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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재판소들은 왜 팔레스타인인들을 보호하지 못하는가?

국제사법재판소(ICJ)가 5월 24일 라파흐 공격 중단을 “명령”하고,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사장 카림 칸이 5월 20일 네타냐후 등에 대한 체포 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지난주 라파흐에서 팔레스타인인 피란민 66명을 학살했다.

ICJ가 가자지구의 휴전을 강제하지 못하고, ICC의 체포 영장이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와 국방장관 요아브 갈란트를 구속시키지 못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 국제 재판소들은 “국제 사회”(서구 열강)의 의지와 권력에 의존해 판결을 집행한다. 그리고 이 “국제 사회”는 중동의 맹방 이스라엘을 상대로 판결을 집행할 의향이 없다.

미국 의회의 민주당·공화당 지도자들은 5월 31일 네탸나후를 상하원 합동 연설에 공식 초청했다! 네타냐후는 미국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가장 많이 연설한 정치인이 될 예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국제 재판소들의 결정이 상징적 의미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과 연대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갖는다. 국제 재판소들의 최근 움직임은 서방 지배자들이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 주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은 이스라엘의 전투기와 탱크에 의해 잿더미가 된 가자지구에서 수개월째 영웅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투쟁하고 있다. 다른 한편, 미국 대학생들의 점거 운동은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바이든 정부는 경찰을 투입해 대학 점거 농성장을 침탈하고 학생들을 체포했지만, 학생 운동을 분쇄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운동이 중요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팔레스타인 국가” 지위 인정이나 서류상으로나 남아 있을 뿐인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 논의로는 이스라엘을 패퇴시킬 수 없다.

네타냐후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 제국주의 시스템에 도전해야 한다.

최근 판결들은 서방 제국주의 지배 질서의 위기를 보여 주지만,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서방 강대국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국제 재판소들의 임무는 전쟁과 인종 학살로부터 무고한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서방 강대국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ICJ(국제사법재판소)는 유엔(UN)의 주요 사법 기구이다(1945년 설립). 국가들의 위계적 관계를 반영하는 유엔에서 핵심 기구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에 직접·간접 책임이 있는 강대국들로 이뤄져 있다. 미국은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해 이스라엘에 불리한 유엔 결의안들을 한결같이 막아 왔다.

ICJ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5월 16일 요청을 수용해) 5월 24일 이스라엘에 라파흐 공격 중단을 “명령”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명령”을 뒤집기 위해 별도의 조처를 취할 필요가 없다. ICJ가 자신의 “명령”을 강제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은 이 “명령”을 간단히 무시했고 백악관은 아무 성명도 발표하지 않았다.

한편, ICC(국제형사재판소)는 유엔에 소속돼 있지 않은 “독립” 기관으로, 2002년 로마규정에 의해 설립된 상설 국제 재판소이다. ICC는 인종 학살, 전쟁 범죄, 반인도 범죄 및 침략 범죄와 같은 국제 범죄로 개인을 소추할 수 있다.

2022년 현재 123개국이 로마규정을 비준했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 중국·러시아는 비준하지 않았다.

미국은 자국의 대외 정책이 국제법에 의해 제약당하는 것을 원치 않아 ICC의 설립 자체를 반대했다.

ICC는 옛 유고 전범재판소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옛 유고 전범재판소는 1990년대 미국·나토·유럽연합의 발칸반도 개입을 합법화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다.

옛 유고 전범재판소는 2006년 유고슬라비아 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사망하자 “종료”됐다.

밀로셰비치는 스룹스카공화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자치 공화국) 대통령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발칸의 도살자”였다. 그리고 1990년대에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을 학살한 전범이자 철권통치를 한 독재자였다.

밀로셰비치는 2000년 세르비아 항쟁으로 쫓겨난 뒤 옛 유고 전범재판소 감옥에 수감돼 재판을 받던 중 옥사했다.

카라지치는 1995년 스레브레니차에서 8000여 명의 무슬림들을 인종청소했고,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40일간 포위하고 포격해 1만여 명을 학살했다. 카라지치는 옛 유고 전범재판소에서 40년 형을 선고받았다.

밀로셰비치와 카라지치가 옛 유고 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것은 그 둘이 옛 소련권 국가의 수반, 다시 말해 서방의 적성국들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ICC도 그런 불문율을 따랐다. ICC는 지금까지 서방과 그 우방국 지도자를 기소·심리·구속한 적이 없다. ICC가 그동안 체포 영장을 발부한 인물은 전 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 전 수단 대통령 오마르 알바시르,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네타냐후에게 체포 영장이 발부되면 미국의 동맹국 정상으로는 최초다.

그 때문에 ICC 검사장 카림 칸은 네타냐후 등에 대해 체포 영장을 청구한 뒤 “한 고위 지도자”에게 꾸중을 들어야 했다. “ICC는 아프리카나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같은 깡패를 기소하려고 만든 기구[다.]”

카림 칸은 하마스 지도자 3명에 대한 체포 영장도 청구해 균형을 맞췄다. 하마스는 서방 국가들에 의해 ‘테러 단체’로 지정돼 있고 그 지도자들은 상시적으로 체포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ICC의 체포 영장 청구는 서방 제국주의가 사실상 통제하는 국제기구로까지 위기가 번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바이든이 이번에는 침묵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영장 청구는 터무니없다. …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미국 하원의장 마이크 존슨은 카림 칸 검사장을 제재하겠다고 협박했다. “의회는 그들이 더 나간다면 국제형사재판소와 그 지도부를 벌하기 위해 제재를 비롯한 모든 수단을 검토하겠다.”

윤석열 정부는 침묵했다. 아마 서방 국가들이 이 사안을 두고 분열했기 때문인 듯하다. 민주당은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을 규탄한 뒤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문제에 대한 입장을 도통 회피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스라엘과 서방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정당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가자지구 대량 학살의 책임은 하마스가 아니라 전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 등 서방)에 있다. 3만 6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고 가자지구를 초토화해 버린 가자 전쟁은,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을 핑계로 삼은 계획적 인종청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