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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녹색 분류체계(그린 택소노미) 논란:
천연가스도, 핵발전도 친환경 에너지 아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그린 택소노미(녹색 분류체계)에 천연가스와 핵발전을 포함시키기로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유럽의회와 유럽연합 이사회가 이 결정에 동의할 경우 이르면 내년 초부터 적용된다.

그린 택소노미는 무엇이 친환경 기술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법으로 정하는 제도다. 이 제도에 따라 친환경 기술을 적용한 기업주들에게는 세금이나 금리 혜택을 주고, 그렇지 않은 기업주들에게는 불이익을 줄 예정이다. 유럽연합은 특히 이 제도가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고 홍보해 왔다.

독일 유로 타워 앞에서 유럽연합 녹색 분류체계에 항의하는 기후 운동 활동가들 ⓒ출처 Koala Kollektiv

그러나 천연가스는 그 자체가 화석연료이므로 그린 택소노미에 포함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핵발전도 다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이번 결정은 유럽연합 지배자들도 기후 위기 대응보다 기업 이윤을 우선한다는 점에서 미국이나 중국 지배자들과 근본에서는 다를 바 없음을 보여 준다.

독일과 프랑스의 이해관계

유럽연합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독일과 프랑스 지배자들은 1차 에너지 공급을 각각 천연가스와 핵발전에 크게 의존해 왔다.

독일 지배자들은 미국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중동 석유보다 안정적인 에너지원을 확보하려고 20년 넘게 애써 왔다. 이 과정에서 재생에너지도 늘렸지만 러시아산 천연가스 개발과 수입에 더 많이 투자해 왔다.

미국은 독일이 러시아와 경제적으로 밀접해지면 유럽에서 자국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우려해 강력히 반대했지만, 메르켈 정부는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새로운 가스관(노르트스트림2) 건설을 강행했다. 그만큼 독일 지배자들은 천연가스 확보에 사활적이다.

프랑스는 핵발전 의존도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다. 프랑스 전력의 70퍼센트가량이 핵발전에서 나온다.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핵무기 기술을 확보한 다섯 국가(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은 지난 십여 년 동안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화석연료 사용과 핵발전을 줄여야 한다며, 가정용 전기요금(독일)과 유류세(프랑스) 인상 정책을 밀어붙이는 등 평범한 사람들에게 부담을 전가해 왔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과 공급망 불안, 유가 인상 등으로 기업주들의 에너지 비용 부담이 커지자 기존 입장을 간단히 뒤집고 두 에너지원이 녹색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최근 에너지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며 오히려 핵발전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공언했다.

유럽 기업의 경쟁력 확보

이번 결정은 유럽연합의 기후 위기 대응 정책, 이른바 ‘그린딜’이 기후 위기를 멈추기 위해서라기보다 중국 같은 경쟁자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유럽 기업들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도 보여 준다.

그린딜 정책에는 그린 택소노미뿐 아니라 탄소국경세도 포함돼 있는데, 그린 택소노미가 탄소국경세 부과의 기준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유럽연합은 이번에 천연가스와 핵발전을 녹색 기술로 인정하겠다면서도, 독일과 프랑스 정도가 아니고서는 충족할 수 없는 까다로운 기술적 기준을 꼬리표로 달아 놨다.

즉, 기술 수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개발도상국이나 빈국의 기업들에 일종의 무역 장벽을 세우는 것이다. 동시에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빈국들에 기술 개발 비용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내팽개치고 오히려 그 비용을 전가하는 셈이다.

유럽 내 기업들의 이윤도 지키고 탄소국경세로 얻고자 한 효과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것이다.

반면, 그린딜이 제시하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애당초 기후 위기를 멈추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번 조처는 사실상 그 목표조차 달성할 뜻이 없음을 보여 준 셈이다.

유럽연합이 기후 위기 대응에 목소리를 높여 온 것은 근본에서 미국이나 중국이 기후 위기 대응을 외면해 온 것과 똑같은 이유, 즉 자국 기업의 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유럽연합도 자본주의 발전을 주도해 온 주요 블록 중 하나로서 이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화석연료와 핵발전을 줄일 생각은 없다. 유럽연합 지배자들에 대해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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