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건국자들은 자신들이 1948년에 팔레스타인인들의 정체성을 말살해 버렸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1950년대에 난민촌과 중동 전역의 망명 팔레스타인인 공동체에서는 민족 해방 운동을 구축하는 작업이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동력을 얻었다.
팔레스타인 난민 압도 다수는 비참한 미래를 앞두고 있었다. 난민촌에 빼곡히 수용된 팔레스타인인들은 유엔 기구들이 제공하는 눈곱만큼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난민촌이 있는 나라들 대부분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정치적 권리는 체계적으로 부인됐다.
부유층 혹은 중간계급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런 고난을 겪지 않았다. 그들 중 많은 수가 페르시아만 연안국들로 흘러들어 가, 공공 서비스, 언론, 몇몇 제조업 부문에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 바로 이들 집단 속에서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이 탄생했다.
1959년 쿠웨이트에서 엔지니어였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소수의 정치적 동료들과 함께 파타를 창당했다.
파타는 동아시아·라틴아메리카에서 있었던 게릴라 투쟁 경험을 모범으로 삼았다.
파타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불개입”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말인즉슨,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이 사는 아랍 나라에서 투쟁이 벌어질 때, 그리고 해당국 정부가 파타의 저항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경우에 투쟁의 어느 한쪽을 편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파타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장악하게 됐다. PLO는 팔레스타인인들을 공식 대변하기 위한 기구로서, 1964년 아랍 정권들이 창설했다.
1967년 이스라엘군은 공세를 펴 이집트 공군을 박살 냈다. 이스라엘군은 6일 만에 가자지구, 서안지구, 골란고원, 시나이반도를 점령했다. 이스라엘의 성공적 공격으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같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위신에 큰 타격을 입었다.
파타와, 팔레스타인해방민중전선(PFLP) 등 파타와 경쟁하는 더 좌파적인 단체들은 패배의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아랍 정권들의 정규군이 대패한 것 때문에 게릴라 투쟁 전략에 대한 열의가 높아졌다.
한동안 파타는 매우 불안정한 타협을 성공적으로 유지했다. 파타는 난민촌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으면서도 페르시아만 연안국으로 망명한 팔레스타인인 자본가들의 후원도 계속 받았다.
그 때문에 파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근거지를 둔 나라들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 투쟁에 엮이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전략이 처음으로 허물어진 것은 1970년 요르단에서였다. 당시 파타 지도부는 후세인 국왕하의 요르단 정권에 맞선 투쟁에 원치 않았지만 말려들게 됐고, 결국 요르단에서 쫓겨났다. PLO 본부는 레바논으로 옮겨 갔지만 그곳에서도 점차 격화되는 내전에 말려들었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고, 그에 고무된 레바논 내 이스라엘의 동맹이자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당 소속 민병대가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했다. 파타를 비롯한 PLO는 또다시 레바논에서 쫓겨나 이번에는 튀니지로 망명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정치적·군사적 주도권은 서안지구나 가자지구가 아니라 망명 지도부에 있었다. 하지만 점령하에서 나날이 계속되던 참상에 대한 울분으로 1987년에 ‘인티파다’(항쟁)가 분출했다. 이스라엘, 미국, PLO 지도부 모두 이를 예상하지 못했다.
인티파다 속에서 청년들은 장갑차에 맞서 돌멩이를 던지며 싸웠다. 인티파다는 이스라엘이 그간 주의 깊게 구축한 이미지, 즉 아랍이라는 골리앗에 맞서 싸우는 용맹한 다윗이라는 이미지를 박살 냈고, 이스라엘 점령의 진상을 온 세계에 폭로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전역에서 시위와 파업을 조직했고, 의료·교육을 제공하는 지역위원회들 간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들의 용기와 끈기 덕분에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이 되살아났다.