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 유입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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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처우를 이유로 지지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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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이주민과 좌파에게 경종이 울리고 있다. 유럽에서는 인종차별과 이주민 반대를 주요 무기로 삼고 있는 파시스트와 극우 세력이 유럽의회 선거에서 약진했고, 프랑스 총선에서도 파시스트 국민연합이 결선에서 3위에 올랐다. 반파시즘 공동 투쟁들이 활발한 영국에서조차 파시스트들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다행히 8월 7일 반파시즘 전국 시위가 성공적으로 반격을 가했다.) 미국에서는 집권 시절 야만적으로 이주민을 단속하고 이른바 “불법이민자”에 대한 강력한 추방 정책을 주장해 온 트럼프가 가을 대선에서 승리할 수도 있다.
이른바 “극단적 중도”(신자유주의적 중도좌파 정당) 정부들은 이민 규제 정책들을 강화해 왔다. 이런 정책들이 극우와 파시스트들의 기를 세우고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싣게 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주민 유입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는 우리나라에서조차 매우 중요한 문제다.
국경 통제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이주민 통제는 결국 국가의 국경 통제를 바탕으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경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국가의 국경 통제도 필요하고 당연한 것으로 흔히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일상적 시기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많은 ‘상식’처럼 국경 개념과 엄격한 국경 통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었다.
근대 초기인 17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지역 왕국과 공국 사이의 경계는 모호했다. 그러나 18세기 산업 자본주의의 등장과 맞물려 신생 국민국가들이 형성되면서 국경과 국경 통제가 등장했다. 국경은 지리적 차원에서 국민 개념을 나타내는 구실을 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됐다. 국경을 기준으로 “국민(시민)”에 속할 자격이 주어졌다. 동시에, 국경은 “국민(시민)”에 속하지 않아 배제할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1870년 영국인 노동자들이 아일랜드인 노동자들을 향해 갖는 민족주의적 감정이나 인종차별적 정치가 결국 자본가 계급에게 유리한 결과를 낳는다고 썼다.
“오늘날 영국의 모든 산업과 상업 중심지에서 노동계급은 영국인 프롤레타리아와 아일랜드인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적대 진영으로 분열돼 있다. 평범한 영국인 노동자는 아일랜드인 노동자를 자신의 생활수준을 낮추는 경쟁자로 여기며 미워한다. 그는 아일랜드인 노동자와 비교해 자신은 지배 민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며, 그 결과 아일랜드에 맞서는 영국 특권 계급과 자본가들의 도구가 된다. 그렇게 해서 영국인 노동자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자들의 힘을 강화해 준다.”
노동자들이 국경 통제와 이주민 단속에 반대해야 하는 핵심 이유는 계급 내부 이간을 막는 것이라는 것이다.
국민국가가 형성된 이후 지배계급 내에서 모순과 논란이 존재했다. 민족(국민) 개념이 이윤 추구에 항상 효과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유럽연합을 둘러싼 영국 지배계급의 내분은 하나의 두드러진 사례다.)
그래서 지배계급의 일부는 국경 단속 강화를 주장하며 이주민 배척 운동을 벌이고, 다른 부분은 값싼 노동력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자유로운 이주를 주장한다. 물론 흔히 이 두 가지를 절충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즉, 일정 수준의 이주민을 받아들이면서도, 입국을 허용하는 대가로 열악한 처우와 권리 제한을 강요한다.
국제적 차원의 경쟁과 갈등도 국경 단속 수준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세계대전 직후에 국경 단속이 강화됐다. 오늘날 보편화된 비자 제도, 출입국 관리 시스템이 이때 처음 도입됐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세계경제의 성장과 장기 호황 때문에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주민 유입을 늘렸다.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008~09년 공황 이후 최근 15년의 상황을 보면, 국경 단속이 점점 중요해졌다. 장기 경제 침체에 따른 노동계급의 불만이 점증하는 상황에서 국경 단속을 강화하며 불만을 이주민과 난민에게 돌리려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난민이 급격히 증가하자, 서방의 중동 개입의 피해자인데도 이들을 받지 않으려고 서방 지배자들은 국경 단속을 강화했다. 지난 10년간 유럽에 가려다 익사한 난민이 수만 명이다. 이를 정당화하는 데 이슬람·무슬림 혐오가 이용되고 있다. 이슬람·무슬림 혐오는 인종차별의 최신 형태다.
한국의 이주민과 국경 통제
한국도 이주민 유입이 늘고 있다. 올해 6월 기준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261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퍼센트에 이른다.
한국 정부는 2024년 고용허가제로 유입하는 노동자 수를 16만 5000명으로 늘리고 업종도 확대했다. 2004년 고용허가제 도입 이후 가장 큰 규모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 전반적인 교육 수준 향상으로 한국인이 기피하는 일자리에서 그들은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고 있다.
세계적 난민 증가의 영향으로, 한국으로 오는 난민도 늘고 있다. 2023년 한국의 난민 신청 건수는 1만 8838건으로 2022년 1만 1539건에 비해 약 63퍼센트 증가했다. 국경 단속의 피해자이자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탈북민의 규모도 현재 3만 4000여 명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입국을 허용하는 대가로 이주민의 권리를 제약하거나 박탈한다.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는 사용자의 동의 없이 사업장을 변경하면 한국에서 쫓겨날 수 있다.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결혼 이주 여성은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 관계를 유지하거나 한국 국적의 자녀를 양육하지 않으면 체류 연장이 어렵다. 이 때문에 남편에 대한 종속이 심해지는 경우가 적잖다.
난민 신청자들은 불안정한 신분 때문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도 어렵고 각종 사회보장제도에서 배제된다.
정부는 이런 통제를 벗어난 미등록 이주민들을 야만적으로 단속해 추방하고 있다.
이주민 차별은 2007년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와 최근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로 비극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주민 유입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입장
그런데 노동조합 지도자와 개혁주의 정당들은 이미 한국에 들어온 이주민의 처우 개선은 지지하면서도, 이주민 추가 유입은 지지하지 않는다.
건설노조의 일부 조직들은 더 나아가, 건설 현장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출입을 막아 조합원 채용을 요구하는 활동을 하는 등 이주노동자를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있다. 이는 최근 점점 번져 가는 현상이다.
물론 일자리 문제의 절박함을 못 본 체하고서 건설 노동자들에게 도덕적 비난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더 설명하겠지만) 이주노동자 배척은 매우 근시안적인 태도다.
조합원 채용을 내세우다 보니 단지 미등록 이주노동자만 배척하게 되는 게 아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와 한국노총 건설노조가 서로 자기 조합원 우선 채용을 요구하며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노총 건설노조는 민주노총 건설노조보다 더 노골적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 배척을 요구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리고 조합원 우선 채용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임금 저하 없이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강도를 낮춰서 일자리를 늘리라는 등 모든 건설 노동자를 단결시킬 수 있는 요구를 내놓고 싸워야 한다.
모든 개혁주의자들이 건설노조의 일부 조직들처럼 노골적으로 이주노동자 배척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 개혁주의자들은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와서 겪을 열악한 처우를 이유로 유입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력이 부족한 이유가 해당 일자리의 임금이 낮고 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이라며, 일자리의 질을 개선하면 인력난이 해결될 것이라고 옳게 주장한다. 그리고 이주노동자 차별 반대를 말한다. 그래서 언뜻 이주노동자를 위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주노동자를 유입시키기 전에 먼저 내국인의 유입을 유도하라는, 즉 내국인 고용을 우선하라는 주장(때로 함축적이다)이 수반된다. 이런 보수적 요구에 이주노동자 차별 반대라는 진보적 포장지를 씌운 것이다.
오는 9월 시작되는 서울시의 외국인(필리핀인) 가사노동자 시범사업에 대해서 지난해 ‘시범사업 저지 공동행동’이 결성돼 이런 입장을 취해 왔다. 그 기구에는 가사·돌봄 노동자들이 조직돼 있는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노총 가사·돌봄서비스지부, 공공운수노조 서울시사회서비스원지부 등 노동조합, 이주노조, 이주노동자평등연대, 외노협,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등 이주민 운동 단체들, 녹색당, 사회주의를향한전진과 같은 급진 좌파 등이 포함돼 있다.
지난해 시범사업 계획이 처음 발표됐을 때 민주노총, 진보당, 정의당도 시범사업 중단을 요구했다.
지난 8월 6일, 시범사업으로 일할 필리핀인 가사노동자들이 한국에 입국하자 이주노조와 민주노총 등이 포함돼 있는 이주노동자평등연대는 “시범사업 프로세스에 이주노동인권단체와 노동조합의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주노동자평등연대가 ‘시범사업 저지 공동행동’에 속해 있다는 점에 비춰 보면, 외국인 가사노동자 유입을 반대하거나 적어도 그 수급 조절에 자신들이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주민 지원 엔지오들의 연대체인 외노협은 올해 5월 “열악한 내국인 가사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더욱 열악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고 정부와 서울시에 따져 묻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실행위원인 김진석 서울여대 교수는 올해 4월 〈한겨레〉 기고글에서 “인력난 완화에 외국인 노동자 고용 방안을 고려하자는 제안이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면서도, 우리 사회에 돌봄 서비스 인력이 모자란 게 아니라며, 이들을 돌봄 노동시장으로 유인하는 문제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조선업 이주노동자 유입을 확대하자 조선업종의 원하청 노조들도 생색내는 온정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울산 동구에 출마한 민주노총 후보 이장우(노동당 소속) 후보가 이런 배경 속에서 이주노동자 유입을 지지하지 않는 주장을 선거운동에서 했다. 조선업의 중심지인 울산은 최근 이주노동자 유입이 늘었다.
사실 이런 입장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 아니다. 영국에서 세 번째로 큰 노조인 영국일반노조(GMB)는 2022년, 당시 보수당 정부가 돌봄 부문에 인력이 부족하다며 이주노동자를 들여오려 하자 이렇게 주장했다. “인력 부족 해결책은 해외 노동자 수입이 아니라 적절한 수준의 임금 지급이다.”
역사적 경험은 국제주의에 불철저한 노동단체(노조와 정당)는 점점 더 개혁주의적이 돼서, 내국인 노동자 일자리를 놓고도 제대로 지키지 못함을 보여 주었다.
이주노동자를 위한 이주노동자 유입 반대?
이주노동자들이 열악한 일자리에서 고통받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행을 지지하지 말아야 할까?
이는 그런 일자리에라도 취업해야 하는 당사자들의 절박한 필요를 외면하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네팔 정부가 한국 고용허가제 조선업종 한국어능력시험에 탈락한 네팔 노동자들에게 제조업 한국어시험 응시를 금지하자 네팔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네팔 당국의 강경 진압으로 이 시위에서 두 명이 사망했다. 그만큼 한국행이 절박했던 것이다.
열악한 처우를 이유로 이주민 유입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너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안다’는 오만한 태도일 뿐이다. 이주민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실제 그렇게 한다. 이주에 위험과 고통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향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나은 합리적 선택이기 때문에 이주하는 것이다.
한국은 중동이나 다른 아시아 나라에 비해 이주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조금은 나은 편이다. 서울시 외국인 가사노동자 시범사업에 필리핀인 100명을 들여왔는데, 한 재한 필리핀인 공동체 활동가에 따르면 필리핀 현지에서 무려 1만 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나 홍콩에 가사노동자로 가는 것보다 한국의 조건이 상대적으로 낫기 때문이다.
한국행이 막히면 그들은 사우디아라비아나 홍콩에서 더 열악한 조건으로 일하거나, 자국의 훨씬 더 열악한 일자리에 취업하거나 아니면 실업자가 될 수도 있다. 홍콩은 가사노동자 시급이 2797원이다! 심지어 애초부터 미등록 신분으로 한국에 오려 할 수도 있다.
이런 온정주의적 논리라면 상대적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이 강요되는 여성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말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자.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서독에 한국 노동자들을 광원과 간호사로 보냈다. 당시 서독의 광원과 간호사는 열악한 일자리였다. 그렇다면 서독 좌파와 노동조합은 한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을 지지하지 않아야 했을까?
이주노동자 유입이 내국인 일자리와 임금 감소의 원인인가?
이주노동자 유입 대신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으로 해당 일자리에 먼저 내국인을 유도하라는 보수적 포퓰리스트 주장은 이주노동자 유입을 내국인 고용, 임금 인상과 대립시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전제는 이주노동자가 유입되면 그 부문의 임금이 떨어지고 내국인의 고용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들이 나눌 파이의 크기는 고정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제로섬 견해는 지난해 말 독일 좌파당에서 분당해 신당을 창당하고 유럽의회에 진출한 자라 바겐크네히트의 주장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과도한’ 이주민 수용이 ‘부족한’ 자원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을 낳는다며, 이 경쟁이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극우를 강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바겐크네히트는 이주민이 고국에서 교육받고 일하는 것이 이주민 자신과 그 나라에도 더 낫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주노동자가 내국인 고용과 임금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는 없다.
2017년 미국 국립과학원(NAS)은 이민자 유입이 미국 경제에 미친 영향에 대해 방대한 증거를 정리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민자 유입이 고용과 임금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작다는 것이 보고서의 중요한 결론이었다.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시리아 난민 360만 명이 튀르키예로 피신했는데 이는 튀르키예 인구의 4.4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난민 유입이 임금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고, 비공식 분야의 실업률이 조금 상승했지만 공식적 분야의 고용은 증가한 것으로 확인됐다.(《이주, 국가를 선택하는 사람들》, 2024년, 헤인 데 하스)
이는 한국의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IMF 위기나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이주민 수는 감소하거나 거의 변동이 없었지만 한국 노동자들은 고용 위기와 실질임금 감소를 겪었다. 이런 일부 기간 외에는 한국의 이주민 수는 꾸준히 증가해 왔지만, 실업률은 큰 변동이 없었고 실질임금도 대체로 올랐다.
반면 총소득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몫인 노동소득분배율은 1990년대 이래로 하락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이런 사실들은 일자리 감소나 임금 인상 억제가 경제 상황이 악화되거나, 지배자들이 노동자 몫을 점점 줄여 온 탓이지 이주노동자 증가 때문이 아님을 보여 준다.
단결과 저항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주노동자 유입과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처우 개선을 대립시키는 것은 부정확하다. 사실 정부가 최근 조선업에 이주노동자 유입을 급격히 늘리기 전까지 몇 년간 조선업 사용자들은 노동력 부족을 겪으면서도 임금을 올리지 않았다.
고용과 임금 수준은 정해진 몫이 있어서 이를 노동자들끼리 나눠야 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 몫을 줄이려는 사용자에 맞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경제 상황이 나빠도 노동자들이 효과적으로 투쟁하면 일자리를 지키고 복지를 얻어 낼 수 있다. 1930년대 대불황기에조차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런 사례다.
무엇보다, 이주노동자 유입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에서도 정부의 주기적 단속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미등록 이주민은 꾸준히 늘어, 올해 6월 기준 41만 명이 넘는다. 전체 이주민의 약 16퍼센트다.
많은 ‘진보’ 단체들이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을 지지하지 않는 사이에 올해 4월 정부는 결혼 이주민의 본국 가족과 이미 한국에 와 있는 유학생들에게 (최저임금이 적용되지 않는 방식으로) 가사·돌봄 업종 취업을 허용하는 방안을 내놨다.
최저임금 적용을 회피하려는 것은 물론 문제다. 그러나 결혼 이주민의 본국 가족에게 한국에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유학생들이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취업하려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그랬다가는 한신대의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강제 출국 사건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주노동자 유입이 한정된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볼 게 아니라, 그들을 환영하고 함께 조건 개선을 위해 투쟁하고 조직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몇몇 부문에서는 이미 이주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상당 부분을 이루고 있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전체 노동자 약 180만 명 중 이주노동자는 32만 명이 넘고, 그중 11만 명 이상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추정된다(건설근로자공제회, ‘2024년 건설근로자 수급전망’). 반면 민주노총 건설노조 조합원은 14만 명이고, 한국노총 건설노조 조합원 수를 합쳐도 25만 명가량이다.
또, 2024년 3월 기준 조선업 고용 규모는 약 11만 3000명이었고 그중 이주노동자 비중은 무려 13퍼센트이다. 대부분 조선업 빅3 기업의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을 경쟁자로 여기고서 노조가 힘을 발휘하는 데는 절대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 때문인지 기존에 이미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는 조직하고 함께 싸우겠다면서, 신규 이주노동자 유입은 지지하지 않는 주장도 있다. 예컨대 지난해 11월 정부가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 도입 규모와 업종을 확대한다고 발표하자 금속노조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2022년] 51일간 파업을 벌였던 조선소 하청 노동자들의 요구를 정부와 자본이 모두 수용했다면 국내 노동자, 청년들이 조선소로 다가갔을 것이다. … 정부는 ‘질 낮은 일자리의 이주화’를 즉각 중단하라. … [금속노조는] 국적과 등록 상태를 불문하고 이주노동자의 권리 향상을 위해 노동조합으로 조직해 함께 싸워나갈 것이다.”
이주노동자 추가 유입을 반대하고 내국인 고용을 우선하라는 맥락에서 ‘질 낮은 일자리의 이주화를 중단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주노동자를 조직해서 함께 싸우겠다고 한다. 그러면 그 대상은 기존의 이주노동자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신규 이주노동자가 일자리 감소와 저임금을 낳는다고 여긴다면, 기존의 이주노동자까지 문제 삼는 것으로 이어지기 쉽다. 정해진 몫을 노동자들끼리 나눠 가져야 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처럼 경기 침체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다.
결론
자본주의는 세계 체제이고, 노동계급은 보편적인 세계적 계급이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경쟁하는 여러 국민국가로 분리돼 있는 점 때문에 노동계급도 국경을 따라 분리돼 있다.
한편, 자본가는 노동력을 충분히 공급받기 위해 해외에서 노동자를 들여와야 하는 일이 흔하다. 자본주의 발전의 지역적 불균등, 자본주의가 낳는 세계적 불평등과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외국으로 이주해 일하려는 사람들은 있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국제적 인구 이동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 나라의 국경 안에서도 노동계급은 다양한 ‘인종’(또는 국적)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도 다인종 노동계급이 됐다. 세계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맞서려면, 각국에서 지배자들에게 맞서려면 내국인과 이주민의 단결을 추구하는 국제주의가 필수적인 이유다.
조금이라도 나은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려는 것은 정당하고 당연한 욕구다. 이런 움직임을 옥죄고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이주노동자들이 차별받고 고통받는 진정한 이유다. 자본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데, 왜 평범한 사람들의 이주는 규제돼야 하는가?
따라서 어떤 그럴싸한 명분과 조건을 달든지 노조와 좌파 정당이 이주노동자 고용·유입 제한 입장을 펴면, 이주민을 둘러싼 정치 지형이 우파에게 유리하게 형성될 수 있다. 이주노동자를 고용과 임금 인상의 장애물로 여기는 정서를 부추길 수 있고, 그러면 지배계급은 필요에 따라 때로는 이주민 유입을 늘리면서도 이를 빌미로 더한층 통제적인 정책을 펼 수 있다. 지금도 한국 정부는 고용허가제의 이주노동자 사업장 변경 제한을 이른바 ‘일자리 잠식을 우려하는 국민 정서’를 명분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게다가 (건설노조 등) 일각의 이주노동자 배척 입장은 이주노동자들이 국내 노동조합을 불신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이주노동자는 사용자에게 의존하거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가 더 쉬워질 것이다. 그 결과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과 일자리를 더 열악하게 만드는 압력이 커질 것이다.
요컨대 내국인 노동자들을 우선 보호하자며 이주노동자 유입을 제한해서 얻을 ‘이득’은 기껏해야 매우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이다. 지금 같은 경제 침체기에는 그런 ‘이득’조차 없을 수도 있다. 전체 노동계급에게는 결국 더 큰 손해로 돌아올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조건과 차별에 반대한다면 이주노동자 유입 통제 정책을 지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주민 유입을 무조건 환영하며 이주민들의 노동조건, 정치적 권리 향상과 국경 통제를 반대해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