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의 “법률 전쟁”으로 우익 반격의 실질적 위험성이 드러나다
〈노동자 연대〉 구독
대법원의 5월 1일 판결은 우익이 정치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얼마나 필사적인지를 보여 줬다. 윤석열은 사라졌고 극우의 부상은 한낱 에피소드였다는 환상을 이 사건은 여지없이 깼다.
대법원은 이재명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사실상 ‘이재명 대통령은 안 된다’는 메시지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사법권을 행사해 국민 참정권을 침해하려는 듯하다.(‘대법원의 이재명 공격과 쿠데타 세력의 재집권 시도’를 보시오.)
윤석열이 임기 중에 대법원을 보수파 다수로 교체한 결과다. 윤석열은 대법관 14명 중 10명을 새로 임명했다. 바로 이 10명이 유죄 취지 파기환송에 찬성했다.
대법원은 이재명의 대통령 후보 자격 박탈을 일차 목표로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재상고 절차상 6월 3일 선거일 전에 유죄가 확정되기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대법원의 5월 1일 선고 결과를 예상한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됐던가.
안이하게 생각할 때가 아니다. 대법원은 이재명의 후보 자격과 대통령직 중 어느 것을 빼앗는 게 대중의 저항을 덜(또는 더) 부를지를 두고 선고 전에 시나리오를 그렸음 직하다. 물론 두 시나리오 모두 위험 부담이 크다. 그러나 아무래도 대통령직 박탈 위험 부담이 더 크다고 보지 않았을까.
따라서 지금은 윤석열 석방과 헌법재판소 결정 직전 못지 않은 위험한 순간이다. 당시 우익은 치밀하게 “법률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서울중앙지법 판사 지귀연은 형사소송법의 허점을 이용해 윤석열의 구속을 취소했고, 한덕수와 최상목은 헌법재판관 임명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검찰은 선택적 법 집행을 했다. 이재명에 대해서는 사소한 사건조차 먼지떨이 수사를 하는 등 과도하게 법 집행을 하면서 윤석열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익은 권력을 잃을 때를 대비해 헌법 기관을 장악하려고 했다. 한덕수는 법제처장 이완규와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지금 그 효력은 일시 정지됐고 헌법재판소가 헌법소원을 심사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은 형식적으로는 법률과 법적 절차에 따라 진행됐다(“법 기술” 또는 “법꾸라지”). 윤석열도 계엄 선포가 “대통령 고유 권한”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정치학자들이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이런 정치 스타일은 최근에 미국·튀르키예·헝가리 등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이다.
예컨대, 3월 19일 튀르키예 대통령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과 극우 정당인 민족운동당(MHP)의 연립 정부는 자신들이 대선에서 패배할 듯하자 야당인 중도좌파 공화인민당(CHP)의 유력 대선 주자이자 이스탄불 시장 에크렘 이마모을루를 야비한 편법을 써 구속시켰다. 당시 이 소식을 보도한 본지 기사의 제목은 ‘튀르키예 정부가 야당 유력 대선 주자를 구속하다 ― 위기에 처한 튀르키예 좌파, 우리에게도 남 일이 아닐 수 있다’였다.
따라서 개혁주의자들의 법·질서 존중 태도는 우익의 “법률 전쟁”에 종종 당할 수밖에 없다. 윤석열 구속 취소와 헌법재판소 결정 직전에 개혁주의적 지도자들이 보인, 법리에 근거한 낙관론이 윤석열 탄핵 운동을 위태롭게 만들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의힘
선거 패배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던 여당은 대법원의 5월 1일 판결에 쾌재를 불렀다. 국민의힘(국힘) 원내대표 권성동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법원 선고 직후 한덕수가 출마했다. 민주당 수석 최고위원 김민석은 한덕수가 전직 국정원 간부를 중심으로 상황실을 꾸려 대선을 준비해 왔다고 주장했다.(‘트럼프의 지지를 받는 쿠데타 방조범 한덕수’를 보시오.)
전 국정원 1차장 홍장원도 국정원의 대선 개입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다. “계엄과 내란 속에서 무풍지대[에 있는] 국정원 수뇌야말로 [정권의] 최고 친위부대[다.]”
5월 3일에는 계엄과 탄핵에 대해 극우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김문수가 국힘의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한덕수처럼 그도 윤석열 정부의 각료 출신이다. 둘은 후보 단일화를 할 듯하다. 김문수에게 투표한 국민의힘 지지자들 다수가 한덕수로의 단일화를 원하기 때문에, 김문수는 한덕수의 푸시 맨이 되라는 압력을 크게 받고 있다.
전 〈한국경제〉 주필 정규재는 “[단일화 계획은] 윤석열 전 대통령 테이블에서 나온 거”라고 주장했다. “정권 재창출, 정권을 어떻든 자기를 지켜줄 사람으로 선택하려고 하는 과정이지요.”
선거가 시작되면 국민의힘이 중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윤석열 등 극우와 손절할 거라는 관측은 빗나갔다. 그런 관측은 “극우의 주류화”(극우가 공식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커짐) 정도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12·3 쿠데타는 대통령 윤석열 자신이 기도한 것이다. 친위 쿠데타는 거리 극우를 한껏 고무시켰다. 국가 지도자가 거리 극우와 동맹을 맺자 국힘 내에서 극우가 헤게모니를 쥘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됐다.
이런 역학은 1934년 2월 6일 파리에서 일어난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
1934년 2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극우파 동맹이 주로 전직 군인들을 동원해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의회 해산을 요구하며 국회의사당을 공격하려 했다. 극우는 경찰과 폭력적으로 충돌했고, 그 과정에서 15명이 죽었다. 그런데 우파 정당인 공화연맹당은 폭도들을 “순교자”로 치켜세웠고, 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했다.
그러자 극우파의 민주주의 파괴 공격이 순식간에 정쟁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극우파의 폭력은 공식 정치 내에서 정당성을 인정받게 됐다.
극우파의 폭동 직후 중도좌파 정부(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정당인 급진당이 주도하고 사회당이 뒷받침했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사퇴했다. 새 총리 가스통 두메르그(급진당의 우파)는 시행령 통치를 했고, “강한 정부”를 요구하는 세력들의 뜻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의회의 권한을 축소하는 개헌을 추진했다.
쿠데타 이후 국힘은 극우의 폭력적 언동에 눈을 감고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국힘 내에서 윤석열의 영향력은 유지됐다. 그래서 김문수가 한동훈을 누르고 국힘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물론 정치 상황이 윤석열의 뜻대로 순조롭게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윤석열을(그의 쿠데타와 함께) 증오하고 있다. 대중은 선거에서도 윤석열 일당의 패퇴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우익도 정권 재창출이냐 정권 교체냐 하는 문제를 생사가 달린 절박한 문제로 보고 달려들고 있다. 그래서 윤석열의 군사 쿠데타가 실패한 뒤에도 사법부·검찰 등 다른 국가 기관을 동원한 반격을 지속하고 있다.
따라서 대중의 윤석열과 쿠데타 일당 척결 염원이 현실이 되려면 선거가 전부가 돼서는 안 된다. 쿠데타 세력 척결 투쟁이 사활적으로 필요하다. 촛불행동이 지난주 토요일 집회(2만여 명 참가)에 이어 이번 주에도 대법원 앞 시위를 이어가겠다고 한 것은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