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사회주의자 초청 토론:
쿠데타와 대중 항쟁 ─ 기로에 선 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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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3월 11일에 열린 노동자연대 주최 온라인 토론회 ‘쿠데타와 대중 항쟁, 기로에 선 미얀마(영상 보기)’에서 자일스 자이 웅파콘이 한 발표와 정리 발언을 기사로 옮긴 것이다. 웅파콘은 미얀마와 이웃한 타이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2006년 타이 쿠데타를 옹호한 국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국왕모독죄로 기소된 후 유럽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웅파콘은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들과 깊은 연계를 맺고 있기도 하다.
이 토론회를 통역한 천경록은 전문 통역가이자 노동자연대 회원이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부가 덧붙인 것이다.
2월 1일 미얀마(버마) 군부 쿠데타에 맞선 대중 항쟁은 현재 혹독한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60명 넘는 사람들이 군부에 사살됐는데, 셋 중 하나는 10대 청소년들입니다.
미얀마 항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져 온 청년 항쟁 물결의 일부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미얀마에서는 청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군부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 항쟁은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첫째, 군부에 맞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싸울 것인가? 둘째, 시위대가 탄압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방법은 무엇인가?
미얀마 항쟁은 이른바 ‘색깔 혁명’이 결코 아닙니다. 그간 서구 국가들은 미얀마 군부와 미얀마의 가짜 민주주의를 기꺼이 용인했습니다. 그리고 미얀마 내 여러 민족의 수많은 사람들이 단결해 군부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항쟁이 아래로부터의 대중 항쟁임을 보여 줍니다. 이 항쟁을 ‘색깔 혁명’으로 치부하는 것은 미얀마의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투쟁과 리더십
시위대가 비폭력·불복종 전술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까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피억압 대중의 폭력과 억압자들의 폭력이 같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미얀마에서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총에 맞아 죽고 있습니다. 이는 억압자들인 군부의 폭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중의 정당방위를 지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중 행동을 대체하는 수단으로서 무장 투쟁 전술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미얀마에서 ‘8888’ 항쟁[군부 독재에 맞서 1988년 8월 8일에 벌어진 대규모 항쟁] 이후 학생들이, 또 여러 소수 민족 단체들이 정부에 맞서 그런 전술을 채택한 바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패배했습니다.
그러면 미얀마인들이 군부에 맞서서 효과적으로 투쟁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쿠데타 직후, 미얀마 곳곳의 병원 100여 곳에서 간호사, 의사, 병원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습니다. 철도 노동자들, 은행 노동자들, 공무원들, 구리 광산 광원들도 파업과 ‘시민불복종운동’(CDM)에 합류했습니다. 운동 참가자들은 이웃한 타이에서 벌어진 민주주의 투쟁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를 차용했습니다.
2월 22일, 미얀마 전역에서 노동자 2000만 명이 하루 총파업을 벌였습니다. 이는 이 항쟁이 ‘색깔 혁명’의 일종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최근에는 무기한 총파업 호소도 있었습니다(그전까지 총파업들은 무기한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호소에 대한 호응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매우 긍정적인 사태 전개입니다.
파업은 지배계급에 맞서 싸우는 데에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경제 체제의 심장부를 타격하기 때문입니다. 또, 병사들이 거리 시위대를 공격하는 것처럼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하기란 쉽지 않기도 합니다.
이집트·남아프리카공화국·수단·벨라루스·홍콩 등의 사례를 봐도, 노동자 파업과 시위가 결합했을 때 훨씬 더 강력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노동자 파업이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를 타도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종식시킨 것도 계속된 노동자 파업이었습니다.
수단·벨라루스·홍콩에서도 파업이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는 나라마다 달랐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파업이 효과적인 무기이긴 해도 수도꼭지를 틀었다 잠갔다 하듯 아무 때나 마음대로 꺼내 쓸 수는 없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도력(리더십)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문제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개혁이냐 혁명이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운동에 뿌리 내린 혁명적 정당을 건설할 필요성도 제기됩니다.
미얀마의 개혁주의자들은 그저 쿠데타 이전의 체제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체제는 가짜 민주주의였습니다. 아웅산 수치가 국가 수반이지만 군부에 여전히 권력이 있는 체제 말입니다.
하지만 혁명가들은 훨씬 더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총파업으로 군사 정권을 분쇄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웅산 수치
아웅산 수치는 현재 미얀마 민주주의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입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수치의 석방을 요구하고, 또 모든 정치수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수치가 수많은 미얀마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치가 결코 미얀마에 해방을 가져다줄 지도자가 아니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첫째, 수치가 오랫동안 군부와 타협해 왔고, 결정적인 순간에 운동을 동원 해제시키는 구실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8888’ 대중 항쟁 때 학생·승려·노동자들이 군부에 맞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8월 23일에는 노동자 총파업이 벌어졌습니다.
그 3일 뒤에 수치는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열린 50만 명 규모 시위에서 연설했습니다. 수치는 50만 명에게 군부를 증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군부가 수십~수백 명을 사살한 직후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은 운동이 승리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 수치는 운동을 동원 해제시킴으로써 운동을 패배로 이끌고, 향후 20년 동안 군부 독재가 이어질 길을 열어 준 것입니다. 이날 수치의 연설은 수치의 자서전 《공포로부터의 자유》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치는 지난 5년 넘게 가짜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군부와 협력해 왔습니다. 2008년 개정 헌법에 따르면, 군부는 의회 의석의 25퍼센트를 선거 없이 지명할 수 있고, 내각 핵심 부처를 장악하고 있고, 정부가 내린 어떤 결정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심지어 비상사태라고 판단하면 쿠데타를 일으킬 권리도 있습니다.
이런 가짜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수치가 국가 수반으로 있는 동안 미얀마에는 정치수가 200명이 있었고, 군부가 제정한 억압적 법률들이 있었으며, 수치 자신도 여당 민족민주동맹(NLD) 안에서 권위주의적 성향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수치가 민주주의 투쟁의 지도자여서는 안 되는 둘째 이유는, 수치가 인종차별주의자이고 무슬림을 혐오하기 때문입니다.
군부가 로힝야 무슬림들을 학살했을 때 수치의 입장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관련 기사 본지 224호 ‘미얀마의 로힝야족 “인종청소”: 군부의 인종차별, 아웅산 수치의 외면, 미·중 제국주의의 위선이 낳은 비극’] 수치는 자기 정당 민족민주동맹에서 무슬림이 요직을 맡지 못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수치는 소수 민족들을 비하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수치는, 카렌족들은 보모 일이나 해야 할 사람들이고 카친족들은 불교를 믿지 않고 잡신이나 섬기는 미개한 부족이라고 했습니다. 이 역시 수치의 자서전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민족 문제
미얀마에서 민족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요구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영국은 식민 통치 시절에 분열 지배 전략을 이용해 ─ 제국주의답습니다 ─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에서 여러 민족 간 갈등을 부추겼습니다. 그럼에도 버마 북부 지역을 온전히 지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식민 통치가 끝나고 버마를 차지한 것은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 같은 불교·버마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인도계를 비롯한 다른 민족 집단에 대해 인종차별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미얀마 내 수많은 소수 민족 집단들은 버마 민족주의자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아웅산 수치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군부에 맞서 일시적으로 연합하긴 했지만, 수치가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다주리라 믿지는 않습니다.
미얀마 군부는 총칼로 위협해 미얀마를 단결시키려 한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1962년, 군 장성 네 윈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1988년까지 이어진 군부 독재 정권을 세웠습니다.
네 윈이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는, 당시 군부는 미얀마 국가가 여러 소수 민족들에 너무 많이 양보할까 걱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네 윈은 우익 민족주의 운동 출신이었지만, 쿠데타 후 그가 수립한 정권은 스탈린주의적 민족주의 정권이었습니다. 이들은 ‘버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국가자본주의였습니다. 미얀마 군부의 억압에 맞선 소수 민족들의 무장 투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1988년 항쟁 이후 미얀마 군부는 네 윈을 사임시키는 등 통치 형태를 일부 바꿨지만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국제 사회”
지금 미얀마의 진정한 변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쟁점이 있습니다. 바로 “국제 사회”의 압력과 제재가 도움이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국제 사회”의 압력과 제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미얀마의 평범한 사람들이 파업과 대중 시위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중국 모두 이른바 ‘민주주의를 향한 미얀마식 로드맵’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그 ‘로드맵’의 결과가 바로 미얀마의 가짜 민주주의였습니다. 군부가 권력을 부지하지만 선거가 얼마쯤 허용되고 아웅산 수치가 집권하게 된 그 체제 말입니다.
모든 제국주의 열강은 미얀마가 이런 허울뿐인 민주주의 하에서 ‘안정’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열강은 이 정도에 만족하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민주주의·자유·자결권을 쟁취할 진정한 민주주의 투쟁을 지지하려 하지 않습니다.
익히 아시다시피,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군부 독재를 기꺼이 용인합니다. 타이,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그 사례입니다.
또, 서구 제국주의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면 민주주의 운동들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서구 제국주의는 베네수엘라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자들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억압하는 인종차별적 국가 이스라엘을 지원합니다.
그러므로 “국제 사회”의 압력과 제재가 미얀마에 민주주의를 가져다주리라 기대한다면 이는 커다란 실수일 것입니다.
최근에 〈뉴욕 타임스〉는 아웅산 수치가 군부와 충분히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쿠데타가 벌어졌다고 수치를 비난했습니다.(그런가 하면,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티에레스는 ─ 급진적 인물이 전혀 아닙니다 ─ 아웅산 수치가 군부에 지나치게 많이 타협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서방이 진정 우려하는 바가 ‘안정’과 허울뿐인 민주주의일 뿐임을 시사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를 봐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국제 사회”의 압력과 제재 때문에 종식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제 사회”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자신들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한 이를 얼마든지 용인했습니다. 결국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무너진 것은 대중 파업과 학생 시위 덕이었습니다.
중국
중국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은 동남아시아에서 미국과 경합하는 제국주의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중국은 아웅산 수치에 매우 만족해 하고 있었습니다. 수치가 중국 자본주의에 득이 될 여러 협정을 중국과 체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국에게 미얀마 군부 쿠데타가 꼭 달가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중국은 쿠데타 때문에 고심했습니다. 최근 중국 정부 측 대표가 미얀마 군부 수반을 만나, 미얀마 군부가 중국의 석유·천연가스 수송관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확약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 편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둘 모두 제국주의 강국들입니다. 중국은 홍콩에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위구르인들과 티베트인들의 권리를 억압하기도 합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결론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미얀마인들이 스스로 해방되는 데에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조직과 투쟁으로 군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분쇄하는 것입니다.
미얀마와 이웃한 타이를 보면, 군사 정권에 맞서 분출했던 대중 운동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타이 운동의 많은 운동 지도자들이 왕정에 문제 제기하고 군사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국왕모독죄로 실형을 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운동이 이렇게 약해진 것은,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을 활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아웅산 수치를 대신할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강조해야 합니다. 미얀마 군부를 타도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건설하려면 운동에 더 혁명적인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혁명적 지도력은 소수 민족의 자결권을 충심으로 지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군부에 맞선 투쟁에서 단결을 더한층 다질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미얀마 항쟁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것이 그저 흥미로운 국제 소식이어서가 아닙니다. 미얀마인들을 안타깝게 여겨서만도 아닙니다(물론 미얀마인들이 겪는 탄압은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이롭기 때문입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 각자가 사는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투쟁들과 직접적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투쟁의 요구를 얼마나 밀어붙일 것인지, 기후 재앙, 경제 위기, 코로나19가 낳는 문제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등에서 모두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물음이 제기됩니다.
우리 각자가 사는 나라들에서도,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은 언제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도력 문제, 혁명적 정치 조직을 건설할 필요성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리 발언
흥미로운 토론 감사 드립니다.
우선, 무장 투쟁과 파업의 관계에 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파업이 먼저고 무장 봉기는 나중 문제다 하는 식으로 단계론적인 사고를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이 맥락에서, 무기한 총파업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총파업이 무기한으로 벌어지면 경제에 대한 통제력이 지배자들의 손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파업 와중에도 식량과 연료가 분배돼야 하고 기본적 서비스가 제공돼야 합니다. 노동자들의 파업위원회가 그런 일을 수행하게 되겠죠. 파업위원회가 대안 권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이 정당방어를 위해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무장 투쟁을 국가 전복의 핵심 전술로 채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대중 항쟁이 무장 봉기로 귀결되는 것이 초래할 위험은 시리아 항쟁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리아에는 ‘아랍의 봄’ 식의 대중 항쟁이 없었던 탓에, 결국 시리아 항쟁은 제국주의 열강이 개입해 그들의 후원을 받는 세력들 간의 내전으로 변질됐습니다.
무장 투쟁과 파업
김대중에 관한 발언도 흥미로웠습니다. 저도 김대중과 아웅산 수치가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 모두 개혁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둘 모두 자본주의 국가를 운영하려 했습니다. 이는 국가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에 맞게 운영했다는 뜻입니다.
한국에서 아웅산 수치 지지자들, 민족민주동맹 지지자들이 벌이는 시위에 관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저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사람들의 시위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대안적·혁명적 지도력의 필요성을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미얀마에 국가 전복을 추구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가 존재하는지에 관해 알지 못합니다. 운동 안에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규모가 너무 작은 듯합니다. 여러 소수민족 단체들이나 ‘8888’ 항쟁 세대들의 영향을 받는 몇몇 노동자 조직들이 아웅산 수치의 지도력에 비판적이거나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미얀마에서 혁명적 단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규모가 너무 작아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미얀마 항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투쟁하는 미얀마인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사는 나라들에서 우리 자신이 벌이는 투쟁을 위해서도, 혁명적 지도력의 필요성에 관해 계속 말해야 합니다.
세계 어디서 벌어지는 투쟁이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투쟁을 분석하고 미래의 투쟁을 위한 교훈을 도출해야 합니다.
로힝야족 탄압
로힝야족에 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로힝야족은 제국주의의 꼭두각시가 절대 아닙니다. 로힝야족이 고통받고, 살해되고, 강간당하고, 미얀마에서 추방돼도 다른 나라들이 받아 주지도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로힝야족은 분명 미얀마 군부와 아웅산 수치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들입니다. 설령 몇몇 서방 국가들이 기회주의적으로 로힝야족의 편을 자처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로힝야 난민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서방 국가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호주든, 미국이든, 영국이든, 유럽연합 회원국들이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이 나라들 모두 난민들을 대상으로 국경을 닫아걸고 있습니다.
미얀마에서 로힝야족이 억압받는 이유는, 미얀마 지배계급의 극단적 불교·버마 민족주의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극단주의적 불교 승려들의 영향도 있습니다. 그런 승려들은 무슬림을 배척하고, 미얀마가 불교 국가이자 버마족을 위한 나라이길 바라고, 다른 소수 민족들을 탄압하고자 합니다.
한 분이 쿠데타가 미얀마 군부의 오판 때문에 벌어진 것인지 물으셨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군부는 매우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오만해졌을 수 있습니다.
군부는, 아웅산 수치가 총선 압승에 힘입어 군부의 이권 일부를 빼앗으려 들 수 있다고 우려해 쿠데타를 감행했을 수도 있습니다. 군부의 이권은 정치 권력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경제적 이해관계도 큽니다. 군부는 자신들이 통제하는 기업을 이용해 막대한 이윤을 벌어들입니다.
승리
미얀마 항쟁에 걸린 판돈이 굉장히 큽니다.
군부가 권력을 부지한다면 더 많은 피가 흐를 것이고, 탄압이 오랫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미얀마 항쟁이 승리해 군부가 오판했다고 입증한다면, 이는 좋은 일입니다. 미얀마에서 새로운 사회가 건설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중이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부분적인 승리를 거둔다 해도 굉장히 훌륭한 일일 것입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세상의 모든 개혁은 혁명적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라고 썼습니다. 미얀마인들이 온전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한다 해도 그 승리는 여전히 가치 있을 것이고, 미얀마인들은 ─ 아웅산 수치나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입맛에 맞는 ‘개혁’이 아니라 ─ 진정한 개혁을 쟁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토론회에 초청해 준 노동자연대 동지들과 통역해 준 천경록 동지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