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무역 협상 타결 계기로 돌아보는:
                        
                                    
            
            
                IMF 구조조정과 반대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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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미국의 무역 협상이 타결됐다.
이재명 정부는 핵잠수함 건조 승인, 대미 투자 200억 달러씩 10년간 분할 납부 등을 성과로 내세우며 자화자찬하고 있다. 한국 자본가들과 그 언론들도 경쟁자인 일본·EU와 동등한 수준으로 관세가 확정되고, 대미 투자 분할 납부로 경제의 불확실성이 완화됐다며 흡족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7월에 이재명 정부가 트럼프 정부의 관세 대폭 인상 압박에 밀려 대미 투자 3,500억 달러(약 500조 원)를 약속했기 때문에, 그 후 협상에서 별 성과를 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대미 투자가 큰 손실을 보는 것은 아닐지 걱정할 것이다. 트럼프가 대미 투자는 “선불”이라고 얘기했을 때, 국민 10명 중 8명이 부당하다고 답한 것은 대미 투자 손실이 고스란히 부담으로 돌아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트럼프의 압박을 보면서 1997~98년 외환위기 때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요했던 IMF와 미국을 떠올릴 것이다.
IMF, 김대중 정부의 고통 전가
물론 IMF 경제 위기와 현 상황은 같지 않다.
지금 트럼프는 쇠락하는 미국의 경제력을 만회하려고 한국에 더 많은 돈을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반면 외환 위기 직전 한국 대기업들은 막대한 외채를 끌어들여 투자를 늘리며 경쟁했고, 그 때문에 과잉 축적 위기가 심각했다.
그럼에도 당시나 지금이나 미국의 강력한 압박에 대응해 한국 지배계급이 나름의 이익을 추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97년 위기는 이미 연초에 시작되고 있었다. 1월 한보철강이 결국 부도를 맞으면서 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3월부터 삼미·진로·기아 등 대기업 그룹들의 연쇄 부도가 이어졌다. 한국 김영삼 정부는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투하면서 외환보유액을 소진했다. 결국 외환보유액이 거의 고갈된 11월, 김영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한국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것은 미국 정부가 압박을 한 결과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재무부는 김영삼 정부의 차관 제공 요청을 뿌리쳤을 뿐 아니라 일본 정부에게도 차관을 제공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1997년 9월에 ‘아시아통화기금’(AMF)을 창설해 위기에 빠진 국가들을 지원하려고 했지만 미국 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이 계획을 접어야 했다.
한국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지만 12월에도 외환위기는 진정되지 않았다. IMF(와 미국 재무부)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더한층 요구하며 자금 지원을 차일피일 미뤘기 때문이다.
12월 대선 기간에 김대중 후보는 IMF와의 재협상을 주장한 바 있고, 임금과 정리해고를 6개월간 동결할 것이라고 공약하기도 했었다. 경제 관료 일부와 김대중 대선 캠프 내에서는 “차라리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선언하자”는 소수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김대중은 정리해고 도입 등 IMF의 더 가혹한 구조조정 방안을 받아들였다. IMF와 미국 재무부의 정리해고 요구를 수용했을 뿐 아니라, “IMF가 권고하는 협약을 IMF 플랜이라기보다 ‘한국 플랜’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것이다(《문화일보》, 1997년 12월 23일).
그 길이 자신의 친미 노선을 드러내는 데 유리할 뿐 아니라, 한국 경제의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도 꼭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맨 먼저 노사정 합의 형식으로 정리해고와 파견근로 등을 도입했다. 김대중 정부는 ‘고통 분담’을 말하며 구조조정을 추진했지만, IMF 경제 위기를 불러오는 데 크게 일조한 대기업과 부유층, 고위 관료들은 전혀 고통을 분담하지 않았다. 고통은 오로지 노동자·서민의 몫이었다.
IMF의 고금리 정책 때문에 3만 개 이상의 기업들이 도산했고, 30대 재벌 중에서 16개가 사라지거나 분해됐다.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가 110만 명에 달했고, 집 없는 노숙인들이 지하차도를 메우기도 했다. 자영업자 도산, 가정 파탄 등은 통계에 잡히지도 않았다.
반면 부유층은 고금리·고환율로 늘어나는 부를 주체하지 못했다. 당시 언론들은 부자들이 서울 강남 룸살롱에서 “이대로!”를 외치며 건배하는 모습, 서민들의 자가용 사용이 줄어 도로가 막히지 않자 좋아하는 행태 등을 보도했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노동자 등 서민층의 허리띠를 졸라서 부자의 배를 불려 주는 방식을 능동적으로 선택했고 이를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했다. 그것은 ‘고용 없는 성장’이었고, 경제가 회복되는 기간에도 저임금 비정규직 비중만 계속 늘었고, 사회 양극화는 확대됐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결과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심화된 것이다.
현대자동차 점거 투쟁
IMF 경제 위기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에 좌파·노동운동의 대응은 미흡했다.
민주노총의 지도층뿐 아니라 활동가 상당수도 경제주의와 부문주의 그리고 좌파적 국민주의(민중주의)를 수용하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트럼프의 관세 인상 압박에 대해 좌파 일부가 “약탈”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비슷하게 1997년 12월 민주노총 지도부는 IMF 외환위기를 “IMF를 내세워 한국 경제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공세 또는 “IMF 신탁통치”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노사정 대책기구 구성을 촉구했다. 좀 더 급진적인 좌파는 (옳게) 모라토리엄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좌파가 ‘민족적’ 위기 극복과 ‘국익’을 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좌파적 국익론도 한국 자본주의의 이익과 노동자들의 이익을 절충하는 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 희생하고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에 취약해지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1998년 1월 18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 〈국민과의 TV대화〉에서 모라토리엄에 반대하며 “현금이 없는 한 우리는 식량과 석유를 살 수 없다,” “엘리베이터도 정지돼 10층이 넘는 아파트도 걸어 다녀야 한다”며 협박하자, 좌파들 내에서 재협상이나 모라토리엄 요구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결국 경제 공황이 한창 엄습하던 1998년 2월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해 정리해고제를 수용하는 배신적 타협을 했다. ‘경제 살리기’와 ‘고통분담’ 압력을 거부하지 못한 것이다.
직후 이를 추인하려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조합원들이 대거 몰려가 격렬하게 항의하자 배석범 직무대행은 사임하고 더 좌파적인 단병호 당시 금속연맹 위원장이 비대위원장이 돼 배석범을 대체했다.
그러나 단병호 비대위원장도 약속했던 총파업 계획을 사흘 만에 취소했다. 단병호 비대위원장은 “총파업이 국민경제를 어렵게 할 것이라는 국민들의 충정 어린 걱정과 우려를 감안해 파업을 철회키로 했다”고 밝혔다. 결국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는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국회를 통과했다.
새로 당선된 이갑용 민주노총 지도부도 1998년 6월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을 예고했지만, 대통령 김대중이 그 시기에 미국을 방문해 경제 위기 탈출 협상을 하기로 하자 ‘국익 외교’를 지원한다며 파업을 취소했다.
IMF 경제 위기 속에서 많은 노조 지도자들이 임금 동결·삭감을 수용하거나, 성과급을 반납하거나, 비정규직 확대를 수용하는 등 양보 교섭을 통한 ‘회사 살리기’를 선택했다.
결국 일반 노동자들은 노동강도 강화와 임금 삭감으로 고통을 겪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금 삭감을 양보한 노동자들에게도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의 칼바람이 몰아쳤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는 취임 첫 반년간 대량 해고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 공세는 1998년 8월 마침내 노동자들의 대규모 저항에 부딪혔다. 현대차 노동자들이 대량 해고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공장 점거 투쟁에 나선 것이다.
당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에게는 강력한 노조 조직과 전투적 전통이 있었다. 그들은 공장을 점거했고, 경찰 공격에 대비해 가슴에 식칼을 품고 연좌했다. 결국 경찰은 살기를 띤 노동자들의 저항이 두려워 진압 병력을 투입하지 못했다. 당시 금속연맹의 한 지도자(문성현)는 후일 한 토론회에 나와 당시의 열기를 회고하면서, 자신은 경찰보다 노동자들이 더 무서웠다고 실토했다.
현대차 노조의 공장 점거는 지도부의 소심함과 동요 때문에, 온전한 승리를 거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노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지도부가 일부 정리해고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해고 규모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비겼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 투쟁은 전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에 정부와 재계든, 노동운동 측이든, 현대차 파업을 “한국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대리전”이라고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큼 많은 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것이다.
또한 현대차 노동자 점거 투쟁은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대폭 수정하게 만드는 데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 이처럼, 현대차 노동차 투쟁은 IMF와 김대중 정부의 고통 전가에 맞서 노동자들이 싸울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이는 오늘날에도 교훈을 준다. 막대한 대미 투자에는 쉽게 돈을 쓰려고 하면서도, 임금 인상이나 복지 확충 등에는 인색한 한국 정부와 자본가들에 맞서려면 노동자 투쟁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노동자들이 물가 상승과 긴축 재정으로 삭감당한 생활수준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에 나서도록 고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