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주노동자 사건 일지 7:
노동조건 열악한데 이직도 제약당하는 원어민 영어 강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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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광일은 이주노동자 전문 노무사로 일하고 있는 노동자연대 회원이다. 일하면서 경험한 사례들을 〈노동자 연대〉에 매달 기고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하는 원어민 영어 강사를 처음 만난 곳은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주최하는 집회였다.
이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 외국인 참가자들이 많기 때문에 무료 노동상담 부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의 노동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
어느날 한 여성이 부스로 찾아왔다. S 씨는 남아공 출신으로 현재 한국에서 원어민 강사로 일하고 있으며 자신이 민주노총 조합원이기도 하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S 씨를 통해 한국에서 일하는 원어민 강사들의 열악한 조건을 처음 알게 됐다. S 씨는 민주노총이 제작한 원어민 강사 인터뷰 유튜브 영상을 소개해 줬고, 이 영상을 보고 그들의 처지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됐다.
유튜브 인터뷰에서 여성 강사는 자신이 한국에 온 지 10년이 됐는데 첫 급여가 현재 초봉과 동일하고, 연차휴가에 대해 알지도 못해 사용하지 못했으며, 노동자임에도 사용자가 프리랜서 계약으로 위장해 건강보험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특히 사용자의 “이직 동의서”가 있어야만 사업장 변경이 가능하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마지막에는 눈물을 흘렸다. 여느 한국인 노동자들(특히 학원 강사들)이 겪는 고충과 유사하고, 사업장 변경 문제에서는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들과 비슷한 처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직 동의서
또 다른 경우인 R 씨는 미국 출신으로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 적극 참가하는 원어민 강사였다. 현재 일하는 학원이 제공하는 숙소에서 가스 유출 사고가 있었고, 이 사고와 과도한 업무 때문에 이직하고 싶다는 것이 R 씨의 고민이었다. R 씨는 한국에서 계속 일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R 씨는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는 것이라 사용자의 “이직 동의서”가 있어야만 한국 체류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 원어민 강사에게 “이직 동의서”는 족쇄인 것이다.
그와 상담하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R 씨가 사용자와 체결한 근로계약서에는 강사가 사직을 하려면 90일 전에(!) 사직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고 적시돼 있었다.
한국의 법률에 따르면 통상 1개월 전에 사직 의사를 표명하면 문제가 없지만, R에게는 90일이라는 가혹한 조건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 노동법 등에 따르더라도 강제근로에 해당할 여지마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R 씨는 전전긍긍했다. 사용자가 제공한 숙소의 가스 유출 사건과 산재 연관성 등 여러 해결 방안을 고민하고, 내가 직접 사용자에게 전화해서 법률 위반의 여지를 가지고 압박해서 이직 동의서를 받아 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R 씨는 이런 방법에 대해 부담을 느꼈다.
결국 진단서 등을 제출해 ‘90일 이전 통지’ 계약 사항과 무관하게 사직하고 이직 동의서도 받았다.
사직 전에는 R 씨가 행사할 수 있는 연차휴가에 대해서도 상담했다. R 씨는 고마워하며 나에게 팔레스타인 연대 금속 배지를 선물했다. R 씨가 고민을 해결하고 집회에 계속 참가할 수 있어 다행이다.
P 씨는 사무실에 찾아온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었다. P 씨도 원어민 강사로 일하고 있었고, 해고 문제로 다투고 싶어 했다. P 씨는 자신이 학원 사용자와 체결한 근로계약서를 직접 가지고 왔는데, 원어민 강사의 노동조건을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근로계약서
P 씨의 계약서에서 처음 눈에 띈 것은 임금 수준이었다. P 씨의 임금은 2023년 한국 노동자 월평균 임금 수준이었다. 그러나 계약서는 임금을 낮추고 권리를 제약하기 위한 조항으로 가득했다.
먼저, 퇴직금 산정이다. P 씨의 임금항목은 기본급, 자격수당, 고정수당, 주택수당으로 구성돼 있는데 계약서에 퇴직금은 기본급으로만 산정한다고 규정돼 있다. 이는 노동관계법령 위반이다.
d. Articles 3-b, c will be considered as bonuses and will not be included in the calculation of the employee’s severance pay. Severance pay is based on employee’s base salary.
번역: 3항의 b,c(자격수당, 고정수당, 주택수당)는 보너스로 간주되며 퇴직금 산정에 포함하지 않는다. 퇴직금은 기본급으로 산정한다.
과도한 공제금액도 눈에 들어왔다.
CLAUSE 10 (ABSENT or LATE)
a. If the employee is absent for their own reason (no doctor’s note, travel, drink, etc.), ### will deduct 200,000 KRW from your salary.
번역: 개인적 사유로 결근 시 20만 원을 공제한다.
이 공제액은 P 씨의 하루치 통상임금을 훨씬 초과하는 금액이다.
P 씨도 R 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발적으로 사직하려면 90일 전에 사용자에게 통보해야 한다는 강제근로규정이 근로계약서에 명시돼 있었다.
12.C. Voluntary resignation from the employee
a. If the Employee wants to teminate the contract before its maturity, he/she may do so only if he/she submits a NINETY-day advance notice in writing to the Employer for the Employer to have sufficient time to hire a new teacher.
번역: 피고용인이 계약기간 만료 전에 계약을 종료하려면 90일 전에 고용인에게 서면으로 통지해야 한다.
P 씨의 계약서에서 가장 놀랐던 것이 다음 항목이다. 강사가 해고되거나 자발적으로 사직할 경우 금액 변제 의무를 명시해 놓은 것이다.
d. In case of section 12.B.a and 12.C.a, the employee will be required to reimburse the employer for the following costs (recruiting fee-2,000,000 KRW, and other administrative fees-200,000 KRW.)
번역: 12조 B.a 항(해고 관련 규정)과 12조 C.a 항(자발적 사직 규정)의 경우 피고용인은 고용인에게 다음의 비용(채용 수수료 200만 원, 기타 행정 수수료 20만 원)을 변제해야 한다.
이는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위약예정의 금지(노동자의 근로계약 미이행에 대해 사용자가 위약금이나 손해배상액을 예정하는 계약을 금지하는 것) 위반의 여지가 있다.
“이직 동의서”라는 족쇄를 걸어 두고 온갖 위법적 근로계약으로 원어민 강사들을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내몰아 온 것이다.
원어민 강사는 E-2 비자(회화지도비자)로 체류자격을 얻는데, 비자 발급 대상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7개 국가에만 한정된다. 미국, 영국, 캐나다, 남아공 등이다. 이 나라 출신의 원어민 강사들이 한국에서 일하는 노동조건을 볼 때, 선진국 노동자들도 한국에서 한국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사용자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국의 비자제도는 이주민들을 촘촘하게 갈라놓고 있는데, 몇 달 전에 울산에서 만난 우즈베키스탄 출신 대학원생은 E-2비자를 발급받고 싶지만 국적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필리핀의 경우 영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하고 있지만, E-2 비자 발급이 불가능하다.
최근에 원어민 강사들이 뭉친 노동조합이 부산지역에서 최초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임금 인상과 연차휴가와 병가 사용에서 진전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의 투쟁과 성과에 박수를 보낸다.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