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좌파에서 극우로 변절한 기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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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후보 김문수가 1차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을 악법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다음날 경기도 시흥시 SPC그룹 삼립 제빵 공장에서 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죽는 참사가 발생했다.
김문수는 예방이 중요하지 사용자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SPC에서는 평택, 성남 등 제빵공장마다 비슷한 사망 사고가 발생했었다. SPC그룹 회장이 직접 나서서 대국민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투자를 약속했지만, 공문구였음이 또다시 드러났다.
당시 경영진이 중대재해처벌법 유죄를 받았지만, 노동자 죽음에 직접적 책임은 없다며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기업주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산재 예방 효과를 떨어트린 것이다.
그런데 김문수는 2012년 경기도지사 시절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흉악 범죄가 발생한다며 사형 집행을 주장했다. “범인 인권보다 피해자의 인권이 더 중요하다”면서.
이처럼 김문수는 일반 형사 범죄는 엄벌로 예방하자면서 엄한 법질서를 주장하지만, 기업주의 산재 살인(또 상해) 범죄는 온정주의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문수는 극우 정치인이자 국민의힘 후보답게 철저하게 기업주의 편에 서 있다. 그는 무노조 저임금 공장을 찬양하고, “불법 파업에 손배 폭탄이 특효약”이라며 “[손배] 소송을 오래 끌수록 가정이 파탄 나게 된다”며 노조 파괴를 주장했던 자다.
이런 극악무도한 자가 40년도 더 된 노동운동 경력을 난데없이 꺼내어 경력 팔이를 하고 있다.
김문수는 1970년 서울대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다가 1976년 한일도루코에 입사해 노조위원장을 하다 1980년 해고됐다. 1986년 서울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으로 구속돼 1988년에 석방됐다.
극우로 전향하다
김문수는 노동운동에 투신한 기간의 두 배 넘게 전향 우익 정치인으로서 살아 왔다. 그동안 일관되게 보여 준 것은 특유의 단순 논리를 동원한 우익 포퓰리즘과 권력욕이었다.
김문수는 전향 당시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했지만, 그저 변명이었을 뿐이고, 이후 내내 기업주와 우익의 경비견 노릇만 해 왔다.
이명박 정부 때는 처음에 그에게 독설을 퍼붓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렇게 낯 뜨겁게 아부했다. “[이명박은] 이승만·박정희·세종대왕·정조대왕 다 합쳐도 반만년 역사에서 최고의 역량을 가졌다.”
2012년 박근혜와 대선 당내 경선을 치를 때 최태민 의혹을 꺼내 박근혜를 공격하더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자 친박에 줄을 섰다.
그러면서 더욱 극우화했는데, 선거에선 별로 득을 얻지 못했다. 2016년 총선에선 새누리당 텃밭인 대구에서 민주당 후보에 참패하고,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패했다.
당에서 용도 폐기되자 극우 선동가인 전광훈에게 안겨 자유통일당 대표가 됐다. “사탄이 대한민국을 다 점령했다 외치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걸 외치는 이가 전광훈 목사님”이라며 아첨을 떤 결과였다.
2019년에는 선거법 개혁을 막겠다며 극우 시위대의 국회의사당 난입을 선동해 충돌을 일으켰다. 이는 서부지법 폭동의 선례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김문수는 벌금 300만 원 선고받는 것에 그쳤다. 서부지법 폭동자들이 처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자유통일당 후보는 선거운동을 하지도 않고 김문수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했다.
문재인을 “총살감,” “김일성주의자”라며 극언을 해 댄 대가로 윤석열 정권에서 노동부장관으로 중용됐다.
계엄 이후에도 김문수는 “계엄은 대통령 고유 권한”으로 쿠데타가 아니라며 윤석열을 옹호했다. 그런 자가 당내 친윤계 지도부가 자기 대선 후보직을 뺏으려 하니 “쿠데타”라며 격하게 반발했다.
처참하게 몰락해야 할 배신자 극우 정치인이 이제는 대선에서 한 표라도 더 받으려고 고문을 견뎌 낸 노동운동 투사 출신인 듯 “꼿꼿 문수” 따위의 흰소리를 해대고 있다.
오만과 군림
출세를 위해 권력자들에게 보내는 사탕발림과 아부의 뒷면은 하급자나 보통 사람들에 대한 군림이다.
경기도지사 시절, 긴급 구조를 위한 119에 전화해 용건을 묻는 요원에게 도지사도 못 알아본다고 질책하며 관등성명을 요구한 일명 “나 김문순대”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도지사 시절, 의전용 행사 참석을 위해 소방헬기를 수십 차례 사용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례다. 심지어 도내 대형 산불이 난 상황에서도 소방헬기를 이용한 게 4차례나 된다.
코로나 방역 과정에서도 “나 김문순대” 행태는 반복됐다. 두 번이나 방역 비협조로 기소돼 한 건은 유죄 확정, 한 건은 2심 재판 중이다(1심 유죄).
더 거슬러 가면, 2000년 국회의원 선거 때는 한나라당의 부정선거를 감시하겠다는 활동가를 현장에서 때려 벌금형 유죄를 선고받은 적도 있다.
1980년대에 그는 현장 노동자 출신이며 자기 대신 생계 활동을 하는 아내에게 대학생들처럼 일본어를 배워 이론 학습을 하라고 지속적으로 압박해 주변 동료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노동운동 시절부터 노동자들의 삶과 경험을 무시하고 낮추어 본 것이다.
엘리트주의와 단순 논리
김문수가 몸담았던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의 위원장 출신인 민종덕 씨는 5월 17일 페이스북에 분노를 토로했다. “극우 내란 옹호자 김문수는 더이상 노동운동 경력을 팔고, 전태일을 들먹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민종덕 씨는 김문수가 청계피복노조,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이력을 강조하는 것도 거짓이라고 말했다. 청계피복노조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고,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선 잠시 사무국장 “직책을 가졌을 뿐 실제로 활동한 적은 없다.”
김문수는 노동계급 대중 운동이 본격화되기 전 유신 치하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그의 투쟁 동참 경력은 혹독한 탄압기에 국한돼 있다. 그마저 전두환 시절에는 조직 상층의 폼나는 명예직에 국한됐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기간에 감옥에 있었다.
1988년 풀려나서는 곧바로 장기표를 따라 민중당을 창당해 국회 입성을 노렸다.(그 장기표도 훗날 우경화해 전광훈, 김문수와 함께 태극기 집회 무대를 누볐다.)
그러나 소련이 몰락하고, 민중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될 가망도 없어 보이자 1994년 전두환·노태우의 군부 정권을 계승한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노동자 대중의 자체 활동이 미흡한 시대에는 운동 안에서 대리주의가 싹트기 쉽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 김문수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를 낮추어 보는 김문수의 오만한 엘리트주의와 조야한 사고는 옛 동료 일부가 하나 둘씩 국회의원이 되는 상황에서 조급한 출세욕으로 발전했다.
권력욕에 도덕마저 마비되면 새로운 주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동지들을 배신하고, 자신을 배출한 운동을 저주하는 데 앞장서며, 기업주들과 반동적 세력의 하수인이 돼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하수인들을 부리는 처지가 됐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