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은 통째로 폐지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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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된 지 올해로 72년이 된 국가보안법은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적 권리를 체계적으로 가로막는 대표적 악법이다.
최근 〈경향신문〉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올해 “10대 걸림돌 판결”의 하나로, 진보당 행사에서 민중가요인 ‘혁명동지가’를 부른 행위가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에 해당한다며 안소희 전 파주시의원과 홍성규 전 진보당 대변인 등에게 징역형을 확정한 대법원의 판결을 꼽았다.
이보다 앞서 1월 대법원은 전교조 교사 4명에게 이적표현물 소지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했고, 6월과 8월에는 각각 청학연대와 청학본부 간부들에게 보안법 위반 유죄를 확정했다. 9월 범민련 남측본부는 문재인 정부의 경찰이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범민련 활동을 문제 삼으면서 보안법 위반 사건 조사를 이유로 사무처장에게 출석을 요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석기 전 진보당 의원은 보안법 위반과 내란선동 혐의로 올해로 벌써 8년째 감옥에 갇혀 있다.
이런 일들은 국가보안법이 과거의 유물이 아님을 보여 준다.
보안법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만든 ‘치안유지법’과 비스마르크 시절 독일의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이승만 정권은 형법과 민법보다 먼저 국가보안법을 서둘러 제정했다. 4·3 제주항쟁, 10월 여순항쟁 등 잇따른 민중봉기에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보안법을 이용해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해산하고 관련 인사들을 탄압했다.
군부독재 정권이든 민간 정부든 역대 정부들은 체제 수호를 위해 노동운동의 가장 선진적인 부위와 체제 내부의 반대자들을 제거하는 무기로 국가보안법을 활용했다. 국민의힘을 비롯한 우파들은 여전히 보안법 수호를 외친다. 집권시 마찬가지로 보안법 구속자를 양산한 민주당이 우파와 차이가 있다면, 말로는 보안법이 좋은 법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안법에 따르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일체의 행위가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구체적 폭력 행위가 전혀 없어도 “찬양·고무,” “선전·선동”을 이유로 처벌할 수 있다(7조).
그동안 수많은 노동자, 언론인, 작가, 학생들이 한국의 부정적 측면만 강조했다는 이유, 사회의 모순과 비리를 부각했다는 이유, 혹은 자본주의 한계성을 강조했다는 이유 등으로 구속됐다. 그래서 서적, 그림, 사진 등 온갖 표현물이 보안법 처벌 대상이 됐다. 체포된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거나 일부는 사형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왔다.
보안법은 구속되고 투옥되는 피해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반체제적 정치 주장을 펴고 이에 기초한 정당을 건설하는 일을 가로막음으로써 노동계급 전체의 정치적 자유를 억제한다. 이 나라 지배자들 일반이 보안법을 이용해 좌파를 탄압하고, 그럼으로써 노동자 운동이 반체제적 정치로 조직되는 것을 막으려 한다.
여러 국제 인권 기구들이 한국 정부에게 이 법을 폐지하라고 권고했지만 문재인 정부를 포함해 모든 정부가 이를 무시한 것은 지배자들의 효과적 통제(체제 수호) 무기를 결코 스스로 내려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안법에 따른 이해관계가 특정 정당이나 공안기관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다.
손질이 아니라 폐지
민변은 올해 입법과제 중 하나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꼽았다. 민변은 “국가보안법의 일부 조문을 개정하거나 폐지한다 하더라도 … 반통일적, 반인권적, 비민주적 위헌적 체제로서의 역할이 바뀌지 않는다”면서 “일부 개정되어서는 안 되고 전면 폐지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보안법 2조(반국가단체)는 가장 핵심적인 규정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조항들이 반국가단체를 전제로 범죄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판례 등은 반국가단체(북한 국가가 대표적이다)와 이적단체를 그 목적성에 따라 구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모호하다.
검찰은 1980년대 전국민주학생연맹,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을 애초에 반국가단체로 기소했지만 항소심과 대법원은 이적단체로 봤다. 1990년대에 벌어진 영남위원회 사건에서도 검찰은 애초 반국가단체로 기소했다가, 이적단체로 공소장을 변경했다. 이런 일들은 보안법이 엄밀한 법적 규정보다 노동계급 운동의 결사의 자유를 억누르고 가로막는 것을 더 중시함을 보여 준다.
7조가 규정한 ‘국가변란 선전·선동’은 어떤가? 이 조항은 노태우 정권이 개악한 것인데 “기존의 북한 주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사회주의혁명이론”에 기초한 세력들을 겨냥하고 있다(《국가보안법 이해》, 황교안). 보안법이 단지 친북 세력만을 겨냥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국가보안법 제7조는 헌법재판소의 위헌법률심판에 올라가 있다. 최근 민주당 의원 이규민 등이 국가보안법 개정(7조 폐지) 법안을 발의했다. 진보진영 내 일각에서는 국회에서 압도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이 보안법을 개정하리라는 기대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역대 민주당 정부들이 모두 개정 추진 시늉만 하면서 생색을 내고, 진보진영의 발목을 잡았을 뿐 보안법 폐지 염원을 번번이 배신해 왔음을 잊어선 안 된다. 게다가 개정안 제안자 명단을 보면, 중진이라 할 수 있는 의원이 없어 민주당 차원에서 힘을 싣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자신이 국가보안법의 피해자였던 전 대통령 김대중도 보안법에 손대지 않았다. 1989년 김대중의 평민당이 야당일 때 대체 법안으로 내놓았던 민주질서수호법에는 보안법 제7조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민주질서위해죄가 포함돼 있었다. 당선 이후에도 북한이나 경제·정치 갈등 등을 이유로 보안법 폐지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폐지만 안 한 게 아니라 김대중 정부는 보안법을 적극 활용했다. 집권 첫해에만 400명 넘게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당시는 1998년 극심한 경제 위기 속에 해고와 각종 신자유주의 조처에 저항하던 운동이 강력히 벌어지던 때였다. 결국 김대중 정부 집권 5년 동안에만 1100여 명이 기소됐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반국가단체의 수장 격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다.
보안법을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자던 노무현 정부에서 여당은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도 보안법을 단 한 글자도 건드리지 않았다. 당시 자민통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보안법 폐지 운동에 큰 열의를 보였는데, 노무현 정부는 보안법 폐지 염원을 이용해 당시 비정규직 악법에 반대하는 운동과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 등을 분열시키고 기만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문재인 정부도 국가보안법 활용을 포기하지 않았다. 전 정권에서 기소된 보안법 사건들이 문재인 정권 들어서도 기소가 유지되고 있고, 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나오고 있다. 이는 경찰·검찰과 법원이 본질적으로 체제 수호적 기관이고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탄압하는 데에서 한통속임을 보여 준다. 또한 문재인 정부의 허울좋은 “권력기관 개혁”이 노동계급의 실질적 정치 자유를 위한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허상임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지난 10여 년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자리잡아 오면서 보안법 적용도 예전만큼 쉽지 않아졌다. 여기에는 (민주당 정부들의 꾀죄죄한 집권 성적보다는) 노동자 운동이 끊임없이 저항하며 (노조든 정당이든) 자신의 조직들을 만들고 성장해 온 것이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됐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조차도 그 알맹이는 노동계급의 사상과 표현, (정당과 노조 모두에서) 결사의 자유이고, 그 동력은 노동계급의 자력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늘리려면, 노동계급의 대중조직과 운동이 성장해야 한다. 자본가 계급의 그 어떤 부분에도 의존하지 말고 정치와 투쟁 모두에서 더 강력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