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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기후 위기는 왜 약자에게 더 가혹한가
기후 위기와 불평등, 노동계급

기후 위기는 여러 면에서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대표적으로 자연 재난의 빈도와 강도를 높인다. 지난해 유엔 재난위험경감사무국은 ‘2000~2019년 세계 재해 보고서’를 발표했다. 기후 변화 때문에 지난 20년간 자연 재해는 그전 20년보다 70퍼센트가 늘었다고 한다. 매년 6만 명이 목숨을 잃고 있다. 재난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하는 ‘기후 난민’도 늘고 있다.

이런 재난으로 인한 피해는 사회적 조건에 따라 크게 다르다. 기후 위기가 약자에게 더 가혹한 이유다. 가난한 나라의 재해 사망자 수는 선진국의 네 곱절에 이른다. 부실한 인프라 때문에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거나 병원 등 필수 서비스가 마비돼 참사를 빚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불평등이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 내에서도 기후 위기의 피해는 노동계급 등 서민층에게 집중된다. 올해 초 텍사스에는 이상 한파가 찾아와 발전소가 멈추고 가스 공급이 중단돼 빈민들이 얼어죽기도 했다.

유엔은 재난 상황에서 여성과 어린이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14배나 크다고 밝혔다.

여름철 폭염은 이제 일상이 됐다. 폭염은 야외에서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특히 위험하다. 건설 노동자, 야외 작업을 하는 중공업 노동자, 각종 배달·서비스 노동자 등이 고온 환경에 노출된다.

44도까지 기온이 치솟은 건설 현장 노동자들은 기후 위기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그 피해에 맞서 집단적으로 싸울 힘이 있다 ⓒ출처 건설노조

최근 농산물 가격 폭등에서 보듯 기후 위기는 식량 위기를 낳을 수도 있다. 예컨대 2010년에 가뭄과 기상 이변으로 밀, 보리 등 곡물 수확이 급감했다. 세계 곡물 가격이 폭등했고, 중동 사람들의 주식인 빵 값도 폭등했다. 부패한 지배자들의 무능한 대처는 엄청난 불만을 자아냈고 이듬해 중동 곳곳에서 벌어진 반란의 도화선이 됐다.

앞서 본 텍사스 사례처럼 기후 위기로 전기나 수도, 가스 등 필수 인프라도 위태로워지고 있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며칠 동안 전기와 수도가 끊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라.

그러나 주요 선진국 정부들은 이런 재난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로켓과 핵잠수함 개발에 각각 수조 원을 쏟아 부으면서 정작 재난 피해를 줄이기 위한 투자는 말뿐이다.

기후 위기 대처와 불평등

20년 전과 달리 기업주와 정부들도 이제 기후 위기를 단순히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됐다. 기후 재난이 이윤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안정이 심화하면서 안정적 이윤 획득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위기감도 퍼지고 있다.

그러나 기업주와 정부들이 기후 위기를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 희소식은 아니다. 각국 정부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에 전혀 못 미치는 생색내기 수준의 조처를 내놓으면서 그 비용과 대가는 평범한 노동계급 사람들에게 떠넘기려 한다. 이것이 기후 위기가 약자에게 더 가혹한 또 다른 이유다.

최근 일부 화석연료 기업주들과 이들이 연관을 맺고 있는 정부들이 IPCC 보고서 내용을 톤다운 시키려고 로비를 벌여 온 사실이 폭로됐다. 물론 다른 일부는 에너지 전환 등에 열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들은 지구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그런 조처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들 사이의 이견이 무엇이든 그들의 대책은 기후 위기 해결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반면, 평범한 노동계급 사람들에게 고통을 전가하고, 제국주의와 시장 경쟁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각국 정부와 기업주들은 기존 사회 인프라를 대체하거나 개선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떠넘기려 한다. 전기요금과 유류세 등 각종 공공요금 인상이 대표적이다. 에너지 전환에 가장 큰 목소리를 내 온 독일의 경우에도 지난 20여 년 동안 가정용 전기요금은 크게 오른 반면 산업용 전기요금은 오히려 인하됐다(그림1).

문재인 정부도 장차 전기요금 인상을 위해 발전 연료비와 전기요금을 연동시키는 제도를 도입했다. 지금대로라면 대선 이후 전기요금이 크게 오를 수 있다. 그러면 각종 생필품 비용도 오를 수 있고, 금리까지 인상되면 평범한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을 받을 것이다. 공공요금을 포함해 생계비 부담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송파 세 모녀 사건 같은 일이 더 많이 벌어질 수 있다.

현재 세계질서를 유지한 채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것이 얼마나 가망 없는 일인지 보여 주는 사례들도 있다. 주요 선진국 정부들은 자국 내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인다면서 화석연료 산업과 심지어 쓰레기를 ‘수출’한다. 온실가스를 흡수한다며 사람들이 멀쩡히 살고 있는 지역에 대규모 나무 심기 사업을 벌여 그들을 내쫓고 난민으로 만든다. 탄소세 등을 무역장벽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정부와 기업주들의 기후 위기 ‘대책’이 노동자 일자리를 위협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정부와 기업주들은 이런 전환 과정을 노동 조건을 악화시키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들과 일부 자동차 기업 노동자들이 바로 이런 처지에 있다.

문재인 정부의 노후 석탄발전소 ‘폐쇄’ 계획은 정확히 말하면 새 석탄화력발전소와 LNG 발전소로 ‘대체’하는 계획이다. 따라서 기후 위기의 대안이 못 된다. 그런데 정작 석탄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8000여 명은 기후 대책 미명 아래 고용 불안에 놓일 처지다.

그러나 기후 위기를 낳은 책임은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주·부자에게 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1965년 이후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3분의 1은 겨우 20개 기업이 배출한 것이다. 한국만 놓고 봐도 마찬가지다. 최근 녹색연합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국내 온실가스 배출량의 64퍼센트를 상위 11개 그룹이 배출한 것으로 나타났다(그림 2).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환경을 해치는 산업의 노동자들이 그 일자리에서 일했다는 것만으로 공범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지 결정할 권한이 없다. 특정 산업에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럴 권한과 이해관계를 가진 기업주들이 노동자를 착취하며 환경도 파괴해 왔다.

자본주의와 노동계급

사회적 약자는 기후 위기로 인한 재난에 더 취약할 뿐 아니라 기후 위기 대응의 비용과 대가를 떠안을 처지다. 그래서 기후 위기는 사회적 약자, 즉 취약계층, 서민, 노동자들에게 더 가혹하다.

그러나 이 중 노동계급은 기후 변화의 주된 피해자일 뿐 아니라 그 피해에 맞서 집단적으로 싸울 수 있는 힘이 있는 세력이라는 점에서 다른 집단과 차이가 있다.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 능력은 근본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하는 구실에서 비롯한다. 자본주의는 기업주들이 노동자들을 성공적으로 착취할 때에만 제대로 돌아간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일하기를 거부하면 체제의 작동을 멈출 수 있다.

이런 힘이 기후 위기를 저지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 이미 일부 노동자들은 기후 변화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자 싸우고 있다. 폭염 시 작업 중단, 일자리와 조건 지키기, 유류세 인상 항의 등이 그런 것이다.

이전 환경NGO 지도자들 중 상당수는 평범한 노동자들을 문제의 일부로 여겼다. 이런 관점은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이 반목하게 만드는 효과를 냈다. 오늘날 기후 운동 내 급진적인 활동가들은 그보다는 진일보한 관점에서 노동계급에 주목한다. 긍정적인 변화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그저 기후 위기의 수많은 피해자의 하나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알아야만 어떻게 기후 위기를 저지할 수 있을지 대안과 전략을 제시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혁명적 좌파는 노동계급을 기후 운동에 동참시키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힘을 사용해 기후 위기 대처에 미온적인 정부와 기업주들을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물론 노동자들이 사회 변혁의 잠재력을, 심지어 파업 능력조차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후 위기의 시대에 벌어지는 노동자 투쟁들은 기후 위기에 맞선 운동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2018~2020년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노란조끼 운동은 그 가능성을 얼핏 보여 줬다.

프랑스 노란조끼 운동의 교훈

노란조끼 운동은 2018년 프랑스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에 맞서 시작됐다. 마크롱 정부는 기후 변화와 대기 오염에 대처한다며 유류세를 대폭 인상했다. 그러자 30만 명이 도로 봉쇄 시위를 벌이며 폭발적으로 저항이 분출했다.

노란조끼 운동은 마크롱 정부의 노동계급 공격에 대한 더 광범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마크롱은 유류세는 인상하면서 부유세는 대폭 인하했다. 이 운동은 빈곤과 불평등, 저임금 문제를 수면 위로 올려 놓았고 마크롱이 상징하는 부자와 주류 정치인들의 오만함에 대한 분노의 초점 구실을 했다.

마크롱 정부는 노란조끼 운동을 기후 위기 대응에 반대하는 철부지들과 우파의 시위로 매도했다. 하지만 노란조끼 활동가들은 광범한 연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아마존 등 거대 기업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노란조끼 시위대는 프랑스 전역에서 열린 기후 행진에도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행진이 끝난 뒤 마크롱 퇴진을 함께 외쳤고 경찰 폭력에도 같이 맞섰다. 노란조끼 운동이 기후 위기 대응을 가로막는다는 마크롱의 비난은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노란조끼 운동의 유명한 구호 ‘이 달의 끝, 세계의 끝, 같은 원인, 같은 투쟁’은 노란조끼 투쟁과 기후 운동이 같은 적에 맞서고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 마크롱이 쩔쩔매는 꼴을 보며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감을 얻고 투쟁에 나섰다.

마크롱은 3주 만에 양보해야 했다. 하지만 운동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마크롱이 부유세 감세 등 대중의 불만을 산 대표적인 정책들을 철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란조끼 운동에 고무된 노동자들은 투쟁에 나서도록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압박했고 노동자 투쟁은 2020년 연금 개악 저지 투쟁까지 이어졌다. 마크롱은 유류세 인상을 철회한 데 이어, 연금 개악도 팬데믹 이후로 연기해야 했다.

노란조끼 운동은 기후 위기와 각국 정부와 기업주들의 미온적 대처로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또 이런 투쟁은 노동조합의 공식 동원을 기다리지 않고 거리에서 시작될 수 있고, 기후 운동과 손을 잡으며 상승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음도 보여 줬다.

수많은 기층 노동자의 목소리를 모아내고 단결시킨다면 보수적인 노동조합 지도자들도 움직이게 만들 수 있고, 노동조합의 공식 결정을 활용해 더 많은 노동자가 행동에 나서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이 발전할 수 있고, 다른 부문의 투쟁을 고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릴 수 있다.

2019년 5월 프랑스에서 열린 기후행동에 참가한 노란조끼 시위대 ⓒ출처 Photothèque Rouge

결론

지금 각국 정상의 조처대로 한다면 기후 위기를 멈추는 데 실패하는 것은 물론, 자연 재난을 통해서든 각종 고통 전가 조처들을 통해서든 불평등이 더욱 심화할 것이다.

이처럼 기후 위기와 불평등이 동시에 악화하는 과정의 밑바탕에는 소수의 기업주가 생산을 통제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원리가 놓여 있다. 전 세계 인류의 관점에서 보면 당장 취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합리적 조처들이 개별 기업과 개별 국가에는 커다란 손해를 입히고 권력층이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을 허물어뜨릴 것이다. 이들은 그런 조처들을 막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따라서 기후 위기를 멈추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노동계급이다.

기후 운동에 노동계급의 참여가 중요하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기자회견이나 대화 테이블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기층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이다. 좌파들은 노동자들의 기후 운동 참여를 촉진하고, 기후 위기와 그 대처 때문에 벌어지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단결시키는 구실을 해야 한다.

한편, 기후 위기를 멈추려면 이 문제를 다른 모든 쟁점보다 우선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강력한 기후 운동을 건설하는 데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문제의식을 고취하는 효과를 낼 수 있지만, 해결 방안을 강제할 힘을 결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고인이 된 혁명적 사회주의자 크리스 하먼이 이런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기후 위기를 멈추려면 자본주의 체제를 완전히 다른 사회로 바꿔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힘을 구축하는 유일한 방법은 체제가 가하는 다양한 압력에 맞서 싸우는 투쟁들 속에서 그 투쟁에 나선 사람들을 체제 자체에 맞서는 세력으로 결속시키는 것이다.

발제자의 정리

팬데믹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각국 정부가 팬데믹의 충격에 대처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쓰는 것을 봤다. 그래서 미국의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등이 제안한 그린뉴딜이라는 기후 운동의 요구가 재조명되고 인기를 얻기도 했다. 문제는 각국 정부가 한차례 그렇게 돈을 지출하고는 더는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린뉴딜이라는 대안을 실현하려면 각국 정부의 선의에 기댈 것이 아니라 지금 성장하고 있는 아래로부터의 기후 운동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해져서 지배자들이 그런 조처를 취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그린뉴딜이 자본주의 체제 내의 대안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런 요구를 배제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기후 운동은 그런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걸림돌과 장애물을 넘는 과정에서 성장·발전할 수 있다.

멸종반란 운동 내의 논쟁을 소개해 주신 분들도 있었는데 멸종반란 운동에 관해 균형있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사실 멸종반란 운동은 큰 성과를 거뒀다. 영국 정부를 비롯해 많은 주요 선진국 정부가 ‘기후 비상사태’를 선언하게 만들었고, 파리 협약에서 합의한 수준의 약속은 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그 약속을 지키도록 하고 실제로 기후 위기를 멈출 수 있는 조처들을 취하도록 강제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지만 말이다.

이런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데, 멸종반란 운동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고무했다는 점이다.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운동이 정부를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를 수 있게 됐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고 말이다. 기후 운동은 2009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15차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총회 이후 큰 침체기를 겪었는데 멸종반란 운동은 기후 운동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이는 시청자 토론에서 한 분이 한 물음과도 연관이 있다. ‘미국과 중국이 온실가스 배출량이 너무 많아서 한국에서 뭘 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 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했는데, 분명히 기후 위기가 세계적인 문제라는 점 때문에 한 나라에서의 조처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체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 사실로부터 서로 다른 두 전략이 제시될 수 있다. 정부 내에서 혹은 의회를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금방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온실가스 배출을 중단하더라도 미국과 중국이 계속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완전히 쓸모없는 일이 돼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정부들이 나름 ‘야심찬’ 계획을 내놔도 다른 나라 정부들이 이를 좀체 뒤따르려 하지 않는 것에서 보듯 이들 사이에는 온실가스 감축이 아니라 화석연료 연소에서 얻는 이윤 경쟁이 더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한국에서 그런 운동을 건설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우리가 멸종반란 운동을 보며 고무받았듯이 전 세계의 다른 수많은 사람들도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 나라에서 체제의 수호자들에 맞서 싸움으로써 다른 나라의 노동계급도 자신감을 얻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국제주의라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의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 최근 확정된 계획은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40퍼센트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파리협약 수준에도 못 미치고 실제로는 눈속임으로 부풀린 수치다.

문재인 정부는 이 계획을 발표한 날 2023년 COP28을 유치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아랍에미리트를 지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아랍에미리트는 그동안 한국이 핵발전소를 수출해 온 나라인데, 최근 바이든과 문재인이 만나서 핵수출에 협력하기로 한 것에서 보듯 경제적 이해관계를 염두에 둔 조처로 보인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의 상황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 당시 한 사회주의자가 그 참사를 보며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만약 미국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그 전에 한동안 침체기를 겪지 않았다면, 그래서 운동의 전통이 남아 있고 사람들이 운동을 조직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 수많은 피해자들이 미국 국가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지는 않아도 됐을 거라고 말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시 부시 정부에 맞서 함께 싸웠다면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도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나는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투쟁적인 대중운동을 건설하려는 전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피억압자들의 운동과 노동자 투쟁 속에서 그런 투쟁들을 결속시키는 데서 주도적 구실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기후 위기를 멈추는 데 기여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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