 한국 정부가 지정학적 미·중 갈등에서 미국을 지원하기로 한 것은 한국 경제 성장의 배경이 돼 온 한미동맹과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가 여전히 한국 자본주의에 더 이롭다고 보고 자기 나름의 선택을 한 것이다.
문제는 미국도 지금 동맹을 경제적으로 배려할 여유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최근 실리콘밸리은행 금융 위기에서 보듯 미국 경제 상황도 좋지 않고, 바이든 정부는 국내 산업과 일자리를 우선해야 한다는 압박을 크게 받고 있다.
이번 도청 건도 미국의 동맹 포섭과 관리에서의 난관을 보여 준다. 사실 이 건에 대한 양국 반응에서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드러난다. 미국은 문서 유출 경위를 파악하고 동맹을 달래는 게 우선이라면, 미국에게 양보받고 싶은 게 많은 한국은 미국 비판에 조심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눈치도 봐야 한다.
한미동맹 전반부에 미국은 동맹 유지 비용을 충실히 지불했다. 냉전의 최전선 국가로서 한국이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시장 자본주의 국가로 확고히 자리잡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원조 규모는 한국 총생산의 10퍼센트(정부 예산의 40퍼센트)에 이르렀다. 미국 측 비용에는 우익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지지·후원도 포함돼 있었다.
그에 따른 권위주의적 통치와 초착취는 한국의 노동계급이 치른 한미동맹의 비용이었다.
이 관계는 경제적 상호 관계 변화를 겪으며 달라졌다. 1980년대 중엽부터는 한미 간 통상 마찰이 빚어졌다.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미국이 성장한 한국 경제를 지원 대상에서 잠재적 경쟁 대상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한국 지배계급은 두 번의 선택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는 1997년 IMF 위기 후 구조조정과 시장 개방이고, 또 하나는 한미FTA 체결이다.
둘 다 한국 경제를 개방해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경제 질서에 적극 편입되기로 한 것이다. 개방은 미국 기업들에게 전보다 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 것이었지만, 한국 지배계급은 한국 경제를 더 효율화해 경쟁력을 키우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이를 위해 노동계급이 희생돼야 했다. 한미FTA의 문제는 경제 ‘종속’이 아니라 바로 한미 두 지배계급들의 착취와 자본축적에 있었다.
미국 주도 신자유주의 세계화 질서에 적극 들어가는 것을 한국 자본가들은 당시에 ‘경제 영토의 확장’이라고 불렀다. 중국 경제와 본격 통합된 것도 이 때다.
상호 투자와 무역의 증대 속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은 안보 동맹과 함께 “기술 동맹”으로서 맺은 관계다. 1980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이 도입한 기술의 56퍼센트가 미국산이다.
동맹의 비용
미국이 중국을 견제할 동맹 포섭에 사활을 걸면서도 동맹국들에게 가입 비용을 내라고 수전노처럼 구는 것은 (도청 건처럼) 오만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미국의 군색한 처지 때문이기도 하다.
여야 의견 차는 여기서 비롯한다. 윤석열과 여권은 서방 제국주의를 지원하기로 한 이상, 이왕이면 어려울 때 화끈하게 돕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실리를 챙길 수 있다고 본다.
가령 한미 정상회담에 따라갈 방미 사절단을 꾸린 전경련의 한국경제연구원은 정상회담에서 윤석열이 보조금 요건 완화를 요구하라고 주문했다. 그들은 4월 14일 미국 반도체법이 기업 본연의 목표인 이윤 추구를 제한한다고 비판하며, “상호주의에 입각한 형평성에 맞는 반도체법 보조금 요건을 마련하여 양국의 상호이익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 대리 전쟁으로 소모되는 무기를 미국과 나토 국가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무기 지원은 한국 국가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 윤석열이 표방한,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을 통해 “자유, 평화, 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국가”의 모습인 셈이다.
반면, 이재명의 민주당은 미국의 군색을 지렛대 삼아 더 많은 실리를 챙길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둘 모두 한국 지배계급의 독자적 이익 극대화를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야 모두 한미동맹을 지지하면서도 실천에선 중국 시장을 쉽게 포기하진 않는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들을 볼 때, 한미동맹을 종속 관계로 보면서 국익 개념으로 접근하면 한국 지배계급을 노동계급과 한편으로 여기는 오류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는 오히려 경제 위기 고통 전가를 위해 친기업 노동개악을 추진하는 윤석열 정부 반대를 위한 대중의 의식 발전에 해롭다.
가령 삼성반도체의 실적 부진을 두고 삼성이 미국과 윤석열에 의해 피해를 봤다고 보는 시각이 그렇다. 이런 생각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미국의 압박에 맞서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감세나 노동조건 공격 등에 반대하기가 어렵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1998년 5월 당시 대통령 김대중이 경제 위기 탈출 협상차 미국을 방문하기로 했을 때, 당시 민주노총 지도층은 국익 외교를 지원한다며 예고된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을 취소했다. 그 대가는 대량 해고와 임금 삭감의 광풍이었다.
한미동맹이나 한미FTA를 대미 종속이며 한국 경제에 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일부 좌파는 이후 현실이 그와 다름을 보고 근본적 사회 변혁 전망을 상실하기도 했다.
한미동맹이 종속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무엇보다 한국 지배계급이 그것을 통해 그 나름의 독자적 이해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봐야 한국 지배자들이 서방 제국주의를 지원해 지정학적·군사적 이득을 키우려고 할 때 혼란에 빠지지 않고, 한국과 미국의 지배자들 모두에 맞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