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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귀환: 1930년대로 돌아가는가?

유럽에서 파시스트 정당들이 약진하는 것은 경악할 일이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이 사민당을 누르고 2위를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총리 조르자 멜로니가 있는 이탈리아형제당(FdI)이 1위를 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마린 르펜과 조르당 바르델라가 있는 국민연합(RN)이 1위를 차지했다.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 시행한 조기 총선에서 국민연합은 ‘집권’을 위협하고 있다. 이 나라들은 유럽의 경제 대국들이자 서방 주요 7개국(G7)의 회원국들이다.

파시스트들 이탈리아형제당의 조르자 멜로니(왼쪽)와 프랑스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오른쪽)

이런 극우의 부상은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다.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재집권할 수도 있고, 라틴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에서는 극우 정치인 하비에르 밀레이가 집권했으며, 남아공에서는 극우 정당인 애국동맹이 연정에 들어갔다.

극우의 부상을 먼 나라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일랜드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사례다. 아일랜드 좌파는 아일랜드가 파시즘의 무풍지대라는 데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극우가 처음 당선됐다.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당선자를 내지 못했지만 꽤 득표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난민들이 머물고 있던 호텔(난민 수용소)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하는 등 크고 작은 난민 반대 시위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최대 개혁주의 정당인 신페인당은 난민 반대 시위들을 과소평가했다. 그 틈을 비집고 극우가 등장했다.

트럼프가 집권하면 한국의 우익도 고무될 수 있다. 극우의 위험이 서구를 넘어 일반화될 수 있는 상황이므로 우리는 지금부터 대비해야 한다.

왜 유럽에서 파시즘이 급증하는가?

당장 파시즘 등 극우와의 대결의 최전선은 유럽이다. 왜 유럽에서 파시즘이 급증하고 있는가? 유럽 사회가 우경화됐기 때문이 아니다. 파시즘의 부상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다중 위기의 산물이다. 금융 위기, 기후 위기, 팬데믹, 전쟁, 소요 등 자본주의의 재난이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중도 좌파나 중도 우파의 기성 정당이 배출한 유럽 정부들은 이런 위기에 대응해 점점 더 공공연하게 극우적 언사를 쓰고 인종차별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 정부들의 국경 폐쇄로 지난 10년 동안 지중해에서 사망한 난민이 2만 7000명이 넘는다. 이슬람 혐오, 난민 추방, 난민 수용소 설치 등도 유럽 정부들의 주요 정책이다.

인종차별의 목적은 망가진 삶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다른 차별받는 사람들(무슬림, 난민, 이주민, 로마인, 소수민족, LGBT 등)로 향하도록 만들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본주의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 저항을 통제하는 수단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유럽 정부들은 인종차별을 이용해 국가의 통제와 탄압을 강화하고, 새로운 무장 기구를 신설하고, 경찰·군대·정보기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슬람 혐오

기성 정당들이 앞장서서 인종차별을 부추기자 파시스트들이 비빌 언덕이 늘어났다. 예컨대, 프랑스 국가가 무슬림 여성이 전통 복장을 하고 학교와 공공장소에 가는 것을 금지하자, 파시스트들은 그런 복장의 여성이 유럽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파시스트들은 기성 정치 시스템에 부합하는 세력으로 변신하는 데에 이슬람 혐오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 좌파들의 대부분은 이런 위험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왔다.

독일 좌파는 오랫동안 국가 뒤에 서서 파시즘을 반대했다. 반나치법을 통해 히틀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좌파 지도자들은 르펜의 국민연합을 좀 더 강경한 우익 정당 취급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럽 좌파는 선거에 도움이 안 된다며 인종차별에 타협했다. 예컨대, 독일 좌파당에서 분당한 자라 바겐크네히트는 “이민자가 너무 많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영국에서는 조지 갤러웨이가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인종차별에 맞서는 것을 회피한다면 파시즘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없다. 인종차별 반대는 엔(N) 분의 일 전투가 아니라, 파시즘을 막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파시즘은 특별한 극우

파시즘을 매우 느슨한 의미로 사용할 때가 많다. 한국의 일부 좌파는 윤석열 정부를 ‘파쇼’라고 부른다. 그러나 파시즘은 마음에 들지 않는 정부를 향한 저주 같은 게 아니다.

파시즘은 특별한 극우다. 물론 파시스트가 아닌 극우는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선거에서 극우를 지지하는 표가 늘어나면 파시스트가 성장할 토양이 된다.

파시즘은 단순히 반동적인 인종차별이나 국수주의적 편견 같은 게 아니다. 대부분의 기성 자본주의 정당들도 표를 얻고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인종차별을 이용한다.

파시즘이 기성 정당들과 다른 점은, 인종차별을 부추겨 자신의 정치적·사회적 지배력을 확립하면 모든 좌파 조직과 노동계급의 모든 독립적 조직을 분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이다.

흔히 파시즘 운동은 히틀러 같은 반쯤 미치광이가 의회 밖에서 대중 조직을 건설하는 데서 시작한다. 파시즘 운동은 소상인, 상점 주인, 자영업자 등 프티부르주아지를 주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파시즘은 이들의 대중 운동이다. 히틀러는 대중 운동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작은 사람은 벌레 같다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거대한 용의 일부로 느끼게 할 운동에 참가시킨다.”

프티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의 위기로 고통받지만 자본가와 노동계급을 모두 싫어하고 경멸한다. 또, 소수민족과의 경쟁으로도 고통받는다고 종종 느낀다.

파시스트들은 민족적·인종적 ‘순수성’을 설파해 이런 소수자들에 대한 응어리와 좌절감을 표출하는 동시에 좌파와 노동계급 조직에 대한 증오심을 키운다.

프티부르주아지

파시스트들이 프티부르주아지 속에서 대중적 기반을 구축해 내면, 노동계급의 일부, 특히 소규모 공장 노동자나 장기 실업자처럼 독립적인 계급 조직의 전통이 없는 사람들과 빈민들 사이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파시즘의 주된 기반은 프티부르주아지다.

간혹 처음부터 파시스트의 메시지를 지지하는 일부 지배자들이 있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의 주요 부분은 시스템이 매우 심각한 위기에 빠지지 않는 한 파시즘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의 매스 미디어, 온순한 의회 정당, 온건하고 경제주의적인 노동조합 지도자 등 좀 더 “평화적인” 수단들을 통해 사회를 통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파시스트들이 자기들의 프로그램을 직접 전면적으로 실행하면 커다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해 이윤 면에서 비용이 많이 들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상시에 지배계급은 파시즘 운동을 좌파와 노동자 조직에 대한 균형추로 이용하지만 자신들에게 기어오르지 못하게 한다. 필요하면 경찰을 통해 파시스트들을 견제한다. 물론 노동계급 운동을 상대로 훨씬 더 자주 경찰력을 사용하지만 말이다.

이게 1920년대 초 이탈리아와 1930년대 초 독일에서 지배계급이 파시스트들을 다룬 방식이었다. 이탈리아 지배계급은 1920년 중반부터 1922년 중반까지 파시스트를 노동자·농민 조직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는 한편, 우익적인 의회 정부의 집권을 지지했다.

독일 지배계급도 1929년부터 1932년 말까지 나치를 노동자 조직에 대한 균형추로 삼는 한편, 권위주의 정부로 하여금 노동자들의 조건을 야금야금 공격하도록 했다.

미친개

이렇듯 지배계급은 프티부르주아 파시스트 무리를 노동운동을 겁주고 위협하는 데 사용할 미친개로 여겼다.

그러나 엄청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위기에 대한 다른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지배자들은 미친개에게 권력을 넘겨줬다. 대중적 파시스트 조직은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에 침투할 수 있고, 국가의 힘과 결합되면 권위주의 정부가 국가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노동계급 조직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2년 10월 이탈리아 국왕과 산업 자본가의 당인 자유당은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넘겨줬다. 독일에서도 군부와 대자본가들은 1933년 1월에 히틀러의 집권에 동의했다.

프티부르주아지를 기반으로 하는 파시즘은 대기업과 국가의 승인 없이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히틀러는 1923년에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굴욕적인 패배를 겪었다.

파시즘의 성공은 아래로부터 구축된 프티부르주아 운동과 지배계급의 위로부터의 결정이 결합되는 데 달려 있다. 이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라도 빠지면 파시스트 국가 수립 시도는 실패했다.

파시즘은 1930년대에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현재 유럽은 1930년대로 돌아가고 있는가? 오늘날과 1930년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말하기 전에 먼저 1930년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1930년대는 고전적 파시즘이 승리했던 시기다. 나치 또는 나치 부역 세력이 독일·스페인·프랑스 등에서 집권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이미 1922년에 집권했다. 당시 파시스트들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1930년대는 경제·정치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때였지만, 파시스트의 집권은 결코 위기 상황의 자동적 산물이 아니었다. 1918~1919년과 1923년 독일, 1919~1920년 이탈리아도 심각한 위기를 겪었는데, 그때 프티부르주아지는 노동운동을 지지했다. 노동운동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 권력을 잡은 히틀러 히틀러의 집권은 위기의 자동적 산물이 아니라 좌파의 정치적 패배였다

1930년대 파시즘의 승리는 좌파의 정치적 패배를 딛고 일어난 일이었다. 1930년대 독일 나치의 집권을 분석하는 연구에서 흔히 1918~23년 독일 혁명의 역할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히틀러의 집권을 1918년 독일 혁명 이래 15년 동안 전개된 반혁명적 노력의 정점으로 묘사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사민당이 부르주아지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구했다면, 이번에는 파시즘이 부르주아지를 사민당에서 해방해 줄 차례다. 히틀러의 뒤집기는 반혁명적 전환의 사슬에서 마지막 연결 고리일 뿐이다.”

1918년 11월 노동자와 병사들이 독일 카이저(황제)를 전복하고 평의회를 수립한 뒤 제1차세계대전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바이마르공화국을 관리하게 된 사민당은 혁명을 통제했다. 독일 혁명은 1923년에 패배로 끝났다.

나치당은 1919년에 창당됐고, 히틀러는 1923년 10월 돌격대를 이끌고 뮌헨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나치는 위기에 빠졌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24~1929년에 13만 명에 이르는 중핵 조직을 구축했고, 이들이 이후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치명적 실수

독일 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파시스트 정당 사이의 차이를 보지 못하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 때문에 사민당은 헌법으로 나치를 막을 수 있다고 착각했다. 1932년 4월 대선에서 보수의 대부 격인 힌덴부르크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힌덴부르크가 히틀러에 비해 ‘차악’이라는 논리였다. 힌덴부르크는 9개월 뒤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공산당은 자본주의 전복과 나치 분쇄를 원하는 수십만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대중 정당이었다. 1932년에 공산당원은 36만 명이었다. 공산당의 준군사 조직인 적색전선 전사동맹(RFB)에는 10만 명이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는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이 지시한 초좌파적 종파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사회민주주의가 파시즘의 쌍둥이 형제인 ‘사회파시즘’이라며 사민당과의 공동 행동을 일절 거부하는 정책이었다.

공산당은 사민당 노동자들에게 사민당 지도자들을 그저 비판하며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들이라는 최후통첩적 제안만을 했다.

당시 트로츠키는 매우 중요하고 통찰력 있는 비판을 제공했다. 트로츠키는 주류 보수 정당과 파시즘 정당의 핵심적 차이를 강조했다. 파시즘은 프티부르주아지에 기반을 두고 노동자와 농민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일단 국가 권력을 장악하면 보통의 자본가 정부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저항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파시즘에 맞서는 특별한 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36년 6월 프랑스에서 벌어진 거대한 점거 파업 물결

트로츠키는 독일에서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공산당으로 조직된) 더 급진적인 노동자들이 덜 급진적인 노동자들의 정당(개혁주의적인 사민당) 지도부에게 공동 행동을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치에 맞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공동으로 동원하는 정책은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첫째, 거리에서 실제 힘의 관계를 측정할 수 있다. 나치 돌격대 40만 명은 투쟁 경험과 힘을 가진 수백만 명의 좌파 노동자들과 맞붙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극복이 쉽지 않은 트라우마를 안게 될 것이다.

둘째, 지배계급은 나치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마지막 단계를 밟기 전에 심각하게 재고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노동운동의 역동성을 고무할 것이다. 나치뿐 아니라 해고와 생계 악화에 맞서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서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트로츠키가 제안한 공동전선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사민당·공산당 지도부는 공동 행동을 거부했다. 그 덕분에 나치는 실질적인 저항을 받지 않고 집권했다.

현재 유럽은 1930년대로 돌아가고 있는가?

거리와 일터에서 단결해 파시즘을 반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1930년대의 경험은 파시스트의 잔인함이 일단 시작되면 끝이 없음을 경고한다. 자본주의의 역사에는 인종차별적 정부들이 많았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600만 명을 학살한 정권은 없었다.

물론 현재 경제 위기가 하도 심각해 유럽 자본가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처럼 파시즘만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프랑스의 몇몇 대자본가들은 파시즘을 차악으로 선택할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또, 빈곤으로 인해 “발광한”(트로츠키의 표현) 프티부르주아 대중이 거리 전투에 기꺼이 목숨을 걸고 나서는 상황도 아니다. 그래서 현재 파시스트의 거리 동원력은 약하고, 주로 선거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설령 이번 프랑스 총선에서 파시스트가 총리가 된다고 해서 프랑스가 곧장 1933년 독일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국민연합은 아직 좌파·노동조합·민주주의 기구를 파괴할 거리 운동이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파시스트 총리가 등장하면 상황이 질적으로 바뀔 것이다. 파시스트들은 국가 기구들에 터를 잡고 그리되면 거리의 파시스트 깡패들이 힘을 받을 것이다. 이주민, 난민, 무슬림, 각종 시위들, 파업 등을 지금보다 훨씬 혹독하게 공격할 것이다.

지난달 프랑스에서 파시즘에 맞서 8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일터와 거리에서의 투쟁을 키워야 한다 ⓒ출처 La France insoumise

따라서 파시즘의 위협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즉각 모두 단결해 행동해야 한다. 6월 15~16일 프랑스에서 파시즘에 반대해 약 80만 명이 거리 시위를 벌인 것은 희망을 보여 줬다.

프랑스 좌파 정당들은 이 격변에 대응해 선거 연합인 ‘신인민전선’을 결성했다. 멜랑숑의 ‘불복하는 프랑스’, 사회당, 공산당, 녹색당, 반자본주의신당 등이 신인민전선에 참여하고 있다.

질적 변화

이 선거 연합의 결성은 아래로부터 커다란 압력을 받은 결과였다. 신인민전선이 결성된 덕분에 사람들이 투표에 참가할 동기가 부여됐다. 프랑스 총선에서 국민연합이 패배한다면 통쾌할 것이겠지만, 최종 선거 결과는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선거 전선과 함께 거리에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계속되는 한 국민연합의 선거적 위협과 파시스트 깡패들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궁극으로 승패는 선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터와 거리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신인민전선은 1930년대 인민전선의 경험을 의식적으로 모방하고 있다. 물론 신인민전선은 고전적 인민전선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중도에 깨질 수도 있다.

1930년대 인민전선을 장밋빛으로 회상해서는 안 된다. 인민전선은 공동전선을 더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공동전선을 거부한 것이었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혁명가들과 개혁주의 노동자들이 공동 행동을 위해 같은 당에 가입해야 하는 것도, 모든 사안에 같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개혁주의 정당과의 협력은 강령이 아니라 제한된 구체적 쟁점에 대한 일시적 합의에 근거한다. 이때 혁명적 당은 정치적·조직적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독립성의 핵심은 동맹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인민전선은 공산당이 친자본주의 정당과 동맹을 맺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인민전선의 강령은 노동자 정당이 노동계급의 궁극적 목표(해방)를 포기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주아지의 목표에 종속되는 것을 전제로 했다. 즉, 계급 협력 정책이었다.

계급 협력

역사적으로 인민전선은 자본주의 국가의 의회 제도, 즉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지했다. 그래서 인민전선은 노동계급을 이데올로기적·정치적으로 무장시키는 게 아니라 무장해제시켰다.

1936년 프랑스에서 인민전선은 6월 총파업을 중단시켰다. 스페인에서는 “먼저 내전에서 승리한 다음에 혁명을 말할 수 있다”며 혁명 운동을 탄압해 프랑코와의 내전에서 패배를 자초했다. 그 뒤 제2차세계대전이 터졌다. 인민전선은 파시즘과 전쟁 둘 다 막지 못한 것이다.

현재 프랑스 신인민전선의 두 축은 ‘불복하는 프랑스’와 사회당이지만, 공약은 사회당의 정치가 상한선이 됐다. 신인민전선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과 하마스의 ‘신정주의’ 반대를 공약했다. 그럼으로써 서방 제국주의를 지지한 것이다. 불복하는 프랑스 측은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서 굴복했다.

파시즘 반대 운동을 건설할 때 파시스트들의 힘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되면 우리 측의 반격 가능성에 대한 비관론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과소평가는 반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반격은 가능하다. 극우와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파시즘 반대 공동전선을 구축해, 지역·일터·학교 어디에서든 파시스트와 극우에게 활동 공간을 내주지 말아야 한다.

서방 세계의 혁명가들은 파시즘 반대 투쟁을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과 연결시켜야 한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전례 없는 규모로 성장해 서방 권력자들에게 큰 곤란을 안겨 주고 있다. 그런 운동의 영향력과 자신감을 파시즘 반대 운동 건설과 연결시켜야 한다.

더 읽을거리

1933년에 나치는 어떻게 쉽사리 권력을 장악했는가? (최일붕, 〈레프트21〉 116호)

조르자 멜로니의 이탈리아 총리 등장을 계기로 무솔리니의 집권을 돌아보다 (사이먼 바스케터, 〈노동자 연대〉 4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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