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엡스틴 문건 공개는 무엇을 반영하는가
〈노동자 연대〉 구독
11월 19일 트럼프가 ‘엡스틴 문건’ 공개 명령에 서명한 것은 공화당에 대한 트럼프의 장악력에 금이 갔음을 보여 준다. 트럼프는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문건 공개에 찬성 투표할 것이 명확해지는 상황에 직면해 공개를 명령한 것이다.
엡스틴 문건은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틴에게서 여성들(상당수는 미성년자)을 향응으로 제공받은 권력자들의 명단을 말한다.
그간 트럼프는 그 문건의 존재도, 엡스틴과의 연루도 부인해 왔다.
물론 트럼프가 자신의 성차별주의를 부끄러워해서는 아니다. 지난주에도 트럼프는 엡스틴 문건에 대해 묻는 여성 기자에게 “조용히 해, 돼지새끼야” 하고 폭언을 퍼부었다.
그런 지독한 성차별주의자가 엡스틴 쟁점에서 수세적 태도를 취하고, 트럼프가 원래 그런 인간인 것을 알던 공화당이 이 쟁점에서 그와 이반한 이유는 무엇일까?
공화당 의원들은 11월 4일 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한 직후부터 엡스틴 문건 공개 쪽으로 속속 입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공화당 의원들에 행사하는 영향력의 한 중요한 원천인 득표력에 흠이 갔기 때문이다.
재선 후 트럼프는 대대적인 이민자 단속을 전개하고 현대판 매카시즘 광풍을 일으켜, 대중의 불만이 ‘외부 집단’을 향하도록 돌리려 하며 반대파를 억누를 권위주의적 수단을 강화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공격은 곳곳에서 단호한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트럼프는 승리를 얻지 못한 반면, 이민자 방어 투쟁은 전국적 반트럼프 저항의 초점이 됐다.
이 영향으로 11월 4일 선거는 정부 심판 성격으로 치러졌고, 트럼프가 자신에 대한 대중적 반대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번 선거 참패로 공화당은 내년 중간선거 전망도 어두워졌다. 이를 의식해 트럼프는 탈법의 소지마저 있는 선거구 조정을 공화당 주지사들에게 촉구하고 있지만 텍사스를 제외하면 그에 잘 따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제 공화당 정치인들은 트럼프를 둘러싼 추문을 정리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전까지 트럼프는 극우 운동 ‘마가(MAGA)’에 기반한 득표력에 기초해 공화당을 대체로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가가 엡스틴 문제로 심각한 내홍에 휩싸여 있다(관련 기사: 알렉스 캘리니코스, ‘엡스틴 음모론, 극우 운동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강타하다’). 이유 하나는 마가와 음모론의 관계 때문이다.
트럼프는 엘리트층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이용해 부상했는데, 그러면서 그는 각종 음모론에 기초해 엘리트층을 적대시하는 마가 운동을 일으키고 이끌었다. 어리고 젊은 여성을 인신매매해 엘리트층에 추악한 성 접대를 제공한 엡스틴에 대한 음모론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트럼프가 엡스틴과 연루됐음이 명백해지면, 트럼프도 지지자들이 적대하는 엘리트층의 일원이라는 엄연한 사실이 도마에 오르게 된다.
엡스틴과 엮이면서 입을 타격은 트럼프가 가장 크겠지만, 이는 다른 마가 인사들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엡스틴 문건은 마가 극우들이 서로 쟁투를 벌일 때 상대방을 흠집 내는 무기가 돼 있다. 그 한 사례는 일론 머스크가 트럼프 정부에서 밀려날 때 트럼프의 이름이 엡스틴 문건에 있다고 폭로한 것이다(나중에 주워담았지만).
이해득실
당시 머스크와 트럼프의 균열은 경제 정책을 둘러싼 트럼프 동맹 내 이해득실 차이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관련 기사: 본지 550호 ‘트럼프와 머스크가 갈라선 진정한 이유’).
지금 균열의 배경에도 경제적 이해관계 문제가 깔려 있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하에 대자본가 일부부터 중간계급까지 다양한 집단들을 결집시켰지만, 그들이 그간 트럼프 정부하에서 누린 득은 상이하다.
트럼프는 부유층의 부와 수익의 보전을 약속하고, 중국의 도전을 억지하겠다고 약속하고, 제조업 부흥으로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재정 정책 “크고 아름다운 법안”은 막대한 기업 감세를 보장했지만 가뜩이나 형편없던 사회 안전망을 더 난도질했다.
트럼프의 관세 폭탄은 동맹국들을 다잡는 효과를 냈지만 중국을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중국은 트럼프의 경제적 공격을 번번이 저지했다.
중국의 도전을 물리친다는 것은 미국 지배계급 핵심부가 모두 공유하는 목표다. 트럼프가 여기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간 트럼프를 용인해 온 안보 기구 핵심부의 제국주의자들을 불안케 할 요인이다.
트럼프는 미국 제조업도 부흥시키지 못했다. 첨단기술 부문을 제외한 미국 제조업 성장률은 0.1퍼센트에 불과하다(세계은행 추산). 제조업 부진 속에 실업률이 높아져, 3사분기 공식 실업률은 팬데믹 와중이던 2021년 10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서민 생활고가 커지고 있다. 11월 4일 뱅크오브아메리카에 따르면, 트럼프의 관세는 물가 인상을 부채질했고 관세 부담의 최대 70퍼센트가 미국 서민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트럼프가 공공부문을 구조조정하고 자기 지지층의 일부도 의존하는 사회 안전망을 난도질한 것 때문에 때문에 생계비 위기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 결과 11월 현재 트럼프 경제 정책에 대한 지지는 취임 이래 최저다(33퍼센트, CNN 조사). 인플레이션·생활정책 지지는 그보다 훨씬 낮은 24퍼센트로 대선 당시 인구 대비 트럼프 득표율보다 낮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는 AI 등 첨단 기술 부문의 호조에 힘입어 경제 지표를 그럭저럭 유지해 왔다. 하지만 첨단 기술 부문에 쏟는 정부 지원을 두고도 트럼프 지지층 안에 균열이 있다.
그 지원의 수혜자인 머스크 등의 빅테크 자본가들, 그 부문에서 대(對)중국 우위를 사수해야 한다고 여기는 다른 대자본가들도 대개 트럼프의 지원 정책을 지지한다.
그러나 ‘마가’의 중요한 기반인 소자본가·중간계급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는 지원에 시큰둥하고, 때로 적대적이다. 미주리주 마가 상원의원 조시 홀리는 마가 집회에서 AI가 “땀 흘려 일하는 근로 계층을 기계로 대체하려 하는 … 세계주의 권력자들의 힘을 키울 재앙”이라고 연설했다.
이런 상황에서 첨단 기술 부문의 거품이 꺼지고 미국 경제 침체가 본격화되면, 트럼프 지지자들 내 상이한 집단들은 더한층 서로 분열할 수 있다.
이런 균열들로 현재 트럼프는 곤경에 처해 있다. 물론 그는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이전에도 그랬듯 온갖 기만과 술책을 동원할 것이고(그 한 사례는 뉴욕시장 당선자 조란 맘다니를 백악관에 불러 ‘서민 생활고 완화를 위해 힘을 합치자’고 환담을 나눈 것이다),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고 여기면 곧장 무자비하게 반격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반트럼프 운동은 트럼프가 취약함을 드러낸 상황을 이용해 선거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아래로부터 트럼프를 더 두들겨야 한다. 이민자 공격에 맞선 저항을 강화하고 생활고에 항의하는 노동계급 사람들의 투쟁을 일으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