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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주노동자 사건 일지 4:
폭행과 강제근로로 고통받는 이주노동자들

필자 김광일은 이주노동자 전문 노무사로 일하고 있는 노동자연대 회원이다. 일하면서 경험한 사례들을 〈노동자 연대〉에 매달 기고하고 있다.

1995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9년 전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농성했다. 이들은 산업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왔다. 산업연수생 제도는 악랄했다. 사용자가 이주노동자의 여권을 압수해 강제로 일을 시켰고, 임금 체불과 욕설, 폭행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명동성당 농성에서 내건 노동자들의 팻말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때리지 마세요”, “우리도 인간입니다”.

때리지 마세요

미얀마 출신 청년 이주노동자 D 씨가 사무실로 찾아온 건 평일 아침이었다. 문 열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들은 얘기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출근하자마자 사용자가 다른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D 씨의 목덜미를 여러 번 잡아채고 바닥에 내동댕이친 것이다.

동료 이주노동자들은 당시 폭행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자필 서명이 담긴 진술서를 써 줬다.

폭행당한 노동자의 동료들이 쓴 자필 진술서

사용자의 이주노동자 폭행 건은 나도 처음이라 어찌해야 할지 당황스럽기도 했다. 먼저 경찰에 신고했지만 출동한 경찰은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라며 돌아갔다. 도대체 왜 출동한 것인지.

폭행 건에 대응하려고 우선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발급받았다. 의사는 D 씨의 어깨, 팔, 팔꿈치에 타박상이 있다고 진단했다.

회사에 돌아갈 수 없었던 D 씨는 사무실에 계속 있었다. 그와 점심을 함께 먹었는데, 밥그릇에 고개를 묻고 허겁지겁 순식간에 밥을 해치웠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는 그가 혹시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출근하자마자 폭행당해 회사를 나온 그에게 첫 끼였는데, 매우 허기졌던 모양이다. 어쩌면 밥보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따뜻한 인간적 대접이 더 고팠을 수도 있다.

고용지청에 신고하기 전에 먼저 경찰서에 폭행죄로 고소하려고 관할 경찰서에 함께 갔다. 근로기준법상 사용자의 폭행 금지 조항 위반이지만, 형법상 폭행죄에 해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인노무사는 형사 사건에 대한 법률적 대리권이 없지만 D 씨 혼자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데다 무시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인인 내가 함께 가서 고소하려 했지만, 형사는 근로기준법상 폭행 금지 위반이므로 고용지청에 신고하라며 등을 떠밀려 했다. 고소장 접수조차 목소리를 높이고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일이었다. 최초 출동했던 경찰이나, 관할 경찰서 형사나 사용자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D 씨에게서 들은 사업장 얘기는 기가 막혔다. 그에 따르면 해당 사용자는 상습 폭행범이었다. 다른 국가 출신 이주노동자들도 폭행을 당했고, 더 어이없는 것은 그 사용자가 사업장 변경을 허용해 주는 대가로 이주노동자에게 입국 비용 등을 빌미로 돈을 뜯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사용자는 지역의 이주노동자 지원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악명 높은 자였다.

경찰 고소와 고용지청 신고에 압박을 받았는지 사용자는 대리인인 나에게 고소와 신고를 취하하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적반하장으로 사업장 변경을 허용해 줄 테니 일정한 금액을 자신에게 지급하라고도 했다. 이 자는 술에 취한 듯 한밤중에도 전화하고, 문자를 보냈다. 한국인 노무사에게도 이럴진대 이주노동자들에게 어떻게 대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됐다. 지금까지 만난 사용자 중에 최악의 “진상”이었다. 게다가 D 씨는 폭행 사건 이후 두려움 때문에 사업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사용자는 계속 안 들어오면 이탈신고를 하겠다고 D 씨에게 협박도 했다.

D 씨도 나름 결심하고 사용자의 협박에 넘어가지 않고 밀고 나갔다. 결국 미지급 연차수당, 임금 등도 받아 내고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었다. 그 사업장에서는 최초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기쁘지가 않았다. 저런 진상들이 폭행을 저지르고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돈까지 뜯어낼 수 있는 시스템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적인 고용허가제의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29년 전 명동성당 들머리에 걸린 팻말처럼, “때리지 마라”, “이주노동자도 인간이다!”

강제 근로와 ‘출근 투쟁’

근로기준법은 강제 근로를 금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강제 근로가 이직 금지다. 고용허가제는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고 있으므로 이미 고용허가제 자체에 강제 근로가 내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용자들은 더 확실하게 하려고 이주노동자들에게 사업장 변경 자체를 금지하는 각서를 강요하고 있다는 얘기가 풍문처럼 돌았다. 그런 각서를 강요받은 노동자들이 나에게 왔다.

이들은 M, S, T 씨로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사업장에서 꽤나 고통을 받았을 텐데도 상담하러 왔을 때는 얼굴들이 너무나 밝아 기억에 선명하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 다행히 한 사업장에서 함께 일하게 됐다. 일이 힘들고 급여가 적어 이들이 사업장 변경을 요청하자, 사용자가 이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사용자는 이직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고, 서명을 거부하자 일을 시키지 않고 기숙사로 돌려보냈다.

사용자가 서명을 강요한 각서

사용자가 이런 각서를 대놓고 요구하는 상황은,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처우를 받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상담을 거치고 이들은 20일 동안 ‘출근 투쟁’을 벌였다. 사용자의 각서 강요 장면과 일하지 말라고 하는 장면을 20일에 걸쳐 품에 쥔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이런 상황을 사업장에서 견디는 것이 쉽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한편에서 안심한 것은 이들이 혼자가 아니란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친구가 있다는 것,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결국 20일의 ‘출근 투쟁’에 대해 사용자가 급여를 지급하지 않자, 곧바로 고용지청에 근로기준법 강제 근로 금지 규정 위반과 휴업수당(사용자가 근로 수령을 거부했으므로 휴업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미지급으로 진정을 넣었다. 20일간 ‘출근 투쟁’의 기록은 각서 사진과 함께 고스란히 증거로 제출됐다.

근로기준법에서도 처벌이 강한 강제 근로 금지 위반과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 제출로 사용자는 백기 투항했다. 이 순간은 매우 통쾌했다. 사용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이들은 언제나 그렇듯 밝은 얼굴로 찾아왔다.

강제 근로 강요도 쟁점이지만 함께 뭉치면 권리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 사건이었다.

이들의 해맑고 낙관에 찬 표정에서, 차별을 묵과하지 않고 싸울 수 있고 이길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읽었다. 고마운 M과 S와 T.

24년 전 명동성당에서 농성했던 이주노동자들의 표정이 이들처럼 밝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어깨를 걸었던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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