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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세난과 전세 사기 피해자

전세 사기 피해가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다. 최근에도 광주의 아파트 단지에서 30여 가구의 피해가 발생했다. 인천 미추홀구에서도 또 다른 전세 사기 피해가 발생했다.

상반기에 전세 사기 피해자 5명이 자살했고,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처지에 공감하는 공분이 크게 일었다.

그러나 5월 말에 국회를 통과한 전세 사기 특별법은 피해자들을 빚의 구렁텅이에 방치하는 턱없이 부족한 내용이었다.

특별법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요구한 것은 “선 구제, 후 회수” 방안이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통과된 특별법에는 이런 내용은 전혀 담기지 않았다. 특별법의 핵심 내용은 경매에서 우선 매수권을 주고 대출을 해 줄 테니 피해자들이 경매를 통해 집을 사라는 것이었다. 또 선순위 근저당이 있어 경매를 할 수 없는 피해자들이 보증금을 고스란히 잃을 수 있는 상황은 방치한 채, 이들이 당장 거리에 나앉지는 않게 LH가 집을 매입해 공공임대로 거주하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전세 사기로 전세금을 잃고도 전세자금대출은 한 푼도 탕감되지 않고 전액 갚아야 한다. 특별법에 담긴 대책은 이 빚을 20년간 분할 상환하게 해 주겠다는 것뿐이다.

이처럼 턱없이 부족한 지원을 받으려 해도 집단 전세 사기라는 점을 입증하는 까다로운 선별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정부는 전세 사기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은 혈세 낭비라고 몰아붙이더니 종부세 삭감은 신속하게 진행했다 ⓒ이미진

각자도생

정부의 지원이 매우 미약한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보증금을 조금이라도 더 지키기 위해 각자도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전세 사기를 당한 최병현 씨는 1000채가 넘는 빌라를 소유한 것으로 유명한 빌라왕 김대성 사건의 피해자이다. 경매를 하려면 집주인이 있어야 하는데, 김대성은 지난해 사망했고 그의 재산을 상속할 사람도 나타나지 않아 경매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다.

“너무 황당하게도 법원에서는 저보고 상속인을 찾아내라고 합니다. 경매 절차를 진행하려면 전세 사기 피해자가 사기꾼의 재산 상속 과정을 다 파악해야 해요. 국가가 책임지고 하면 쉬워질 텐데, 피해자들이 각자 문제를 풀어야 하니 황당하죠.”

무엇보다 큰 문제는 피해자들이 보증금의 상당액을 날려야 한다는 것이다.

전세 사기로 경매를 진행하고 있는 서지애 씨는 이렇게 말했다.

“경매를 받는다 해도 지금 집값이 바닥을 치는 상황에서 엄청 손해를 볼 것 같아요. 진짜 어쩔 수 없어서 경매를 받는 거예요.”

조수진 씨는 얼마 전부터 전세금을 떼일 위기에 처했지만 집단 전세 사기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특별법의 지원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월세를 아끼려고 무리해서 대출을 갚아 가면서 전세 보증금을 마련했는데 지금은 이것이 날라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합니다. 그런데 집주인이 은행에서 빌린 돈은 재깍재깍 갚게 돼 있어요. 이것을 갚지 않으면 제재를 가하고 압류하는 등을 하잖아요. 그런데 왜 세입자한테는 그런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지가 너무 황당해요.”

고통전가

전세 사기 피해는 향후 더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은 역전세 위험 가구 비중이 2022년 1월 25.9퍼센트에서 2023년 4월 52.4퍼센트로 급증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계약 종료 시기에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될 세입자들이 늘어날 공산이 큰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최근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집주인들에게 대출 규제를 완화해 주고 종부세를 깎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출 규제 완화는 이미 가계 부채가 매우 큰 상황에서 부채 위기를 키울 일이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더욱 취약한 전세 세입자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게다가 정부는 전세 사기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은 혈세 낭비라고 몰아붙이더니 종부세 삭감은 신속하게 진행했다. 또, 정부는 반도체 기업 등 대기업에는 5년간 13조 원에 달하는 감세 혜택을 주고, 부도 위기 건설사들의 채권을 매입해 주는 데는 수조 원의 펀드를 조성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벌어진 일과 비슷하다.

당시에도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다가 꺼지는 상황에서 주택담보대출을 갚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앉았다. 무려 900만 가구가 주택을 압류당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은행을 구제하고 기업 지원에는 천문학적인 돈을 쓰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은 구제하지 않았다.

한국은 미국과 달리 전세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주택을 담보로 한 부채가 부실화되는 과정에서 전세 세입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떠넘겨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상반기 전세 사기 특별법이 통과되는 과정은, 이런 고통전가에 맞서 노동자 등 서민들의 삶을 지키려면 운동이 민주당이나 국회 합의에 의존하지 말고 대중 투쟁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줬다.

민주당은 특별법 추진 과정에서 마치 피해자들을 위하는 것처럼 행세했지만 혈세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정부의 주장에 쉽사리 타협하며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합의를 했다. 사실 애초에 민주당의 안 자체도 시장 원리에 따른 보증금 회수를 말하며 전세 피해자들에게 세금 지원을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정의당은 처음에 보증금의 절반 이상은 정부가 책임지고 보전해 주자는 안을 냈지만 국회에서 민주당과의 공조를 중시하다 보니 누더기 특별법 통과에 일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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